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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평점 :
성공한 두 덕후의 이야기!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코 한아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시의 6호선에서 눈에 뛸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길에서 말 걸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본인도 그 점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6개월에 한 번도 손질하지 않는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에, 직접 짠 니트와 걸을 때마다 편안하게 접히고 움직이는 긴 치마는 한아의 가게가 있는 서교동 골목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조금 멍하게 걷는 편이었다. 가만두면 정거장이나 역을 늘 놓칠 것 같은 표정으로. 9~10쪽
이 소설의 첫문장처럼, '한아'는 누군가 보고 반할만큼 멋진 외모와 스타일의 소유자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는 2만광년 떨어진 곳에서 한아를 지켜보다가 반해버려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먼 곳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오직 한아와 함께 있기 위해서. 심지어 한아와 11년 사귄 남자친구 '경민'은 '우주 자유 여행권'이라는 말에 미련없이 지구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우주로 떠났는데 말이다.
"나도 저렇게 여기에 왔어.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 왔어."
한아는 울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경민이…… 진짜 경민이 어딨어?"
"경민씨의 이름, 얼굴, 정보…… 특히 너와 관련된 정보들과 내 우주 자유 여행권을 서로 바꿨어. 완전히 자발적인 과정이었고 경민씨를 결코 해치지 않았어. 동의하에 바꾼거야. 지금쯤은 이 은하계 바깥을 탐험하고 있을 거야." 93~94쪽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95쪽
심지어 경민의 모습을 한 이 외계인이 망원경을 통해 한아를 보고 반해버리자, 외계인이 살고 있던 별 전체가 한아 꿈을 꿨다고 한다. 그 별의 사람들(외계인)은 "자가 분열로 번식을 하는데다가 인간보다 강한 집단 무의식으로 꿈이 이어져"(100쪽) 있어서 그렇게 공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101쪽
그런데 왜 하필 한아였을까? 이 우주에는, 아니 한아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한아였을까? 그래서 이 경민 모습을 한 외계인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엇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내가 네 옆에 있는 바보 인간보다 더 가까울 거라고, 그런데 그걸 넌 모르니까, 전혀 모르니까, 도저히 잠들 수 없었어." 102쪽
"억지로 수십억 다른 지구인들을 관찰해봤는데도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어. 미적인 기준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인간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게 안 느껴져. 근데 너만…… 너만 아름다웠어. 빛났어. 눈부셨어." 104쪽
한편 경민과 함께 지구를 떠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아폴로'라는 이름의 가수였는데, 우주대스타를 꿈꾸며 지구를 떠난 것이다. 아폴로의 팬클럽 회장이었던 '주영'은 경민의 모습을 한 그(외계인)로부터 아폴로의 소식을 듣고 아폴로가 있는 우주로 떠난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지구에는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주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폴로가 그 모두 아니 이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36~37쪽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예요. 난 따라갈 거야, 내 아티스트." 118쪽
"말 그대로 스타라니까. 중력이 없으면 스타겠어요? 벗어날 수 있었으면 나도 다르게 살았지. 가끔은 포기가 더 효율적일 때가 있죠." 119쪽
나 역시 오랫동안 덕후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아폴로를 향한 주영의 맹목적인 사랑에 공감했지만, (설정이 다소 황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아의 소소한 몸짓을 발견하고 사랑해 준 외계인의 사랑에 더 끌렸다. (『옥상에서 만나요』에서도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친구가 등장했었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 그것은 아마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