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 시대를 이끈 한 구절의 지성
허연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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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발견한 의미있는 한 대목, 그 한 대목만으로도 책은 나의 분신이 된다!

매일경제신문에 연재한 칼럼 <허연의 책과 지성>을 엮어서 만든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은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였다.) '시대를 이끈 한 구절의 지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장르를 불문하고) 세상에 한 획을 그은 작가와 그들의 책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화씨 451』이라는 소설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미국 환상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화씨 451』는 책이 죄악시되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화씨 451도는 섭씨 232.7도쯤 되는 온도로, 종이에 불이 붙는 온도를 의미한다. 정부가 책을 금지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책 한 권씩을 저장하기 시작한다. 어떤 책이 읽고 싶으면, 그 책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 그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으면 된다. 내가 만약 플라톤의 『국가』를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플라톤의 분신이 되는 것이다.

일찍이 윌리엄 서머셋 모옴도 말했다. "책에서 발견한 의미있는 한 대목, 그 한 대목만으로도 책은 나의 분신이 된다"고.

그렇다. 책은 나에게로 와서 내 자신과 합체한다. 나와 합체됐다는 건 나를 형성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나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확장된 나를 만드는 것이다. 또한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힘과 기술, 무기를 얻는 일이다. 5~6쪽

멋지지 않은가! 책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작가의 분신이 될 수 있다니. 한 문장만으로 그 책이 나의 분신이 될 수 있다니. 나 또한 한 권의 책을 읽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하나라도 있다면 성공한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장과 검색 기술이 점점 쉽고 편해지는 요즘에는, 책 내용은 커녕 좋은 문장을 만나더라도 기억하는 일이 드물다. 어딘가에 기록해뒀다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까,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인간 중심의 업적들은 결국 책이 만들어낸 것이다. 노예제가 사라지고,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고, 많은 질병에 대한 치료의 길이 열리게 한 원동력은 결국 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을 읽으면서 대중들의 자아와 시선이 달라졌고, 그 달라진 자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 것이다.

노예제나 여성차별 같은 말도 안 되는 만행이 자행되던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문맹'이다. 소수의 몇 사람에게만 책이 주어졌던 시대, 그 시대가 곧 야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책이 창문을 열어 주기 전까지 인간은 인간답게 산 적이 없었다. 마녀사냥이 자행되던 중세 때는 유럽 인구의 90%가 문맹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문맹을 벗어나 책을 읽게 되면서 야만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인류가 읽고 쓸 줄 알게 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이다.

마녀사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마녀사냥을 자행하는 사람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이 사라진 건 아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에 눈뜬 사람들이 마녀사냥이 옳지 않다는 걸 밝혀냈기 때문에 마녀사냥이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도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 인식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도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 인식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책의 한 문장을 가슴으로 외우는 누군가가 있는 한, 인류는 악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6~7쪽

세상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나아지고 있는데,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에 기억을 의지하고 있는 나는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요즘엔 그마저도 기록하지 않아서 기억은 커녕 검색할 것(기억) 조차 없다.

'칼럼'이었던 글들이라 가독성이 매우 좋지만,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끝나서 오히려 감질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책 속에 소개된 책들을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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