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서양철학사 을유사상고전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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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비판으로 철학자의 권위에 도전한 러셀!

개인적으로 숙원사업과도 같았던 『러셀 서양철학사』를 읽으려고 펼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 하나. 1,0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방대한 내용을 과연 정리할 수 있을까? 그냥 읽기도 힘든데, 러셀은 어떻게 『러셀 서양철학사』 를 쓸 수 있었을까? 심지어 번역가도 대단해 보입니다.

 

러셀은 '철학'이라는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하자고 제안합니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을 포함"(17쪽)하기도 하고,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권위보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17쪽)하기도 합니다. 그 둘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철학의 영역입니다. 그는 신학과 과학이 답할 수 없는 부분, 비록 정답이 없더라도 그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며 사람들을 위해 철학은 기꺼이 그 일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러셀은 철학사를 크게 세 파트로 나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초에 그리스 문명이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헬레니즘 세계와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의 고대 철학, 중세부터 르네상스 전까지 서양 철학의 중심이 됐던 가톨릭 철학, 그리고 르네상스부터 러셀이 몸담고 있는 논리분석철학까지 근현대 철학으로 나눠 그만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대한 철학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의 비판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는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비판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분야의 권위자이긴 하지만 과대평가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지금도 해당 분야에서 그들의 '권위'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죠.

이뿐만 아니라 러셀은 한결같이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혹평을 했습니다.

 

어떤 서평은 러셀이 철학사를 쓰고 있는지 논쟁의 역사를 쓰고 있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고, 역사를 오해했다고 비판한다.

다른 서평은 러셀이 능란하고 재치가 넘치는 저술가이지만 러셀의 저작 가운데 최악이라고 혹평하면서, 근현대 철학은 비교적 공정하게 논의했으나 고대와 중세 철학에 대한 논의는 무가치하다고 덧붙였다. 「해제」 1027~1028쪽

 

학자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러셀은 이런 혹평에 대하여 여러 학파와 철학자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변론을 전합니다.

 

라이프니츠를 제외하면, 여기서 다루는 철학자들은 나보다 더 많이 아는 다른 학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는 책을 저술하려면 피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우리는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책을 쓰는 사람은 한 저자나 짧은 시기에 집중하여 연구한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어느 한 부분에 할애하지 못한다. (…) 역사의 변화 과정에는 통일성이 있으며, 먼저 일어난 일과 나중에 일어난 일이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하자. 이 점을 밝혀내려면 앞선 시기와 나중 시기를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종합해야 한다. 「지은이 서문」 7쪽

 

비록 내용이 방대하긴 하지만, 꽤 잘 읽히는 편입니다. 러셀이 이 책 덕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였으니, 날카로운 비판 속에도 위트있는 문장들을 더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철학(역사)'를 짚어준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비단 철학 뿐아니라 서양의 여러 문화와 역사에 걸쳐져 있는 가톨릭의 역사를 알지 못해서 가끔씩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혹평들 때문에 책 읽기를 꺼려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 혹평들 때문에 이 책을 아예 읽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혹평들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철학책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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