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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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도, 현실에서도,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

예로부터 어른들이 누누이 하던 말씀이 있습니다. 친구를 잘 사겨야 한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절실히 느끼고 있는 말이기도 한데요, 여기 친구 때문에 나락으로 빠진 청년이 한 명 있습니다. 물론 『파우스트』의 박사처럼 친구 따라 강남을 가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전적으로 친구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친구 때문에 눈을 뜬 한 청년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소년이었을 때죠. 당신이 처음 만나서는 저를 부추겼어요. 저의 잘생긴 얼굴을 자랑하라고 가르쳤지요. 그리고 하루는 저를 당신 친구에게 소개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 분은 저에게 젊음의 경이로움에 대해 설명했고, 당신은 그 젊음의 경이로움을 보여 주는 제 초상화를 완성했어요. 바로 그 순간에, 지금도 제가 후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광기에 사로잡혔던 바로 그 순간에 저는 소원을 빌었죠. 아마 당신은 기도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245쪽

화가인 바질 홀워드는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두고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린 작품 가운데 최고이며, 이 초상화의 모델 또한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화가의 친구 헨리 워튼 경도 초상화의 주인공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집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도리언 그레이를 처음 본 순간, 헨리 역시 매력적인 청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를 보며 예술의 영감을 떠올린다는 바질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미 봉오리 같은 청춘과 백장미와 같은 순결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36쪽) 순수한 청년 그레이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합니다. 우리 생에서 '청춘'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가치이니 젊을 때 그 젊음을 깨닫고 누리라는 것입니다.

"아! 젊을 때 당신의 젊음을 깨달으시오. 쓸데없는 것에 귀 기울이거나 희망 없는 실패를 만회하려 발버둥치거나, 아니면 무지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저속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을 내주면서 당신의 황금 시절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시오. (…) 당신의 삶을 사시오! 당신 안에 있는 경이로운 삶을 살란 말이오! 무엇 하나 잃지 마시오. 항상 새로운 감동을 찾아 나서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시오……. 또 하나의 새로운 쾌락주의, 이것이 우리 세기가 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신은 그 쾌락주의의 가시적인 상징일지 모릅니다. 당신의 그 매력 있는 인격으로는 못 할 것이 없어요. 한 시기 동안 세상은 당신의 것이오……. (…) 당신이 인생을 그냥 헛되이 보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 아닌가 생각한 겁니다. 이유는 당신의 젊음이 지속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오. 정말 얼마 안 남았소. (…) 우리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스무 살 때 우리 안에서 요동치던 환희의 박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느려집니다. 수족은 늘어지고 감각은 무뎌집니다. 우리는 추한 꼭두각시 인형으로 퇴락해 그렇게 두려워했던 열정과 우리가 담대하게 응하지 못했던 멋진 유혹들을 기억하며 안타까움에 몸부림치게 될 겁니다. 젊음! 청춘! 세상에는 젊음 이외에는 단연코 아무것도 없으니!" 42~43쪽

헨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그레이. 헨리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시간이 갈수록 매력을 잃게 될 자신과는 달리 영원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될 초상화 속 자신이 부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소원을, 아니 기도를 합니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런데 이 그림은 항상 젊은 상태로 남을 것이 아닌가. 6월의 오늘보다 더 늙지 않을 게 분명한데……. 거꾸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 간다면! 그걸 위해서라면 ─ 그럴 수만 있다면 ─ 무엇이든 다 줄 텐데! 내 영혼이라도 내줄 용의가 있는데!" 47쪽

"전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면 무엇이든 부럽습니다. 제 모습을 그린 당신의 저 초상화도 부럽고요. 제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을 왜 저 초상화는 계속 가질 수 있는 거지요? 흘러가는 순간순간이 저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 저것한테 주겠지요. 아, 반대로만 되었어도! 그림이 변하고 나는 지금 모습대로 영원할 수 있다면!" 48쪽

놀랍게도 그레이의 소원은 이뤄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가 쾌락에 빠져 악행을 일삼을 때도 그의 얼굴은 변함없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의 아름다웠던 초상화는 점점 일그러지고 늙어 추악하게 변해갑니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얼굴과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그레이의 행동을 보며,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추악한 내면을 들킬까봐 초상화를 꽁꽁 숨겨둡니다. 자신이 그 초상화를 보는 것도 두렵습니다. 심지어 바질이 찾아와 초상화를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헨리를 소개시켜 준 바질을 원망하며 그를 죽입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초상화 속 자신의 얼굴을 찌르고 맙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찌르는 장면 덕분에 이 소설은 아주 인상적으로 마무리됩니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의 눈에 벽에 걸려 있는 눈부실 정도로 멋진 초상화 하나가 들어왔다. 그들 주인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젊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죽어 있었다. 야회복을 입은 그의 가슴에 칼이 꽂혀 있었다. 찌글찌글 늙고 주름살 늘어진 흉측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 사람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그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343~344쪽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다만 잘 쓴 책과 잘 쓰지 못한 책만 있을 뿐.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이고,

헨리 워튼 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나의 모습이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입니다. 그가 이 소설을 발표하자마자 사람들은 "폼 잡고 싶은 얼간이가 쓴 도덕적으로 타락한 위험한 작품이라며 내용의 음란성과 퇴폐성을 높고 혹평"(349쪽)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와일드는 혹평에 굴하지 않고, 이렇게 혹평을 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이런 평을 한다고 맞섭니다. 그렇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사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렇게 음란하거나 퇴폐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와일드는 세 주인공 모두 자신의 모습을 담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술에 있어서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바질 홀워드는 당연히 와일드일 수 밖에 없으며,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레이는 와일드가 추구했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와일드는 바질의 입을 빌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을 분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예술가라면 작품으로만 평가받기를 원합니다. 와일드 자신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인물이라고 추측하기 때문에, 이런 당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 이 둘 중 하나다. 그뿐이다." 7쪽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야지 자기 삶을 조금이라도 작품 속에 개입시켜서는 안 돼. 우리는 예술을 자서전의 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 26쪽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성 정체성과 그의 기행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술작품과 그것을 창조한 아티스트의 도덕성을 분리해서 받아들일 수 있나요?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저는 어렵습니다.

사랑에 충실한 사람은 사랑의 사소한 면밖에 알지 못해. 사랑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사랑의 비극이 무엇인지 아는 거라고. - P28

청춘이라는 게 우리가 지니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단 하나의 것이니까. - P40

과연 우리가 심리학을 엄밀하고 확실한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어 삶을 이루는 작은 샘물 하나하나를 다 밝힐 수 있는지.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잘못 이해하며, 더욱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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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28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분히 에피쿠로스적인 사고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작가의 삶과 그가 창조한 예술작품을 분리하는
건 난망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