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는, 정신 나간 짓이다!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서문」 10쪽

약 오 년 전 밤, '나'는 아르헨티나 작가 '비오이 카사레스'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일인칭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그들이 논쟁을 벌이던 별장의 복도 끝에는 거울이 달려 있었는데, 그 거울을 보고 비오이 카사레스는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화자가 이 말의 출처를 정확하게 따져 묻자 비오이는 『영미 백과사전』의 '우크바르' 항목에 그 기록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즉시 별장에 구비되어 있던 백과사전에서 '우크바르' 항목을 찾아보지만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비오이는 우크바르라고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철자들을 뒤졌지만,우크바르라는 항목은 없었습니다. 화자는 비오이가 자신이 한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즉석해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비오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비록 자신이 말한 것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백과사전 46권에는 우크바르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환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궤변이다.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13쪽

화자가 비오이에게 그 책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자, 며칠 후 그가 그 책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46권 921페이지에 우크바르 항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별장에서 그들이 함께 확인했던 똑같은 백과사전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페이지 수가 달랐습니다. 별장에 있던 백과사전은 917페이지 밖에 없었지만, 비오이가 가져온 백과사전에는 4페이지가 추가된 921페이지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또, 46권은 Tor에서 시작해 Ups로 끝나서 알파벳 순서 상으로는 결코 마지막 항목에 우크바르가 실릴 수 없었습니다. 이 백과사전에는 우크바르의 국경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었고, 그들의 역사는 물론이고 언어와 문학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믈레흐나스와 틀뢴이라는 두 환상적인 지역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크바르'라는 미지의 항목을 추가해 넣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우크바르라는 곳이 존재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 책에서 나는 그가 17세기 초 '장미 십자회'라는 상상적 단체에 관해 쓴 독일 신학자이며,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예시한 것을 모방하여 실제로 그런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16쪽

그로부터 이삼년 후, 화자는 한 책에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의 단체를 한 신학자가 언급한 후에 실제로 그 단체가 설립되었다는 글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른 책에서 우크바르와 틀뢴과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또다시 접하게 됩니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그 기록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우크바르 혹은 틀뢴 역시 한 비밀 결사의 작품으로 직잠합니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세대의 틀뢴주의자들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대담한 생각은 우리를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회귀하게 한다. 즉, 틀뢴을 만든 것은 어떤 사람들인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라는 복수는 피할 수 없다. 하나의 무한한 라이프니츠처럼 표면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어둠 속에서 일하는 단 한 명의 창조자라는 가설은 만장일치로 기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멋진 신세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천재의 주도하에 천문학자, 생물학자, 기술자, 형이상학자 시인, 화학자, 대수학자, 윤리학자, 화가, 기하학자 등으로 구성된 비밀 결사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20쪽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해킹한 데이터를 저장한 디스크를 책 속에 숨겨두고, 감독은 일부러 그 책의 제목을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 책은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입니다.

이 책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하며,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인 '시뮬라크르 하기'입니다. 이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재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재현'은 존재했던 것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어서 원본 조차 없는 것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시뮬라크르'가 더 촘촘하게, 그리고 완벽해질수록 우리는 실재와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믿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틀뢴주의자'들이 했던 작업들도 '시뮬라시옹'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가상의 행성을 만든 다음, 책 여기 저기에 그것의 기록을 남겨 놓습니다. 처음에는 화자처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쉽게 믿어버리는 백과사전이나 지리책 등에 그것에 대한 언급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가상의 행성에 대해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행성을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어떤 것보다 이 행성의 존재를 더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우주를 한 명의 신이 창조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인거죠. 세계 곳곳에는 그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남아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를 믿고 성지순례를 하는데 혹시 이것도 '시뮬라크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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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21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뮬라시옹, 예전에 사두었는데 읽었는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마도 안 읽을 것으로...

뒷북소녀 2019-01-30 14: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안 읽었다고 생각해서 읽다보면... 읽었고... 그런 책들이.
아마 갈수록 제 기억은 더 희미해지겠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