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발한 배롱나무 사진이 8월부터 인스타그램 피드를 채우고 있었지만, 덥고 또 더워서(여기는 대프리카니까요) 이제서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한 권을 들고 답사에 나섰습니다.
붉은 꽃들이 제법 떨어져서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목적은 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답사하는 것이었으므로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파란 하늘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나머지 5대 서원은 도산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 소수서원입니다.
19세에 순천 박씨와 결혼한 김굉필 선생은 합천군 야로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가 현풍으로 돌아와 지금의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 아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16세기 중반 곳곳에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 정구(1543~1620)가 나서서 선조 2년(1568)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는 이 서원에 도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주었다. '도동(道東)'이란 그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로, 도학이 한훤당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리는 이름이었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ㆍ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도 훼철(毁撤)되지 않아 조선5대 서원의 하나로 손꼽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213쪽
본래 도동서원의 대문은 매우 작은 환주문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 쓴 이의 갓이 닿을 정도로 낮다. 그리고 강당인 중정당은 아주 높직한 석축 위에 올라앉아 마루에 앉으면 환주문을 눈 아래에 두고 은행나무 너머 낙동강을 멀리 내려다보는 조망을 갖게 되어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216쪽
그런데 그렇게 펼쳐지는 시야가 이 수월루로 인하여 막혀버린 것이다. 철종 때 증축한 분들은 "서원의 제도에 맞으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 출입하기 가파르고 갑갑하다"는 이유로 수월루를 세웠다는 것이다. 과연 그래야 했을까?
도동서원은 북향집이다. 남향을 버리고 북향을 택한 것은 낙동강을 유유히 바라보는 전망을 갖기 위함이었다. 남에게 보여주는 외관보다도 내가 사용하는 내관을 중시했던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216쪽
도동서원 앞에 당도하면 사람들은 우선 김굉필나무라고 이름지은 은행나무의 늠름한 자태에 입이 벌어진다. 외증손 정구가 이 자리에 동서원을 세울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이 400년 이상 된다. 내가 시각장애인들과 여기를 답사했다면 그들로 하여금 몇아름 되는지 둘러보게 할 생각이었다. 아마 다섯명이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다. 낙엽이 질 때면 이 앞마당에 온통 은행잎이 깔려 답사객들은 그 노란 카펫 위를 거니느라고 좀처럼 서원 안으로 들어갈 줄을 모르곤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215쪽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 수월루 때문에 막혀버린 시야를 확인하는게 이번 답사의 목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수월루와 4대강 사업 때문에 낙동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강둑까지 내려가 낙동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옛날 마루에서 보였을 법한 풍경이 이랬겠죠? 은행잎이 노랗게 깔리면 노란 카펫을 밝으러 다시 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