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 - 지미 카터, 퇴임 후의 삶, 공공리더를 위한 지혜 총서 공공리더를 위한 지혜총서 2
지미 카터 지음, 이종훈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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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퇴장은 또 다른 등장이란 말이 있습니다. 현직에서 물러난 리더들이 퇴임 이후에 더 아름답게 평가받는 것을 일컫습니다.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재임 때보다도 퇴임 이후가 더 아름답게 평가받는 리더입니다.

사실 그는 재임 당시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일쇼크와 이란 사태 해결의 실패가 그의 지도력에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퇴임 이후에는 더 빛나는 활동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는 그가 세계 각국을 돌며, 그들의 평화와 안녕과, 인권과 질병 퇴치를 위해 발로 띤 발자국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물론 그러한 발자국은 자기 혼자만의 역사가 아니라 ‘카터재단’을 통해서 함께 한 역사였습니다.

“나는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약소국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이 국가들은 대부분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세계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다. 따라서 카터재단은 가이아나, 동티모르, 아이티,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공화국, 모잠비크, 나카라과, 가나, 이 밖에도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중동에 위치한 국가들처럼 가장 가난하고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왔다.”(머리말)

그는 퇴임 이후에 중동의 평화 정착을 위하여 온 몸으로 뛰어 다녔고,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 북미 3차 회담을 통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 의지를 확약 받았고, 50년 만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자유로운 선거를 치르도록 해 주었고, 세계적인 질병퇴치 운동과 함께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 등 각종 눈부신 활동을 펼쳐 보였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을 하는 데에는 때로는 미국의 강경파들과 대립을 하기도 하고, 워싱턴 정가라든지 미 국무부를 설득하는 데 외로운 싸움도 해야 했음을 밝힙니다. 그만큼 남미의 자유와 평화, 공산권의 인권을 위한 개선을 위해 미국 내 주도권을 쥔 고위직 인사들의 설득이 쉽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채택된 ‘예방 차원의 선제공격(preemptive war)’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 방침은 과거 행정부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카터재단은 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온 미국의 역사적 전통을 회복시키려고 애쓰는 책임 있는 여러 단체들과 정치적 도의를 지키는 범위 안에서 계속 협력할 수 있다.”(344쪽)

그렇듯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퇴임 이후의 활동들을 보노라면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의 삶과 겹쳐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에는 아무런 활동도 없는 ‘허수아비 대통령’도 있고, 엉뚱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대통령도 참 많습니다. 어떤 점이 비교되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는 거대한 리더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면 퇴임 이후에 작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거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삶을 어두운 곳에서 촛불처럼 불태우는 작은 리더들도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퇴장 이후가 그와 같다면 굳이 지미 카터처럼 세계를 무대 삼아 발버둥치려고 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맞는 퇴임 이후의 삶을 찾아 곳곳에서 발로 뛰면 그곳이 어둠을 밝히는 빛의 진원지요, 곧 아름다운 촛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퇴장도, 그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등장도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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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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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염려하듯이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다. 이러다간 1980년과 1998년의 두 차례 경제공항 이후, 2016년에 다시금 대규모 경제공황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뒤늦게 대두되기보다는 지금 당장이라도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서 나랏돈을 집어 삼킬 태세다. 미국식 경제금융 위기가 몰고 온 여파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 괴물의 출현이 국외에서만 비롯된 일일까?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은 그것을 2003년 7월 ‘2만 달러 경제’를 국정지표로 삼던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에서부터 형성했다고 본다. 집권 초기만 해도 스웨덴 같은 경제모델을 선택하려 했지만 탄핵돌파 이후에는 대중적 인기를 의식한 채 미국형 모델로 급선회했고, 저금리로 성장률을 억지로 높이려는 건설경기 부양책에 올인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뜻한 바와는 달리 빈부의 양극화가 극대화되고, 중소기업들의 빈곤적 악순환으로 인한 도산이 줄을 잇고, 자영업자들의 자금력이 위기에 봉착하고, 외국농산물의 수입으로 농업이 붕괴되는 깊은 수렁에 동시다발적으로 빠져들었으니, 결국 지역균형발전과 한미 FTA라는 극약처방을 내려 보지만 그마저도 ‘삼성공화국’과 ‘땅부자’라는 괴물의 몸집만 키웠을 뿐이란 지적이다.

그렇다면 괴물을 해체할 능력이 이명박 정부에게는 있는 것일까? 우석훈은 이명박 정부도 건설경기 부양책에 매달리고 있어서 이전의 ‘삼성+건설=노무현’에서 ‘현대+건설=이명박’으로 넘어왔을 뿐이고, 공공부문을 기업에 넘겨주는 ‘민영화’와 수도권의 땅 값을 올려주는 ‘수도권 중심의 정책’도 대기업과 토호세력들을 위하는 것 이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들은 인플레이션과 집값을 격발시킬 것이 뻔하기에 국민경제의 몰락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그럼 한국경제의 진정한 대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우석훈은 스위스 모델에서 그 해법을 찾고 있다. 스위스야말로 이렇다 할 지하자원과 에너지자원도 거의 없고, 국토가 70%가 산이라는 것과 있는 것은 사람 밖에 없다는 것, 관광소득도 유럽 국가들의 평균보다 높지 않고, 금융부문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5%밖에 안 된다는 점 등이 우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위스는 농업을 재발견하여 식품안전의 생태적 전환을 이루고 있고, 노동자들의 지식투입을 늘리고 숙련도를 높이고 창조능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 노동시간의 유연성을 확보해 나간다고 한다. 이는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에 치중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더욱이 전문직과 문화계의 정규직들이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해도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평화외교를 모토로 고립주의 정책을 채택했다고 한다. UN도 2002년에서야 가입했고, EU는 아직 가입하지 않았고, 미국의 FTA는 국민투표로 사실상 부결시켰다고 한다. 그런데도 스위스가 탄탄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직접민주주의 자치에 기반한 지방 분산형 구조와, 지역공동체 혹은 지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낸 제 3부분의 존재에 있다고 한다. 실업자 문제도 지역공동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준다고 한다.

“여기서 꼭 스위스형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특징이 생길 수 있는 일종의 지식-문화형 국민경제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푸는 것이, 실질적으로 지금 한국경제가 구현해 보이고 있는 ‘괴물’을 해체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219쪽)

결국 우리가 스위스를 모델 삼아 취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연방제 같은 지역정치에 의한 중앙화 구조를 보완하는 상.하원 양원제의 도입,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무시한 채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 하는 교육정책과 그것을 부채질하는 사교육의 열풍을 잠재울 수 있는 범국민적인 추진, 그리고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제 3부문의 활성화 정책에 있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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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하나로 시작하는 일러스트 연습장] 서평단 알림
연필 하나로 시작하는 스케치 연습장 - 연필 하나로 펼쳐지는 멋진 세계!
유모토 사치코 지음, 류현정 옮김 / 한빛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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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느낀 부분을 글로 옮기는 것은 그래도 쉬운 부분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받침이 몇 개 빠진다 해도 누가 탓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글 흐름이 그저 좋으면 되고,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면 된다.

그렇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렸을 때는 학교 수업 때문에라도 어설프게나마 그렸던 것 같다. 스케치도 그렇고 인물화나 정물화도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림과 담을 쌓고 지냈으니 스케치조차도 쉬운 게 아니다. 

유모토 사치코의 〈스케치 연습장〉은 나름대로 내게 희망을 안겨준 책이다. 연필 하나로 낙서하듯 스케치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었기 때문이다. 연필로 선과 원, 물체와 반사, 원근과 구도 등 다양한 모습의 스케치를 따라 할 수 있도록 기회도 직접 부여했다.

“아름다운 경치를 스케치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스케치북을 들었더라도 대상이 발산하는 색, 형태, 질감 등 여러 정보에 취해버려 자신감을 잃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정보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해 깔끔하게 생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많은 정보는 반드시 스케치를 하기 위한 힌트로 바뀔 것입니다.”(머리말)

모름지기 글도 자꾸자꾸 쓰면 실력이 나아지듯 그림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데에도 방법과 모양새를 알면 좀 더 일찍 글쓰는 방법을 터득하듯이, 스케치도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로만 따라 하면 더욱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글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듯 나름대로 밝혀 놓은 노하우를 따라하는 게 최상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모방이 제 2의 창조라는 말은 결코 괜히 나온 게 아니지 않던가.

이 책을 통해 값지게 배운 것은 그것이다. 처음부터 꼼꼼하게 스케치하려는 자세를 버리라는 것. 처음엔 그저 원근과 상하좌우의 구도를 파악할 것. 그 다음에 앞의 풍경이 원형인지, 사각인지, 아니면 삼각인지를 살펴서 두루뭉실하게 그릴 것. 그리고 나서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세밀하게 스케치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책은 사람과 짐승이 상하좌우를 바라보는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또 앞을 향해 걸어 올 때와 뒷모습으로 지나갈 때가 어떻게 다른 지도 알려 주었다. 그런 것들을 감상만 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따라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연필 하나면 있으면 그야말로 스케치가 절로 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렇지만 뭐든 한 술에 배 부르는 일은 없듯이, 이 책을 가까이 두고 걸음마 하듯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스케치를 배워나가보면 장족의 발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듯이, 나에게도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라 기대가 된다.

*서평단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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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음식 - 음식 상식의 오류와 맹신을 고발한다
마이클 E. 오크스 지음, 박은영 옮김 / 열대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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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시금치는 철분이 많이 든 채소라며 너도나도 좋아했다. 그런데 결석이 생기기 쉬운 체질에게는 불량 음식이 된다고 한다. 우유도 영양이 풍부하여 어렸을 때 많이 먹었다. 하지만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겐 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모든 음식에는 우량과 불량의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량적인 면이 더 활발하게 작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량적인 면이 더 강화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양면을 종합적으로 따져보기보다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평판에 치우치는 경향이 짙다.

마이클 E. 오크스의 〈불량음식〉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상식처럼 지니고 있는 음식의 오류와 맹신을 고발하는 책이다. 이른바 갖가지 음식이 지닌 영양소의 장단점보다도 그저 여기 저기 알려져 있는 식품의 평판에 치우쳐 있는 그 단면들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는 책이다.

일례로 지방은 우리 몸에 유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방이 비만과 심장병과 각종 암을 유발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하지만 지방은 모든 세포막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생리물질을 생산하고, 신체기관의 유해요인으로부터 막아주고, 신경계의 전달체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이 책에서 밝힌다.

소금은 또 어떠한가? 보통 사람들은 소금의 섭취, 이른바 나트륨의 섭취가 고혈압의 원인이 된다고 믿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는단다. 소금은 40%의 나트륨과 60%의 염화물로 구성되는데, 나트륨은 인체의 체액농도를 조절하고, 산과 염기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등 우리 몸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수십 억 개의 전기신호를 일으키는데 관여한다고 한다.

사과도 건강에 매우 좋은 식품으로 믿고 있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다른 식품에 비해 풍부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식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기도 전부터 재배되었고, 그것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란다.

아이스크림도 일반적인 평판과는 달리 고지방 식품들 대다수에 비해 건강에 좋은 식품이며, 몇 종류는 비타민과 미네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영양성분에서 우량식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천대받고 있는 감자도 마찬가지다. 감자는 일곱 가지 비타민과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는 우량식품이라고 전한다.

“연구자들의 신념 또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맞춰지며, 만들어진 연구 결과들은 대중매체를 통과하면서 더 많이 조율된다. 이런 조율 과정을 거치다보니 ‘먹는 일’과 ‘건강’에 관해 객관적이기보다는 다소 편향된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편향된 정보 중에는 당연히 명백한 모순을 보이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250쪽)

그처럼 몇 몇 연구자들의 편향된 연구결과와 정보를 통해 전해 듣는 평판이 현대판 가정 식탁을 뒤흔들고 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소량의 불량적인 면보다 다량의 우량적인 면을 놓침으로 인해 병을 키우는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편향된 정보와 평판에 치우쳐서 좋은식품도 불량식품이라 단정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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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으로 올라가니(행1:12-14절)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좋은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지닌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교인들이 꽉꽉 찰지라도 예배 행위를 뺀 나머지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비록 교인 수가 적을망정 모든 교인들이 생명력을 지닌 채,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산다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통해 이 사회를 새롭게 하시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지니신 채 구름에 안겨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휘황찬란하게 변한 주님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천사는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일러 주었습니다. 그 일은 성경 속 비유적인 해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역사로 다가올 것을 약속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하필 두 천사는 제자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만큼 주님과 함께 3년동안 동고동락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승천의 장면을 직접 바라본 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은연 중에 자기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것마냥 자기 교만과 자기 아집에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경계하도록, 자신들의 근본된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러 줬던 것입니다. 그만큼
갈릴리 출생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겸손하게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본문 12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은 감람나무, 다시 말해 올리브 나무가 많은 감람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승천하신 주님을 보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확신한 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전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세상 사람들을 도피하여 산 속에서 신선노름 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자신들이 두 발로 딛고 살아야 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은 그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어디에 모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소위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기도모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모임으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은 성령님의 임재를 바라는 낮고 낮은 심령을 지닌 ‘갈릴리 사람들의 모임’(행1:11, 행2:7)이었습니다. 그 모임은 자신들의 욕망이나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사교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임은 연약하고 볼품없는 자신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가 그 땅에 흘러 퍼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임이었습니다.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임이었기에, 오순절 날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재 하셨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그들의 모임 장소를 ‘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다락방’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페룬’(hypeeron)은 그 집의 가장 높은 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을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칭합니다. 그 집 주인의 이름이 마가라고 하기 때문에 붙인 호칭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처럼 그 집을 마가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는 그 집을 가리켜서‘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유인 즉 주님을 위해 그 집을 내어 놓은 사람은 마가가 아니라, 마가의 어머니였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관습상 여자의 이름보다는 남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관례였기에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들의 기도모임을 1층 접견실이 아닌 2층 다락방에 두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고층 빌딩과 같은 집은 짓지는 않았습니다. 단층집이거나 높아야 2층이었습니다. 1층은 남자들이 기거하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삼았고, 2층은 여인들이 머물며 일하는 공간(the highest part of the house, the upper rooms or story where the women resided)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120명 정도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1층 접견실에서 모여야 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은 그 모임 장소를 1층이라 하지 않고 2층‘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2층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머물던 장소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뗄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락방과 관련하여, 신약시대보다 앞선 구약 시대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된 생생한 역사를 증언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은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이란 동네에서 행한 일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 동네에 갔을 때에 그는 한 여인의 집 다락방에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집 주인의 어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자신이 기거하던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그 다락방의 침상에 아이를 누인 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줄 것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 아이는 살아나게 됩니다. 바로 그 집의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후계자였던 엘리사 역시 그와 동일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이란 동네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한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다락방을 지었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게 됩니다. 본래 그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후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안고, 아들의 시신을 엘리사가 기거하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돌아 온 엘리사의 기도로 인해 그 아이가 다락방에서 살아납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다락방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신 자가 있다면 그곳은 죽음과 절망의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의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 장소가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진리의 말씀을 유훈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 당신 자신의 몸을 보여주시면서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그렇듯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받들어 그곳 마가의 다락방에서,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르밧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과 수넴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머잖아 그곳 마가의 다락방은 오순절 날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곳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는 생생한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마가의 다락방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의 모임이 무엇을 위한 모임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위한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교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는 모임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이는 장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곳이 크고 화려한 공간이든, 비좁고 볼품없는 장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1층이든, 아니면 마가의 다락방처럼 2층이든, 그도 아니면 지하나 3층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는 모임의 장소가 어떤 곳이든지 간에,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나누고 받드는 통로가 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공간에만 임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심령이 낮고 낮은 자들을 통해서만, 그 마음이 비고 비인 자들을 통해서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모임을 갖든, 우리 마음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모인다면, 그곳이 바로 오늘의 마가의 다락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존 번연은 자신이 쓴 《천로역정》 중 목동의 노래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는 쓰러질 염려가 없고,

낮은 자는 교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나니

겸손하자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이곳을 낮고 낮은 마음으로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으로 삼으십시다. 진정으로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십시다. 아니 우리가 거하는 그 어떤 곳이든 그곳을 마가의 다락방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때에 진리와 생명 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 하시사,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는 생명의 참된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교회가 참된 마가의 다락방이 되길 원합니다.

그 옛날 사르밧 과부의 다락방처럼,

수넴 여인의 다락방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보는

참된 심령의 소유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좇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곳들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는

이 시대의 마가의 다락방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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