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1:9-11)

 

지난주에 어떤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화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분으로부터 기도를 받고 일을 시작하고 있는데, 지금은 영 개운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일을 그만두고 싶고, 또 다시 기도를 받아보고 싶어서 기도를 받아봤는데, 이번에는 처음 기도해 준 것과 다르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해 준 그 분에게 화를 냈는데, 그것이 성령해방죄는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전화내용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제게 전화를 건 분이 흔히 말하는 예언기도를 받았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혹 예언기도를 받아 본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뭔가 황홀하고, 앞날이 확 트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흔히 예언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점쟁이처럼 앞을 내다본다는 뜻의 ‘미리 豫(예)’자를 쓰는 ‘豫言’(예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은행에 돈을 ‘맡기다’ 할 때의 ‘맡길 預(예)’자를 쓰는 ‘預言’(예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점쟁이처럼 미리 앞을 내다본다는 예자의 예언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는 자입니다. 신약이 있기 전 구약의 시대는 예언의 시대여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쓰여 있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영감의 말씀으로 우리의 앞날을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사는데, 어찌 우리의 앞날에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이 술술 풀리고 날마다 행복한 일만 쌓이다가도 불현듯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불행은 하나님께서 그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너무 행복에 겨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까봐, 하나님께서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기에 허락하시는 고난이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야말로 참된 예언가가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이룰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자신을 포함한 조상들이 받았던 과거의 그 복을, 자식들이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 야곱이 한 축복은 축복인 동시에 구약시대의 예언이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축복 바로 그 예언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었을까요? 단지 야곱의 입에서 나온 그 혀끝의 말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야곱이 무턱대고 아들들의 미래를 예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 열 두 아들들이 살아 온 과거에 기초해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말씀이 창세기 49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은 ‘그들 각 사람, 그 아들들의 분량대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 열두 아들들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두고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보고서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예언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불변하는 미래를 확정짓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예언은 고정된 운명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미래는 고정 불변의 미래가 아니라 열려있는 미래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나의 앞날이 달라질 수 있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엉터리로 살아 온 사람에게 아름다운 현재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의 삶을 최선으로 준비하는 자에게 복된 미래가 열리지 않을 수 없는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그 예언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습니다. 이른바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씨가 말라버린다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그런 저주가 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창세기 34장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한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때 시므온과 레위가 자신의 여동생인 디나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히위 족속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히위 족속은 그 말을 믿고 할례를 행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시므온과 레위가 다 쓸어버렸습니다.

야곱은 그 때의 사건을 기억하고서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짐을 당할 것이라고, 그 족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시므온은 야곱의 예언 그대로 유다 지파에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나 레위는 어떠할까요? 레위는 시므온의 경우와는 달리 결코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레위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황금 송아지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맞서서 모세의 편에 앞장을 섭니다. 그만큼 레위는 야곱의 예언을 받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실한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됩니다. 그야말로 레위를 향한 야곱의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일입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예언은 불변하는 미래를 예견하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설혹 축복된 예언을 받았어도 그가 바르고 신실하게 응답하지 않으면 저주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저주를 받았어도 신실한 삶으로 응답해 나간다면 그 이후가 참된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입술에 떨어지는 예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당사자의 신실한 삶의 결과에 따른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이나 신비로운 것에 도취되어,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신앙인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 자신을 하늘에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 살도록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좇는 사도행전의 오늘 본문을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환히 엿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낸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승천해야 할 때가 되셨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세례를 통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때의 ‘권능’이란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을 위해 손수 대야에 물을 떠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권능’이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어린 아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모두 받아주셨던 ‘사랑의 권능’이요, 자신을 향해 비수를 꽂은 가롯 유대를 비롯해 모든 바리새인과 사두개 대적자들을 향해서도 모두 품어주셨던 ‘포용의 권능’이요, 온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뜨린 ‘평화의 권능’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권능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을, 다시 말해 이 세상 한복을 땅 끝으로 삼아 참된 증인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을 끝으로 당신은 본래의 본향인 하늘 보좌로 올려져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늘승천 사건이야말로 당신 자신에 대한 명예회복의 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어 보좌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들 성자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만 천하에 드러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 역시 이 땅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그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증인의 삶이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서 평가받을 것이요, 명예회복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목격하는 그 장면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10-11절 상반부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우리말 ‘쳐다보느냐?’로 번역된 헬라어 ‘엠블레포’(emblepo)는 ‘온 마음을 다해 응시하다’, ‘넋이 나간 채 뚫어져라 쳐다보다’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배우가 넋이 나간 채 어떠한 생각에 몰두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도 우리 자신이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면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와도 좀체 들리지 않고,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변화산상에서 엿보인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하게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장면을 본 베드로는 완전히 황홀감에 도취되어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씀합니다.

‘이 산에다 주님을 위해, 모세를 위해, 그리고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으며 평생 살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마17:4)

이를테면 산 아래로 내려가 세상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괜히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그냥 이 산속에서 살자는 의미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루 동안 세상 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뜻하지 않게 이 사람에게 치이고 또 저 사람에게 치여서 심령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그런데 교회에 나와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다 뭔가 붕붕 뜨는 것 같은 은혜의 파도 속에 젖어드는 그 황홀감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죄악과 다툼으로 얼룩진 악마의 소굴 같고, 교회는 천국 같아서 좀체 세상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넋이 나간 베드로를 향해 산 위에서 살자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세상을 등진 채 무릉도원 같은 그 산 속에서 뜬 구름 잡으며 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품고 세상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받들어 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속 천사들도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황홀한 하늘에 넋이 나가 있어야 할 게 아니라 너희들의 세상 속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어법 같은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요3:16)고 말씀하고 있고, 그래서 죄악과 다툼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지만 멸망시키지 않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셨다”(요3: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면, 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은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이 세상을 품고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모두가 천국이요, 세상은 모두가 지옥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금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인 욕망을 구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할 때에 그 가치를 드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을 우리의 최고 정점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최고 목적의 지점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우리가 바닥에서 살더라도 하늘을 보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두 발을 내딛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지만,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골3:1)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는 날 우리의 영혼이 입성해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저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아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이 세상 사람들을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선하게 사랑하지만,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에는 우리가 가야 할 본향으로 입성해야 할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끝점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통변 같은 일들, 병을 고치는 기적 같은 일들에 현혹되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들이 황홀하고 멋지기는 하지만 주님의 날이 도래하는 그날 그 모든 것들은 폐하게 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신비스럽고 황홀한 것에만 붙잡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팽개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적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예언과 신비를 찾아다니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십시다.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오늘의 일, 내가 준비해야 할 내일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십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정한 가장 합당한 때에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사랑하는 하나님

세상이 혼탁하고 경제가 어렵고 숨이 확확 막힐 지경입니다.

앞날의 걱정 때문에 예언이나 신비로운 것에 현혹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신비롭고 황홀한 것에 매달린 채 세상에서의 책임과 의무에 등진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일에 말씀과 성실로 다하여

참된 미래를 열어가는 참된 예언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언젠가 우리를 부르실 그 때가 분명 있을 것이오니

이 세상을 끝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벗어나,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지혜로운 자들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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