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세워(행1:21-26)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의 사도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들 12명의 사도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젤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가롯 유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늘 함께 하셨고, 그들과 따로 있을 때에 자신이 말한 비유들을 쉽게 설명해 주셨고, 그들이 세상에 나가 전도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에는 그들의 발을 직접 닦아 주셨고, 당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떡과 잔을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주님의 돈독한 사랑을 받았던 그들 12 사도들은 주님을 위한 사도의 직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본래 ‘사도’를 칭하는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 12사도는 당연히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요, 주님의 뜻을 전하는 그 직무를 감당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 12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집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신하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웨이터로 자신들의 직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가롯 유다는 주님을 위한 집사나, 주님을 위한 신하나, 주님을 위한 웨이터로서 직무를 감당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마이 웨이(my way)를 향해 나아갔던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직무를 제 욕망과 출세를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최종국 인생은 목을 매 자결한 줄이 떨어져,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왔고, 온 몸이 피투성이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이요, 그의 몸은 ‘피밭’을 칭하는 공동묘지 위의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생명과 진리를 위한 길을 걷던 사람이 제 욕망을 좇아 자기 자신의 마이웨이를 걷는 자가 있다면, 그의 생명은 생명으로서 가치가 있을 수 없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유의하고자 하는 말씀은 자기 자신의 마이웨이를 걷다가 피밭이라는 공동묘지 위의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한 사람을 보선하는 장면입니다. 본문 21-22절 말씀은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선택하는 ‘그 기준’이 명시돼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서서,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보선하는 기준으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항상 함께 다녔던 사람이고, 다른 기준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실 때가지 늘 함께 동행했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로 믿음이 돈독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든 120명의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그 자리에 그들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예루살렘에는 마가의 다락방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거대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었고, 원형극장과 경기장이 시가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가의 다락방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요, 오히려 예루살렘 성안에 가득 차 있는 별천지 구경거리에 온갖 관심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에 비해 지금 120명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들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 기도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거리와는 달리 자신들만큼은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들의 손이 주님의 손이 되도록, 자신들의 발이 주님의 발이 되도록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 120명의 제자들은 다른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믿음이 출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기에도 충분한 자들이었음은 제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 120명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늘 함께 동행 했던 자들이라면, 이들 120명의 제자들이야말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최적격자라면, 이들 120명의 제자들도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로 선택되기에 충분한 자들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본문 22절은 “하나를 세우자”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12명의 사도들 가운데 가롯 유다 한 사람이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12명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함에서 ‘하나를 세우자’는 의견입니다. 더욱이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를 상기하여 그 전통성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들 120명 가운데에 ‘그 한 사람’이 선출된 것은 유독 그가 믿음이 출중하거나, 그가 재력자이거나, 그가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거나, 그가 뛰어난 학식을 자랑하고 있거나, 그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12사도로 선택된 12사도들의 믿음과 인격과 형편과 처지를 살펴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16절에는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16절 말씀에는 다른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롯 유다를 소개하시는 부분이 후반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롯 유다라”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다른 11명의 사도와 함께 마지막 12번째 사도로 선택된 가롯 유다를 밝히는데, 성경 기자는 머잖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 자임을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데오빌로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이미 이전에 경험한 일들을 되 뇌이면서 자신의 붓을 든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가롯 유다가 12사도에 선택되었지만 그가 머잖아 예수 그리스도를 팔게 될 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 것을 예수님 당신은 모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함께 하셨던 삼위일체의 제 2격 되시는 성자 하나님은 이미 가롯 유다가 자기 자신을 팔 자임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를 자기 자신의 품으로 품으시고, 12사도로 선택해 주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품 속에서 가롯 유다의 연약함과 유약함이 견고해 질 것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사도로 선택된 이후에는 그의 인격이 스승을 파는 배신자가 아니라 더욱더 주님을 위한 집사로, 주님을 위한 신하로, 주님을 위한 웨이터로 그 인격이 다듬어지길 바라고 바라셨던 까닭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없었던들 결코 주님은 그렇게 배신자가 될 가롯 유다를 당신의 품으로 품지 않았을 것이요, 그를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연약함과 유약함은 가롯 유다만 지녔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성미가 너무나 급한 불같은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매사에 실수만을 반복하던 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그들이 사마리아를 지나 갈 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요한과 야보고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하늘에서 불을 명하여 저들을 멸하라”(눅9:54)고 할 정도로 과격하고 엉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토록 과격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었기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우레의 아들’(마3:17)이란 별칭을 부여하셨던 것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분명코 세상 모든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요한과 야고보는 내다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대동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들에게 영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하나씩 내어 주도록 청탁하게 만들었던 자들입니다. 주님을 위한 집사, 주님을 위한 신하, 주님을 위한 웨이터와는 달리 완전히 이중인격자처럼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자들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는 동안에도 그들 제자들은, 잠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잠에 곯아떨어질 정도로 유약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던 인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불리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그 정도였으니, 이전의 세상 욕망을 누렸던 세리 마태나, 독립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셀롯인 시몬이나, 그 밖의 다른 제자들 역시 얼마나 연약한 성품의 소유자들이었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많은 제자들을 제쳐 놓고, 심지어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 따라다녔던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든 120명의 제자들을 제쳐 놓고, 왜 하필 그들 12명을 사도로 선택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가롯 유다를 선택하셨던 관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유약함과 연약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주님께서 가롯 유다를 당신의 품으로 품으시고, 사도의 직무를 맡겨 주신 것처럼, 그들 11명의 사도들은 본문 속 120명의 제자들보다도 더 연약하고, 불 품 없고, 형편없는 과격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더 품으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시기 위해서, 사도의 직무를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다른 많은 제자들을 제쳐 놓고, 심지어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을 제쳐 놓고, 유독 12사도를 택해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어주셨던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잘 나서이거나, 그들이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똑똑해서이거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인격이 출중하거나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더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가롯 유다를 대신할 ‘한 사람을 세우자’고 제안하여, 그 한 사람으로 선출된 '맛디아' 역시 결코 '유스도'보다도 믿음이 출중하거나 인격이 훌륭하거나, 가진 게 많고, 배운 게 많아서 선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본문 속에서 선출된 그 한 사람 맛디아는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절대적인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주님을 위한 집사와 주님을 위한 신하와 주님을 위한 웨이터로 봉사하고 섬기던 ‘여러 사람들의 중의 상대적인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 선출된 맛디아는 자신이 사도로 보선되었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없고, 특별한 존재로 인식할 것도 없고, 유별난 사람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120명의 사람들보다도, 심지어 자신과 경쟁하여 탈락된 유스도보다도 더 연약하고, 더 유약하기 짝이 없기에 주님께서 자신을 배려해서 사도로 세워주셨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자입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격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완숙하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유독 우리를 당신의 사랑과 관심으로 품어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모습은 찬송가 310장의 ‘아 하나님의 은혜로’에 아주 자세하게 고백돼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저는 저 자신을 잘 압니다. 누구보다도 급한 성격의 소유자요, 조그마한 일 하나에도 밤을 지새우며 끙끙 앓는 유약하고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집안에 막내이기에 위로 형들과 누님의 도움을 받아 온 내가 어떻게 주님의 교회를 이끌며, 교우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지는 생각할수록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주님의 교회를 이끌도록 목사로 세워주신 것은 주님의 은혜와 관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저는 잘 압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주님의 그 크신 관심이 없었던들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교회를 이끄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주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믿음으로 인함이요, 이토록 연약하고 볼품없는 저를 격려해 주고 믿어주고 지금껏 격려해 주는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인함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저 보다도, 오히려 세상의 한 복판에서 치열하게 주님의 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훨씬 더 훌륭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른 누구보다도 형편없는 우리 자신을 믿어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것, 그보다 더 큰 감격과 감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주님의 제자로 선택되었다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다.

그것은 내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내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볼품없고 초라한 나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푸신 한량없는 사랑과 관심에 의한 일일 뿐입니다.


그런 고백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본문 속 ‘한 사람’으로 선택된 맛디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직무를 다하는 신실한 주님의 사도가 될 것이요, 그런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은 한걸음씩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힘으로 인함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으로 인함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허물 많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배경이나 우리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품어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위치에서나,

 겸손함과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시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직무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이 시대의 12사도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그와 같은 우리의 겸손한 직무를 통해

내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나의 삶터와 일터와 가정과 사회가

한 걸음씩 새롭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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