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행1:8-1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이끌고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예수님의 의도를 알기 위함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죄가 있음을 알았기에 돌을 놔두고 돌아갔습니다.(요8:1-11)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적 속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두 가지 모순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간음이란 남자나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자는 아무런 까닭 없이 보내고 여인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엔 불륜을 저지른 여자만 처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자의 불륜에 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고, 여자의 불륜에 대해서는 한없이 심판적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중인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두 번째 모순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간음 자체의 행위에만 무게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본래의 마음입니다. 이른바 궁수의 화살이 과녁을 맞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정조준 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죄를 범했다는 것은 간음 자체의 현장보다 그녀의 그릇된 마음 상태가 이미 죄를 범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들 모두도 숙연해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죄 된 마음의 상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준수하는 것도 크나큰 모순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성경 말씀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고난을 알리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7:14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빈민들이 사는 갈릴리 동네에서 사역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실 때에는 십자가에서 대못이 박힌 채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 모든 말씀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행전의 오늘 말씀은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이제 곧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성령의 능력으로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예언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구름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너무나도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주님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여기서 주님을 위해, 모세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고 사시지요?” 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완전 신선처럼 용모가 변한 주님을 보고서, 도무지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아예 산 속에서 장막 셋을 짓고 편안하게 신선노름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꼭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의 힘을 입어,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으로 사명을 다해야 했지만,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만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흰 옷 입은 두 사람은 다음 구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제자들이 하늘 본향의 보좌로 올라가시는 그 장면에만 집착하고 있을 때에,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너희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본향의 보좌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하늘로 간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이 땅에 재림할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초림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야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야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병듦과 탄식을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말 구유에 태어나지 않고 왕실의 보금자리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갈릴리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을 상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과도 관계를 가졌고, 세리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 먹고 마셨고, 유대의 고위직 관인인 니고데모와도 진리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듯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를 망라하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그 초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과 진리를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든 모든 직업은 신성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로서 섬기는 직업만이 신성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그 직업과 일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 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 선교지가 때로는 가정이 될 수 있고, 일터가 될 수 있고, 직장이 될 수 있고,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정과 일터와 직장과 학교를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며 사는지는 중요합니다. 우리에 주어진 세상의 일을 오직 주님의 증인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주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진리와 생명으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라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지는 않습니다. 오직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신 문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물론 그 날과 그 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도 모르고, 성령님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아신다(마24:36)고 말씀합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성으로 입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의 본향인 천국이 그곳입니다.
요즘 들어 자칭 재림주라고 떠드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제주나 재림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결코 구세주도, 그리고 재림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미 마리아의 몸 속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만이 이 땅에 재림의 주로 하늘에서부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 그 누구도 재림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림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 하나님도 알 수 없는 노릇이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며 신실하게 사는 자라면, 하나님인 영역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실한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를 하고 있는데, 그 당부는 곧 이 시대를 향한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씀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하나님의 뜻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역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매일같이 가지 삶으로 증인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자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삶에서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굳이 그가 재림의 때를 알려고 하지 않더라도, 재림의 날에 자연스럽게 초청을 받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문자 그대로 사실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스스로 구세주나 재림주라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누가 재림의 때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어머니의 배속을 통해 태어난 자들은 결코 구세주도, 그리고 재림주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단 사설에 현혹되어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가정과 자식들을 내 팽개치고 그 삶을 탕진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도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재림이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 육신의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 살기를 바라는 이단, 사이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기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 있는 날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신성하게 여기십시다. 내게 주어진 세상의 일을 통해 욕망과 쾌락을 좇기보다 오직 땅끝의 증인으로 사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십시다. 그때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우리의 코끝에 있는 호흡을 앗아가신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코 끝에 있는 호흡이 멈추는 그 날은 우리가 소망하던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그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재림은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자칭 구세주로, 스스로 재림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신화와 꼬임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로삼아 진리와 생명을 분별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일을 통해 참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재림하실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며, 기대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재림 하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온 교우들 되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