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0 - 일어났다. 쓰레기 분리배출하는 날이고, 야자감독이 있는 날이라 조금 더 서둘렀다. 아침에 두 번 왔다갔다하며 쓰레기를 배출했다.

08:10 -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도착했고, 아침 방송부터 교실을 돌아다녔다. 방송 시간은 20분간이고, 한 번도 쉴 틈도 없이 빡빡하게 교실을 헤집고 다녔다.

08:40 - 공식적인 아침 회의. 언제나 그렇듯 지시사항만 잔뜩 내려오고, 나는 잘 듣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09:00 - 아이들에게 간단한 전달사항과 '잔소리'를 했고, 1교시 수업이었는데, 바로 다음날이 노는 토요일이라 아이들이 들떠 있는 듯 했다.

10:00 - 2교시는 수업이 없었지만, 자리에 앉아서 '고등학교 1학년' 의견 조사라는 공문도 아닌 듯한, 서류를 만들었다. 누구의 사적인 부탁인지는 몰라도 결국 거치고 거쳐서 나에게까지 왔고, 그냥 해치우자는 심정으로 컴퓨터를 열심히 두드렸다.

11:00 - 다시 3교시 수업시간. 여학생반인데, 이 반은 특별히 나를 좋아하는 분위기라 수업 태도도 좋고, 조용하게 집중한다. 그래서 열심히  수업을 하고 나오니 슬슬 피곤해진다.

12:00 - 4교시다. 4반 아이들의 체육시간. 같이 축구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체육복을 가져왔으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 줄넘기 수행평가를 해서 축구하기는 힘들겠다고 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2교시에 하던 서류를 마무리했다. 그것도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13:00 -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반의 OO이가 상담하러 왔다.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점심 상담시간이다. OO이와 학교 뒷편에 앉아서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이야기도 들었다.

13:40 - 다시 5교시 수업시간. 우리반 수업시간이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5교시 수업은 쓰러지는 아이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뤄야한다. 푸념과 협박과 잔소리를 섞어서 떠들었더니 힘겹다.

14:30 - 6교시 수업시간. 6교시는 클럽활동시간이다. 올해 맡은 반은 '독일문화탐구반'. 눈치를 보니 작년까지 동아리라는 이름만 걸어두고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동아리답지 않게 담당교사(나)가 주도해서 발표도 하고 놀이도 한다. 한 시간을 또 떠들었더니 이젠 진짜 피곤하다.

15:40 - 청소시간에 아이들이 아무도 청소를 해 놓지 않았다.

15:50 - 보충수업시간. 정규수업시간과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단지,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만 다를 뿐. 전교생이 모두 참여하는 보충수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 웃기는 사실은, 나도 우리반 녀석이 보충수업을 안 한다고 하면 내심 불안해진다.

16:40 - 전에 근무한 학교의 OO이. 오늘 자퇴서를 내고 나중에 저녁 먹으러 온단다. 반갑다. 이어지는 보충시간이다. 이것 때문에 오늘 수업은 총 6개가 되는 셈이다. 수업은 이제 서로가 힘든 상황이다.

17:30 - 정규일과가 끝나고 보충수업을 2시간이나 하고도 다시 교육방송수업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퇴근을 하시고 야자감독 선생님이 남아서 12반을 돌아다니시며 감독을 한다. 아이들도 지칠 때가 되었건만 아직도 무슨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다.

17:40 - 의주샘이 학교에서 축구하다 다쳤다는 연락이 왔다. 지금 학교 앞의 병원에 입원해 있고, 내일 수술을 해야한단다. 내일 보호자로 병원에 좀 와 달라고 했다. 오늘 저녁은 야자감독이니까, 저녁 늦게 가 보겠다고 하고, 서울에 갈 계획을 서둘러 취소했다.

18:40 - 이제 저녁시간이다. 자퇴한 OO이가 와 있다. 미리 주문한 돼지국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 계획인지, 지금 심정은 어떤지, 왜 자퇴를 하게 되었는지... 별로 망설이거나 막힘이 없다. 나는 자의식이 강해서 그렇다고 말해 주었고, 네 결정을 존중한다고 이야기했다.

19:30 - 다시 야자시간이다. 내일이 노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담임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교실이 헐렁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계속 웅성거린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조용히 공부하자고 달랜다. 정말 한 번도 앉지도 못하고 반마다 들어가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21:00 - 드디어 야자가 끝나는 시간이다. 아이들이 슬금슬금 돌아가려고 할 때 나는 우리반에 들어가서 청소해라고 했다. 녀석들은 후다닥 청소를 끝내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21:30 - 서영이가 6월 1일부터 재수학원을 간다고 해서 격려하는 자리를 갖기로 해 약속 장소로 가다가 생각해 보니 지갑을 학교에 두고 왔다. 서둘러 집으로 와서 돈을 좀 챙겨서 나왔다.

21:40 - 녀석들을 만났다. 모두 세 명이다. 둘은 대학생이고, 서영이는 재수생이다. 서영이는 지금껏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하다 이번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 재수학원에 등록을 했다. 얼마 전에 서영이와 그 일당들이랑 저녁을 먹었었는데, 이미 그 때쯤에 학원에 가겠다고 해서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푸짐한 저녁을 먹었음에도 감자탕과 소주 한 잔을 앞에 두니 자꾸 먹혔다.

23:20 -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를 접었다. 이제는 병원에 가봐야 할 시간이다. 병원에 갖다 줄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역시 집에 들러야 했다. 같이 가기로 한 안해는 잠에 취해서 내일 간다고 했고, 나는 짐을 챙겨 병원으로 갔다.

23:30 - 병원에 도착하니 역시 의주샘 혼자서 자고 있었다. 깨워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지도 물었다. 어머님께서 연로하시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일단 내일 아침에 수술할 예정이니 그 때 다시 좀 와달라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24:30 - 병원을 나섰다. 버스도 안 다니는 시간.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내일 일찍 병원에 가려면 서둘러 자야하는데 쉽게 잠이 안 왔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안 오는 것 같다. 책을 뒤적였으나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 생각해 보면 무지 길고도 힘든 하루였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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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5-3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왜 그렇게 사세요? ^^ 저의 삼일도 공개합니다... 놀러오세요~

2005-05-31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은 아마 서울에 있을 것이다. 음,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이니 괜찮은 연극이나 한 편 보았으면 좋겠다. 하기야 부산에서도 찾아보면 멋진 연극은 많겠지만,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못 보는데, 서울에 갔으니, 연극을 본다는 것도 좀 우습기는 하다.

   내일 저녁은 아무래도 그 연극 한 편 보면 하루가 끝날 것이고, 다음날은 서울 구경이나 하다가 내려와야겠다. 아? 내일은 세 번째 토요휴무일이다.

   갔다오면 이래저래 좀 피곤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야할 곳에 주저하지 않고, 마음 내어 가는 것. 제대로 사는 첫 걸음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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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5-2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를 태우고 내려올 차는 확실히 준비되어 있는 걸까요? ^^; 뭐하고 놀껀지 올라가면서 의논해요~

느티나무 2005-05-2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차가 없다고 봅니다. ^^;; 케이티엑스를 예매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데요

kimji 2005-05-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서 괜찮은 전시를 하고 있는 게 꽤 있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도 있고요. 저도 아직 못 봤습니다만(조만간 서울에 올라가 저도 볼 예정이랍니다), 평이 좋던걸요. 대림미술관에서의 '보드리야르'전도 괜찮을 듯 싶고요. 아, 최순우옛집 탐방은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저 역시도 계획중이지만요-).
예술의 전당, 최순우 옛집은 저도 이번에 서울에 올라가면 할 일 목록에 넣었답니다. 그래서 살짝 님에게도 알려드렸습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자료들은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을 듯 싶고요^^
아무튼, 서울 나들이, 알차고 즐겁게 보내시길 기원할게요. ^>^ 날씨도 좋으라고도 더불어 기원! ^>^

해콩 2005-05-2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 잘 다녀올께요. 샘도 수고... ^^;
 

   전에 근무하던 학교의 학생인 OO이. 직접 수업시간에 가르쳐 본 적은 없었지만, 나랑은 인연이 꽤 있었다. 맨 처음 그 녀석이 입학했을 때, 모두들 OO이, OO이 했었다. 학급 반장으로 공부도 잘 하고, 행동도 반듯해서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했는데, 나도 얼핏 그 이름을 기억해 두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러 온 녀석을 보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네가 OO이야?"

"예? 아, 예!"

"무슨 책인데, 한 번 봐! 우와 제법인 걸?"

"......"

   이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끔은 도서실에서 몇 번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지난 여름에 공부하는 모임에서 주최한 여름캠프에 '안해'가 이 녀석을 데리고 왔다. 마침, 나랑 같은 모임에 들게 되어 우리는 죽이 잘 맞아서 놀았다. 녀석이 리더십을 잘 발휘해 준 덕분에 모둠의 분위기가 아주 좋아져서 함께 한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2학기에는 OO이와 조금 더 친하게 지냈다. 도서실에도 자주 놀러왔으며, 한동안 서재를 꾸미기도 했었다. 그리고 교내 토론대회에도 참여해서 부산시 토론대회에도 함께 나가기도 했다. 이후로도 가끔 도서실에 얼굴을 비추는가 싶더니, OO이가 갑갑한 학교가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다가 어제 OO이가 자퇴를 결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안해로부터 들었다. 이미 부모님께서도 자퇴서류를 챙겨가셨고, 녀석의 결심이 확고해서 몇 분의 선생님들의 충고도 소용없다는 말도 붙였다. 문자를 보내 놓고 조금 있으니 전화를 해 왔다. 검정고시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이미 결심은 확고하게 섰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굉장히 자의식도 강하고, 자기 생각이 뚜렷한 녀석이었다. 녀석과의 대화의 일부!

"OO아, 언제 자퇴서 낼 건데?"

"5월을 넘기고 싶지 않아요."

"자퇴서 내는 날은 뭐 할 거야?"

"글쎄요,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요"

"그래, 그럼 자퇴서를 낼 때는 꼭 오전에 내라"

"왜요?"

"네가 자퇴한 역사적인 날이잖아. 우리 같이 기념해야지. 자퇴서 내고 우리 학교로 놀러 와라. 그럼 내가 점심 사줄게"

"그래도 돼요?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내 마음이 착잡했다. OO이에 관해서 안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OO이가 우리 학교로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무슨 말을 하며 맞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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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5-05-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학년인가요?

느티나무 2005-05-2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고2학년이죠 ^^ 안타까워요~!

▶◀소굼 2005-05-26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그렇군요. 친하게 지내는 동생 둘이..둘다 중학교만 나오고 고등학교는 안가서^^;뭐 둘다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으니까...믿어 보시지요^^

느티나무 2005-06-13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워낙 당차고 든든한 녀석이라 큰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직업이 학교에 물들어 있는 '선생'인지라 이렇게 잔 걱정이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가끔 불러다 밥 사주는 것이겠지요? ㅎㅎ
 

    지난 주말에는 전에 근무하는 학교의 예쁜 고 3 학생들이 놀러 왔다. 이번엔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 2년 전에 아내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이라 안해를 보러 온 셈이었다. 토요일도 자율학습이 있어 6시가 조금 넘어서 온 녀석들은 예상보다 무척 밝았다. 같이 저녁을 먹고, 사진첩도 보고,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참, 놀면 시간이 후다닥 가버렸다.

   저녁 11시. 서둘러 집을 나섰지만 다들 아쉬움이 남는지 아파트 사이의 공간을 한바퀴 걸었다. 역시 여고생들이라 뭐가 그리 좋은지 별 것도 아닌 것에 웃고 떠들고, 시끌벅적했다. 나는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주민들이 신고나 하지 않을지 내심 걱정이 되던데... 녀석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모두들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깊은 밤. 안해와 함께 집을 치우고 나니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일요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다. 이번에 팔십 여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낙동강 하구에 있는 무인도인 '진우도'를 가기로 했다. 나는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진우도 생태기행의 준비팀이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었다. 미리 와 있는 대절 버스에 탄 참가자를 확인하고, 서둘러 배를 타기로 한 약속장소를 갔다. 이번 답사는 선생님들께서 의외로 신청을 많이 하셨다. 평소엔 큰 버스 한 대 정도만 가곤 했는데, 이번에는 80명이라 버스를 두 대나 빌렸다. 특히, 가족 단위로 많이 오셔서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었다.

   보트를 타고 무인도인 진우도로 들어갔다. 해안은 미처 정리가 덜 되어 약간 지저분했지만, 섬의 안쪽은 숲도 꽤 넓고, 무엇보다도 갯벌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이들에게도 역시 갯벌이 인기 최고! 게와 조개 등을 잡아서 관찰하고, 강사로 오신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어서 아이들도 무척 신났고, 어른들도 어린 시절의 한 때로 돌아간 듯 즐거워하셨다.

   다시 섬의 중심부로 들어와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갯벌의 반대편 해안으로 갔는데 완만한 모래사장 덕분에 물놀이를 하는 녀석들도 제법 있었다. 섬에서의 일과는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보트의 속도를 만끽하며 나오다가 단속나온 해양경찰에게 걸렸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정원도 초과한 대다가 구조 장비도 없고, 규정 속도도 어겼다는 것이었다. 해경의 말을 들으면 잘 몰라서 그렇지,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겁을 잔뜩 주었다. 물론, 우리를 배로 실어다 준 그 분이 책임져야 할 사항이지만,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 장소로 돌아왔다. 돌아가시는 선생님들께 잘 가시라고 인사를 드리고, 준비팀은 간단한 뒷풀이를 했다. 역시 몸은 무지하게 피곤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일이 무사히 마무리된 것 같아서, 그러면서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은 행복했다.

   집에 돌아와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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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4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불온한 교사인가?

- 최근 청소년들의 사회적 발언과 우리 사회의 문화지체 현상에 대하여



안준철선생님(순천 효산고) 




   10대 청소년들의 성장과 방황을 그린 영화 ‘그로잉 업(Growing Up)’을 본 것은 기억조차 까마득한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영화 속의 십대 주인공과 같은 또래였든지, 그 시기를 조금 비껴간 대학시절이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그 무렵의 내 눈에 비친 영화 ‘그로잉 업’은 한 마디로 무지하게 야한 영화였다.

   얼마 후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그로잉 업’의 몇 장면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야한 영화를 안방에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한 영화평론가가 그 영화를 십대들의 에너지가 넘치는 ‘건강한 영화’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뇌인지 가슴에서인지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충격과 이해’, 바로 그것이었다. 내 눈에는 야하고 불건전해 보이는 영화를 건강한 영화라고 소개한 영화평론가의 말이 먼저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나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건강하다’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싹튼 것이었다.

   최근 입시문제를 둘러싼 청소년들의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학생들의 두발규제에 관한 문제도 하나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두발규제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청소년단체 관계자들이 교육부총리 집무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머리 에 떠오른 것은 ‘건강하다’라는 단어였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머리나 길게 해달라는 아이들’이 건강하다니, 나는 혹시 불온한 교사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친하게 지내는 동료교사라도 청소년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로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불온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가령, 학교 간부 학생들이 교문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뒤진다든지,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와 호주머니를 뒤지며 생활검열을 하는 것을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얘기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서먹해지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색을 바꾸는 교사들도 있다.

   ‘모든 문화는 불온한 면이 있다’고 말한 시인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다. 오늘날의 민주국가, 즉 모든 공화국은 당시의 사회통념이나 이념적 잣대로 잰다면 인간의 불온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사실 아닌가. 문화의 이런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친한 동료교사라고 해도 대화의 장벽이 생기고 만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학교의 수직적인 명령체계와 비민주적인 관행에는 불끈하여 반발하면서도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에는 철저히 모르쇠하든지, 아니면 괘씸죄로 다스리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교사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인 셈이다.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왜 거리에 청소년들이 보이지 않는지 의아해한다고 한다. 그 시간 대다수 학생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의 과도한 교육열이 그들 눈에는 자연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의 성적(性的)호기심이 불건전하고 위태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희망자 조사를 할 때 나는 학생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거니와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너 왜 멍하니 있는 거야.”
   “저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냐고. 네가 원해서 학교에 남은 거잖아.”
   “아닌데요. 선생님이 강제로 남으라고 해서 남은 건데요.”

   자기 삶을 살고 있지 않는 듯한 이런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우리 교육의 위기가 동기의 위기요, 자발성의 위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런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나라의 백년대계가 심히 염려스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청소년이 주인이다’라고 외치는 그들의 당당하고 건강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꽃다발이라도 한 아름 안겨주고 싶은 나는 정녕 불온한 교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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