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 백 석

오늘 저녁 이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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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1-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무척 좋아하는 구절이예요.. 저리 살아갈 수 있을까?

느티나무 2006-01-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 시인의 시집 중에 이런 제목의 시가 있잖아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며칠 전에 읽으면서 아마도 이 구절에서 제목을 따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는 몰랐는데요, 제가 아이들 앞에서 이 시를 낭독했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몇 번 연습해 봤지요 ^^ 그러니까 이 구절이 확 들어오더라구요. 건강하시죠? 여름 방학 때 누구처럼 어디 절에 들어가 계신 건 아니지요?

해콩 2006-01-2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 에는 인터넷 하기 힘들잖아요오~ 지리산은 좋으신지.. 지금쯤 거기 계시겠죠? 저는 대목이라 가업에 종사하느라 바쁘답니다. 설 잘 쇠시고요.. 복도 많이 많이 지으시고.. 나눠주시고..^^

느티나무 2006-01-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리산 못 갔습니다. 원래는 내일부터 가려고 했는데요... 이번 주 목요일에 있을 독서모임이 제 발목을 잡았어요ㅜㅜ 그래서 낼 간단하게 동네 뒷산 산책이나 가려구 합니다. 효녀 모드로 변신하셨군요 ^^ 복은 못 드릴지 몰라도 밥은 드리죠 ㅎㅎ
 

夕陽

- 백 석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피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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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란시사첩 머리말

 

- 나 해 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시 짓는 친구들과 함께 만든

죽란시사첩이라는 동인지의 머리말을 보면

"모임이 이루어지자 우리는 이렇게 약속하였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가을이 되어 서늘해지면 서지에서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한 해가 저물 무렵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 는 말이 있다.

젠장! 시 쓰는 친구들아

다들 잘 있느냐

가까이 살구꽃도 복숭아꽃도 참외밭도 없어서

이렇게 사느냐

매화 보는 대신에 곗돈을 부어서라도

얼굴 보고 목소리 듣자

죽란시사 혀 차는 듯한 소리

늦가을 비 내리는 창밖에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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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6-01-1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늦은 밤, 내 친구 장OO 에게 전화를 했다. 다른 친구 곽OO이랑 술 한 잔 하는 중이란다. 둘이는 어제 감사를 받고 1년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한 잔 했다고 한다. 장OO이야 자주 붙어다니지만, 애기 아버지가 된 곽OO은 얼굴 본 지 진짜 오래되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맨날 얼굴 보면서, 임용 준비도 같이 했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이 시가 생각났다. 방금 이 시 한 편만 달랑 적어서 대학 동기 세 녀석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 이번 방학에는 꼭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고!
 

나 하나 꽃 피어

 

- 조 동 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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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1-1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이 이 분의 시로군요... 여교사 화장실 문에 붙어있어요. '교보생명'이라는 곳에서 제공해준..ㅋㅋ

작은 에피소드 하나. (지금은 아득하기만 한) 재작년 12월, 부산 시내 대부분의 학교에서 사설모의고사 취소 되는 것 보고.. 제가 베껴서 지부 게시판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제가 지은 '시'인줄 알았다나 뭐래나.. 저는 교보생명이 지은 줄 알았고.. 지금보니.. ㅋㅋ 작가분에게 조금 죄송한.. 개학하면 저 분의 이름을 살짝 써 넣어드려야겠어요.

여행은 즐거우셨죠? 저는 계속.. 유영.. 사실 개헤엄.. 어푸어푸..켁켁..*#^%^&*

느티나무 2006-01-1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 전에 인디고 서원....책에서 봤어요 ^^ 좋아서 옮겨온 것이구요.
여행은, 좋아요.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죠. 꼭 보고 싶은 걸 보는 거, 그래서 마음에 담아 오는 거... 여행은 일상의 변주인 셈이지요. 유영?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인 거니까, 즐겁게 하세요.^^
 

언제 - 2006년 1월 6일-8일

어디 - 전라북도 진안군, 김제군, 완주군 일대

누구 -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있는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선생님


숙소에서 바라본 마이산 (왼쪽이 수마이봉, 오른쪽이 암마이봉)

 




수마이봉의 뒷모습 (코끼리를 닮았다네요.)
 

마이산 탑사의 일월탑(가장 높은 탑)

 




눈 덮힌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국보62호)

 



대둔산 삼선구름다리 앞에서 바라본 정상 부근

 


대둔산의 상징, 삼선구름다리 

 

대둔산 정상에서 바라 본 암봉들

 




두 남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완주의 화암사 우화루(雨花樓)

  

화암사 극락전 앞에서 웃고 있는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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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0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다리 올라가는 길 무서워요 ;;; 덜덜덜
마지막 사진 느낌이 참 좋습니다.

느티나무 2006-01-0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구름다리 올라가다가 누구는 울었대요.. ㅎㅎ 화암사 극락전 앞 마당의 햇볕이 너무 따사로와서... 저긴 겨울에 가도 저렇게 포근하던데요. 행복한 웃음이 절로 나오거든요. 하이드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글샘 2006-01-1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들과 좋은 여행을 하셨군요. 햇살이 참 따스하게 느껴지네요.

느티나무 2006-01-10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함께 공부하고 의논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살아가면서 폐도 끼쳐야 더 정이 든다고 하지요? 이 사람들과 더불어 아름답게 늙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암사 햇볕은 이상하더군요. 늘 한겨울에만 찾게 되는데, 절 마당에만 들어서면 세상을 떠난 고요함과 따뜻한 햇볕이 넘치는 곳이지요. 사실은 저기가 화암사 '개'가 앉는 곳인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동행자들이 앉아 정담을 나누더군요 ^^

글샘 2006-01-1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개집을 침범하셨군요...ㅋㅋ

느티나무 2006-01-1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셈인가요? 아, 잊을 수 없는 일, 화암사 아래의 주차장에 화암사 안내 간판에 누군가가 낙서를 해 놓았더군요. "절개가 죽임", "???" 한 동안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몰라서... 그러다 맘 놓고 한바탕 웃었지요. ^^

글샘 2006-01-12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죽이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