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정리해 두지 않으면 기억이 온통 헝클어 질 정도로 복잡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보면서 오늘 하루를 쟁여두고 싶다. 어떤 일은 아주 기뻤고, 어떤 일은 난감했으나 대체로 행복한 일이 많았다. 오늘 일어난 여러가지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길었던 우리반 소풍 이야기부터 해 본다.
며칠 전부터 소풍 장소를 두고 말이 많았다. 강서체육공원과 해운대 일대를 두고 심사숙고해서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소위 말하는 목소리가 큰 아이들을 중심으로- 강서체육공원으로 가자고 했으나, 편의시설이 아무 것도 없는 공원에 가는게, 마뜩치 않아서 아이들이 차분히 생각할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여학생 반과 같이 가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어느 반과 같이 가면 더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학생들이 간다는 사직운동장, 광안리 미월드, 부산대학교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든 곳은 사직운동장이었다.(작년에 사직운동장에서 가서 신나게 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반도 사직운동장으로 간다고 통보해 버렸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때쯤에 한 녀석이 우리반에서 사직운동장에 가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우리의 의견을 좀 들어달라는 문자를 보냈더랬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에게 문자 내용을 알려 주고, 소풍 장소 선정을 위한 전체 투표를 했다. 그래서 선정된 곳이 강서체육공원! (체육공원 17표, 사직운동장 15표, 해운대 일대 10표) 내심 아쉬웠지만, 장소가 대수랴! 싶었다.
소풍 전 날, 체육대회 때 힘을 많이 쓴 탓으로 분위기는 다시 사직운동장 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에게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며 결국 강서체육공원에 10시 30분에 모여서, 오후 4시에 마치기로 약속했다.
나의 소풍 징크스 같은 게 있는데, 이 날은 아무리 준비를 빨리해도 꼭 시간을 겨우 지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오늘도 어김 없었다. 체육공원에 도착해 보니, 한 서른 명이나 모였을까? 아니, 이 녀석들이 다 어디로 갔지? 설마 아직 안 온 건 아니겠지, 싶었으나, 안 온 녀석이 꽤 많았다. 아마도 체육대회의 후유증인듯 싶었다. 아이들에게 오늘 일정을 이야기했다. [오전엔 모둠별, 종목별 운동하기-농구, 배드민턴, 헬스,인라인, 야구/점심 먹기/오후엔 모둠별 놀이하기] 그러자 슬금슬금 모두 모인 녀석들! 늦게 나타나면서도 나를 보면서 싱글싱글 웃고 만다. (이젠 우리반 녀석들에게 나의 무서움은 사라져버렸나 보다.)
나는 더 늦게 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느라 처음 모인 곳에 있었다.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한적한 체육공원의 분위기를 느끼려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쌀쌀했다. 아이들이 점심 먹을 곳이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되고, 아이들은 어떻게 놀고 있나 싶어서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역시 남학생들은 공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두어도 참 잘 논다.
체육공원 근처에서 밥 먹을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지하의 식당은 직원 전용 식당이라고 했다. 거기서 밥 사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가 냉정히 거절당했다. 이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아이들에게 전날 도시락을 준비해 오라고 했지만, 얼마나 준비를 해 왔을지... 정작 나부터도 어떻게 되겠지, 싶어서 그냥 나섰으니, 아이들은 오죽 하랴 싶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농구장 근처에서 중국집 전화번호를 발견한 것이다. 도시락 싸온 사람, 자장면 먹을 사람, 냉면 먹을 사람, 라면 사 먹을 사람이 사이좋게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다.
오늘 소풍의 하일라이트! 우리반 모둠 놀이 시간이다. 곳곳에서 다른 반은 벌써 마쳤다는데요, 하는 초딩 같은 소리도 나왔지만 나는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리반 마치는 시간은 오후 4시라고 했었는데? 어제, 아이들에게 놀이를 위해 준비물을 챙겨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일단, 농구공은 있고, 7인 8각을 위해 노끈을 준비해 오기로 했던 녀석이 계면쩍게 웃으며 까먹었단다. 다음은 눈 가리개용 수건! 이건 열 다섯 개 정도 있으니 충분했다.
일단 오늘 준비한 게임은 모두 열 가지였다. 전부 모둠별 대항으로 할 수 있는 놀이들이다. 우선 노끈으로 다리를 묶어서 달리기를 하는 7인 8각, 눈 가리고 보물 찾기, 차례대로 농구공을 이어받은 다음 마지막 선수가 슛 성공하기, 어부-고기 잡이 놀이, 여왕벌 닭싸움, 모둠별 종이컵 차기,는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할 수 있는 놀이이고, 야채가게 놀이, 앗싸- 너 놀이, 바니 바니 놀이, 뻔데기 놀이는 머리도 함께 쓰는 놀이이다.
그런데 역시나 남학생들이라 몸으로 하는 놀이를 좋아했다. 몸으로 하는 놀이만 끝내고 나니, 모두들 기운이 빠져서 '정신력으로 버티는 소풍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 말이 어찌나 우습게 들리는지, 전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느덧 시간은 3시 30분! 마지막 놀이는 초시계로 시간 정확하게 맞추기 놀이를 해서, 오늘 놀이의 우승 모둠을 뽑았다. 우승 상품으로는 소풍상품비로 받은 돈을 썼다.
시상이 끝난 다음엔 다시 모둠별로 모여서 정리를 했다. 그리고 우리반 전체가 모이면 항상 외치는 구호, "2학년 4반", "화이팅"을 끝으로 청소를 하며 헤어졌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갈 때쯤 나도 진이 쏙 빠졌다. 공원 의자에 앉아 좀 쉬었다 가려는데, 한 녀석이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음료수를 건네 주었다. 고마워서 냉큼 받았다. 한 20분쯤 그렇게 앉아 쉬었다. 안 그래도 한적한 공원에 아이들마저 돌아가고 나니 주위가 고요했다. 참았던 빗방울이 슬금슬금 내리려고 했다.
올해도 이렇게 소풍날이 지나갔다. 아이들의 마음 속에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오늘 소풍은? 아이들이 소풍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들었으면 참 좋겠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탄 얼굴에 감자를 갈아서 붙여도, 기운이 하나도 없어 멍하게 앉아 있어도, 오늘 하루는 기억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