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이 끝나고 학교에 들른 이유는 삼수생에게 전해 줄 교과서를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좀 구해달라는 걸 지금껏 미루다가- 사실, 학교에 그 흔한 교과서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실제로 그랬다- 어제 교과서 공급소에 전화를 걸어서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갖다 놓기로 했었다.
그러니 오늘 오후에 책을 챙겨두었다가 연극을 보고 나서 집에 돌아갈 때 그 녀석이 공부하고 있는 곳(그 녀석은 우리집 앞에 있는 모 대학의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한다.)을 찾아가기로 했다. 연극을 못 보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보자고. 그랬더니 녀석이 케잌을 하나 샀는데, 자기 공부하는 곳에 두기 뭣하니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 둔다고 한다. (삼수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녀석은 이번이 세 번째 도전이다. 그러니까 그 녀석이 고 3일 때, 일주일에 두 시간씩 국어수업을 맡았던 게 전부인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닿고 있으니 꽤나 인연이 깊은 셈이다. 독서실에서 재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던 게 아마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가 힘들다고 느낄 때는 작은 관심도 참 고마운 법이니까!
재수생이라는 부담 때문에 원하지 않는 학과에 붙어 한 달인가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나와 이번에 다시 삼수생이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따냈다. 자랑할만한 타이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하고 싶다는데야 옆에서 뭐라고 말할 수 있으랴!
현관 옆의 간이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겉은 씩씩해 보여도, 역시 고민이 많고 불안하기도 하다. 농담처럼 인기가 너무 많아 고민이란다.(참고로, 이 녀석은 여자다.) 약간 어의가 없었지만, 그 나이 땐 그런 것도 통하는 법이니까. 아무튼 올해가 끝날 때쯤에는 녀석의 행복한 웃음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을 나오니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틀림 없이 우산은 없을테고? 짐짓 생색을 내며, 우리 집이 코앞이니 나중에 비 오면 우산 하나 가져다 줄까?하고 물었더니, 제일 친한 친구네 집도 바로 정문 앞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씩씩하게 웃는데, 그 웃음에서 이젠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