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새해가 되었는데, 새해의 벅찬 기억이 가물거리는 1월의 중순입니다. 쓴다 쓴다 하면서도 손을 못 대고 있다가 두 달 만에 쓰는, 우리 반 학부모님께 드리는 여덟 번째 편지입니다. 지금까지의 편지는 늘 우리 반 학생들의 손에 들려서 부모님께 전해지곤 했는데[늘 문자 메시지로 안내해 드렸지요?], 이 편지는 아마도 졸업하는 날 녀석들이 받아들 교지에 실려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번 편지가 작년 11월 초였으니까 그동안 꽤 소식이 뜸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긴 시간도 아닌데, 실제 시간보다는 훨씬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 싶습니다. 아무래도 수능시험 때문이겠지요? 오늘은 아른거리는 제 기억을 더듬어 간단하게 우리 반 소식을 전해드리고, 부모님께 몇 가지 당부 말씀도 드리고자 합니다.
1. 수능이후 우리 반은…
11월 16일에는 학생들이 지금껏 준비해 온 수능시험을 봤습니다. 학부모님에 비하면 턱없겠지만, 이 수능시험의 사회적 비중을 잘 아는지라 담임인 저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공부’라는 걸 하면서부터 준비해 온 시험이고, 마치 한 번의 수능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 같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 탓에 심지가 굳지 못한 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여간 조바심이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수능시험에 우리 반 학생들은 인문계 남학생들이 모여서 시험을 보는 부산OO고로 갔었습니다. 혹시나 지각하는 녀석이 있을까 싶어서 시험장 앞에서 기다리는 내내 저도 걱정했는데, 그날은 다행스럽게도 지각생이 없었습니다.(부모님들은 멀어서 더 마음 졸이셨지요?) 시험 결과야 모두 다르기 때문에 굳이 이 자리에서 따로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사흘 동안은 학교에 나왔습니다. 가채점도 해 보고, 대학에 보낼 생활기록부도 확인하려고 했는데, 해방감인지, 허탈함인지…… 긴장이 풀려서 쉽지 않았습니다. 이후부터 삼주 동안은 지역대학 탐방과 입시설명회, 체험활동 기간이었습니다. 지역대학 탐방은 학생들이 다니게 될 대학들을 직접 둘러보고 대학관계자로부터 대학의 발전 방향과 전망을 들어보는 자리였습니다. 입시설명회는 학생들이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데 많은 정보를 주려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체험활동은 입시 공부에만 매달린 아이들에게 우리 지역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는 걸 알리고,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지역의 지리를 익히고, 새로운 경험을 해 보자는 취지로 기획했습니다. 체험활동을 통해서 녀석들 생각의 폭도 한 뼘 더 커졌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돈도 많이 든다는 부모님의 하소연도 살짝 들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등교하면 정상적으로 수업이 이뤄지지 않아서, 1․2학년들이 공부를 하는데 방해도 되고 해서 일반적으로 수능이 끝나면 대부분 대학 탐방과 체험활동 위주로 계획을 짜게 됩니다.
부모님께서는 수능이 끝난 후 갑작스럽게 너무 일찍 들어오는 아들과 보낸 두 달이 어떠셨는지요? 공부할 때는 늘 안쓰럽게 여기시다가, 막상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 녀석들이 부모님 속을 썩이는 일이 더 많아진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수능이 끝나고 우리 반 아이들과 산에 두어 번 다녀왔습니다. 비용도 제법 들고, 거리도 먼 곳이라 희망하는 학생들만 모았더니 열 명 정도가 나서더군요. 두 번 다 산에서 하룻밤을 자는 산행이었는데요. 고생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하면서 아무튼 우리들끼리는 시끌벅적한 산행이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땐 지리산을 훤히 비추고도 남을 만큼 큼직한 보름달이 떴었구요, 두 번째 갔을 땐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답니다. 아이들의 감탄이 쏟아져서 데리고 간 게 보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끓인 맹맹한 김치찌개를 맛나다고 어찌나 잘 먹어주던지 고마웠고, 찬바람 속에서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역시 학교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서 놀랬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꽤 잘 알고 있다는 제 확신이 오해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에 새겼다가 다음에 담임을 맡게 되면 ‘오만’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12월 초순에 수능 점수가 나왔고 정시 지원 학생 상담을 했습니다.[상담한다는 문자 받으셨지요?] 수시 합격자 열여섯 명과 재수를 선택한 두세 명을 빼고 모든 학생들과 두 차례 정도 지원 상담을 했습니다. 학부모님이 직접 오신 경우도 서너 분 정도 되시고, 전화로 저랑 의논하신 경우도 있고, 혼자 온 녀석들도 대부분 부모님들과 의논을 해 왔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보고, 혹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일러주는 정도였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녀석들과 의논했는데, 그 때문에 혹시나 부모님의 심려를 끼쳤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때가 가장 행복하고 또 간절히 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부모님께서 이 글을 읽으실 때쯤이면 녀석들이 어디로든 자기가 서 있게 될 자리가 정해져 있겠지요?
2. 졸업하는 아이들을 바라보실 때…
제가 봐도 아직 어린애 같기만 한 녀석들이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학교를 다닌 지 12년 만에 인생의 큰 고개를 넘습니다. 가팔랐던 고개에 올라선 지금, 앞으로 가야할 길은 모두 다르겠지만, 특별히 다시 험한 길을 택한 녀석들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삶을 길게 보면 그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고, 오히려 지금의 실패를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여겨도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녀석들은 지금은 다 제가 잘 나서 이 자리에 서게 되는 것 같겠지만,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게 되는 데는 부모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날이 곧 오겠지요? 이 철없는 녀석들을 대신해서 담임인 제가 녀석들의 졸업장과 함께 부모님의 공로패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무 살. 부모님 눈으로도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시겠지요?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으실 겁니다. 저는 그래도 이 녀석이 졸업을 하니까, 입학할 때 공부만 열심히 해 준다면, 하고 바라던 간결한 부모님의 걱정이 이제 끝나나 싶은데, 부모님께서는 다시 좋은 직장을 위해서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서 아직 걱정이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걱정은 이해하면서도, 이제는 이 녀석들이 제 앞가림을 스스로 해내는 연습이 필요한 나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서 겪어야 할 많은 시행착오는 아마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소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넉넉한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직 젊으니까 실패도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요즘 취업하는 이십대들의 95%가 비정규직으로, 월급이 88만 원 정도에 그친다고 해서 이십대를 일러 ‘88만원 세대’라고 합니다. 이제 스무 살의 삶도 예전보다 훨씬 팍팍한 게 사실입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마냥 즐길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취업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다그칩니다. 녀석들도 이런 환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이 녀석들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부모님들께서도 이 녀석들을 마냥 응석받이로 키우시지 않으신 것 같고, 우리 학교도 녀석들을 꽉 붙들어 매어 놓고 억눌러서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학생들보다는 훨씬 더 자율성이 높다는 것이 제 믿음의 근거입니다.
부모님의 걱정보다는 훨씬 잘 자라준 녀석들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믿고, 어느 샌가 훌쩍 커버린 자식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녀석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내주시는 부모님이 되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3. 우리 학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우리 반 학부모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OO고’에서 우리 학교로 전근을 와서 이 녀석들이 1학년 때부터 3년 동안 담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왔다는 설렘과 기쁨도 잠시, 우리 학교를 바라보는 그 때의 입학생(지금의 졸업생)과 학부모님들의 시선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느꼈습니다.
당연히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학생들에게 여러 번 물었는데, 그 때마다 ‘소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우리 학생들에게 들었던 우리 학교를 둘러싸고 아주 황당한 소문이 많았습니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이것이 어느 사이엔가 사실인 것처럼 우리 학교 밖에서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부모님들도 마찬가지로 걱정을 많이 하셨겠지요? 소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전학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씀도 공공연히 하시더군요.
그 얘기를 처음 듣던 때로부터 이제 3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우리 학교를 1년 이상 다닌 2,3학년 학생들에게 소문과 실제의 관계를 물어보면 ‘소문대로’ 라고 말할 학생은 거의 없으리라고 봅니다. 속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지금 이 녀석들이 우리 학교를 보는 시선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 학부모님들께서 ‘우리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이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반대로 ‘우리 학교에 보내서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실 분도 많으시다고 확신합니다.
최종적인 결과가 나와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우리 3학년 학생들의 입시 결과도 인근의 다른 학교에 견주어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학교의 교사(校舍)가 좀 낡아서 생활하기에 약간 불편할 뿐이지 다른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학교 시설 문제도 학부모님들의 노력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부디 녀석들이 졸업을 하고 나서도 우리 부모님께서 우리 학교를 비방하는 근거 없는 소문에는 단호히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부모님께서 우리 학교와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보내주셔야, 학교는 학생과 교사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아 고치려고 노력하고, 교직원들은 책임감을 더 느끼고 정성껏 가르치며, 학생들은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우리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변함 없는 후의를 베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마무리
지금껏 ‘이제 마지막’이라며 슬쩍 주제넘은 소리를 여럿 늘어놓은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만 녀석들과 3년 동안 생활하면서 느낀 제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녀석들과 복작거리며 지낸 3년도 좋았지만, 늘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시는 우리 반 학부모님께 학급 소식을 전하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이 편지쓰기 시간도 참 좋았습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우리 학교에서 녀석들과 지내는 게 더욱 행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녀석들이 졸업하는 날, 감사의 인사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뵐 때까지 몸 건강하시고 가정에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8년 1월 22일, 3-4반 담임인 느티나무 드립니다.
[뱀발]
이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편지’가 우리 반 학부모님들이 아닌 분들에게도 공개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의 부담이 많았습니다. 제 못난 글 솜씨는 그만두고서라도, 혹시나 이 편지를 읽으시는 다른 분들에게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사실, 이 편지는 지난 1년 동안 우리 반 학부모님들께 드린 편지들과 이어지는 내용이라 우리 학급에서 일어났던 여러 상황과 지금까지 학부모님께 보여드린 저의 말과 행동, 그에 따른 학생들의 일상적인 반응이 덧붙여져야 그 의미가 온전히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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