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권력과 체제에 대해 조롱으로 한 방 먹이다.
- 느티나무가 본 영화 ‘괴물’ 이야기
1. 잘 만들긴 했지만 ‘오락영화’를 두 번이나 본다는 것은 아주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라고들 한다. 어쩌면 나도 감상문을 써 가야 한다는 숙제와 때마침 생긴 공짜 영화표만 아니었다면 두 번 볼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그 ‘미련하고 멍청한 짓’을 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때론 이런 미련한 짓도 필요하다고! 영화의 줄거리를 뻔히 알고 있을 땐, 조금 더 영화의 세부적인 장면 장면과 대사에 눈과 귀를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 결과적으로 영화의 메시지가 훨씬 풍성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단순히 ‘오락’으로 즐길 것이냐, 꽤나 심각한 메시지를 생각해 볼 것이냐, 아니면 예술적인 감동을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영화를 본 사람의 몫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자기가 본 영화에 대해서 자기 언어로 이야기할 수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흐릿하던 영화에 대한 자기의 생각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점차 명징해 지고, 그것이 다시 영화를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2. 이 영화 ‘괴물’ 재미있게 잘 봤다. 칭찬 일색인 소문보다는 좀 못 했지만, 그래도 잘 만든 영화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내가 보기에 나름대로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담고 있는 이 ‘오락영화’에 관객들이 보내는 폭발적인 호응이 과연 영화 자체의 매력 때문일까,하는 점은 분명히 ‘그렇다’라고 말하기에는 좀 의심스러웠다.(한강이라는 일상적 공간-부산에 사는 내게는 여전히 비현실적인 공간이긴 하지만-에 ‘괴물’의 나타난다는 설정이 괴수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분명 놀라울 발상이었을 테지만, 천 만을 육박하는 관객이 모두 괴수영화 마니아는 아닐 것이니 말이다.)
이 영화는 외부적 요인[평론가들의 호의적 평가와 언론의 관심, 스크린쿼터 문제와 최근의 한국영화의 흥행 부진]에 의해서 이미 관객이 호응할 수밖에 없는 영화로 만들어진 상태다. 그렇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가 본 영화는 나의 영화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로 내가 본 ‘괴물’을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이해하려고 한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83902183230688.jpg)
3. 세 가지 축1 - 괴물의 상징성
단순히 웃고 즐기라고 만든 영화를 자못, 심각하게 상징과 은유의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려고 드는 것은 평론가들의 자리를 뺏으려고 달려드는 무례한 짓으로 여겨지거나, 기껏해야 상황에 맞지 않게 아무 때나 심각해서 놀림 받는 ’진지맨‘으로 오해받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괴물‘이 단순한 오락영화로 보이지 않아서 더 재미있었다.(이 재미를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 정치에 대한 생각도 진지한 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영화로 보지 못 하는 나는 무엇보다도 ‘도대체 괴물이란 어떤 존재인가?’, ‘괴물’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해 보았고, 내 머리로 답을 얻었고, 그것을 내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영화 속에 나타난 괴물의 탄생 배경과 행동, 그리고 괴물의 죽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감독은 괴물을 주한미군의 포르말린 방류로 생긴 돌연변이 생물체로 설정하였고, 이 괴물은 (한강에 살고 있음에도) 사람들(낚시꾼)의 무관심 때문에 점점 몸집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 괴물은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가난한 시민들(대표적으로 철거민 출신으로 공원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강두네 가족, 병원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탈출하기 위해서 ‘빽’을 찾는 장면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 권력의 하부체제(경찰이나 군대)는 ‘괴물’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함과 무능력만을 보여준다. 결국 괴물을 물리치는 사람들은 힘 있는 ‘권력의 체제’가 아니라, 철거민 가족인 강두 네와 이를 돕는 주변인(노숙자)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텔레비전으로 바이러스가 없었다는 미국의 발표로 괴물과 관련된 공포는 완전히 사라진다.
결국 이 ‘괴물’은 미국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고, 미국이 그 괴물에 의한 바이러스의 실체가 없다고 공표한 뒤에서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괴물의 상징성을 거칠게 말해 본다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을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미국’은 영화에서처럼 가난한 시민들을 위협하지만(주한미군의 후안무치한 범죄, 미군기지의 이전과 환경오염, 이라크파병, 북한 핵, FTA 협상 등) 결국 그 괴물을 물리치는 것도 힘없는 시민인 우리중의 일부인 강두 네 가족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두고 평범한 사람들의 반미 감정을 부추기는 ‘반미’영화라고 쏘아붙이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다만 관객은 어떤 생각으로 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주장이 직접적(?)이라서 재미가 적었다고 할까, 아무튼 나에겐 그랬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도끼눈을 부릅뜬 사람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왜 ‘반미’라고 말하면 안 될까?하는 점이다.
4. 세 가지 축2 - 가족주의는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축인 가족주의. 실제로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주제이기도 하고, 관객이나 평론가들도 대체로 이 ‘한국적 가족주의’에 의한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그래픽으로 만든 ‘괴물’을 통해 볼거리만을 내세웠거나, ‘반미’ 같은 정치적 알레고리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지금의 이런 흥행기록은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가족주의의 흥행 가치는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이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먼저, 가장 특이한 점은 왜 ‘현서’에 대해서 그들은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하는 점이다(강두 아버지의 죽음과 비교해 본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가족 중에 누군가가 괴물에 잡혀갔다고 생각해 본다면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의 모습에서 영화엔 좀 특별난 점이 있다. 그것은 가족들에게 현서의 의미가 특별해서 인 것 같다.
‘현서’는 이 가족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 이 가족은 사실 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지만, 그것이 가족을 정서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 내에서 그 역할은 ‘현서’가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장에서 박희봉이 ‘현서’ 네 덕에 우리 가족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가족 모두가 저녁을 먹는 환타지 장면에서도 그렇다. 현서가 괴물에게 갇혀 있는 동안에 보여주는 태도는 어머니의 역할, 바로 그것인 것이다.
콩가루 같았던 이 가족은 현서 때문에 괴물과 맞서서 미친 듯이 싸우게 된다. 그들은 괴물이 어떤 존재인지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자기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가족인) ‘현서’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만 가득하다. 이들에 대해 국가의 권력체제는 오히려 그들의 말을 진정으로 믿어주지 않으며, 붙잡아 가두려고만 하는 것으로 괴물과의 싸움을 방해한다.
결국 우리가 본 바대로 괴물을 물리치는 것은 강두 네 가족이다. 어느 한 사람도 제 몫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온전하지 못난 가족들의 헌신성이 괴물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원동력이다. 아울러 현서가 돌보던 그 소년(이름이 나왔던가?)이 강두와 함께 사는 것으로 그려진 마지막 장면은 소년을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강두와 그의 식구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함이 느껴졌다.(온전한 가족의 따뜻함은 음식을 나눠먹을 때 더욱 분명해 진다. 강두 네가 컵라면을 먹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묘하게 겹치지 않는가?)
5. 세 가지 축3 - 경멸과 조롱으로 권력과 체제에 도전하기
이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과 이를 뒷받침하는 무기력한 체제에 대한 감독의 태도와 시선은 그럼 어떤가? 어떤 한 장면에 금방 공감하고 몰입하려는 순간,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거리를 두게 만들어 버린다. 내가 눈물과 진지함으로 공감하려고 할 때, 웃음과 풍자로 슬쩍 비켜나 버린다. 결과적으로는 대상에 몰입하기 보다는 대상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둔다. 우리는 강두와 일체감을 느껴 일상의 ‘괴물’과 무기력한 체제에 대해서 분노하려다가 멈칫한다. 감독은 우리에게 그 장면을 볼 때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괴물과 체제의 ‘무능력’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한나 아렌트의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 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구라도 괴물 같은 권력과 제대로 싸울 수 있다. 다만, 소시민이 괴물과 그 체제에 저항하는 방식이 물리적인 힘일 수는 없다. ‘괴물’과 무기력한 체제에 대해 싸우는 한 소시민을 통해 말하려는 영화감독의 말하기 방식은 전형적인 경멸과 조롱이다. 강두를 둘러싼 의사와 경찰, 군인에 대한 희화화를 떠올리거나, 강두가 고수부지의 야전병원에서 바이러스 검사를 받는 동안의 미군의 모습(고수부지에서 야외 파티라니?)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다.
괴물과 체제에 대한 ‘경멸’과 풍자에 대한 압권은 바로 맨 마지막 장면에 분명하게 나온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바이러스가 없다는 미국의 발표(이건 이라크전쟁에 대해 미국이 했던 변명과 똑같다.)를 저놈들은 언제나 똑같이 뻔한 거짓말만 한다는 듯이 강두와 그의 새 아들은 재미없다고 말하면서 꺼버린다. 마치 ‘이제 거짓말 좀 그만 하시지~!’하는 것 같다.
6. 영화를 어떤 각도에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괴물의 그래픽만을 즐기든, 반미를 메시지로 삼은 정치적 알레고리의 영화로 보든, 아니면 어떤 시련에도 꿋꿋하게 맞서는 가족애를 그린 영화라고 생각하든 그건 내 몫이다. 그렇지만 한 편의 영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판단한다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영화를 판단하는 자유를 빙자해서, 자신의 무지함과 오만함을 드러내는 모습은 아닐까? 자, 이 영화에 대해 잠시 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당신이라면, 이 영화는 어떤 영화다, 라고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이 영화 ‘괴물’은 어떤 영화인가? 당신의 답을 기다려 본다.
* 영화를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해 보는 건 내가 너무 정치에 경도된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