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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 - 미국 산 육류의 정체와 치명적 위험에 대한 충격 고발서
게일 A 아이스니츠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서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뒤져보았다. 도살장(屠殺場)이란 한자를 풀이한다면 ‘동물을 찢어서 죽이는 마당’이란 뜻이었다. 살(殺)의 의미만 무서운 줄 알았는데, 도(屠)의 의미는 더 무서웠다. 영어로는 slaughterhouse다. slaugher란 푸줏간 주인이란다. 우리로 치자면 백정쯤 되겠다.
이 책은 끝까지 읽기가 힘든 책이다. 책의 내용 곳곳에 넘치는 것이 동물들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피 냄새다. 잘 짜여진 과학다큐멘터리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은 동물의 비참한 죽음과 도살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에 대한 신랄한 고발장이다. 글의 갈래로 치자면 ‘르포르타주’에 속하겠다. 책의 80% 이상이 소와 돼지, 말, 닭을 도살하는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주된 내용이 도살장 노동자들에 대한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글쓴이인 게일 아이스니츠는 여자다.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도살장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동물학대를 고발하기 위해서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갖가지 고생을 겪는다. 나중에는 이 일 때문에 유방암에 걸리기도 한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온몸이 불편했는데, 그것을 직접 겪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글쓴이는 미국 전역의 도살장을 다니면서 도살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젊은 여자가 도살장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도살장은 근무여건이 워낙 나쁘다보니 대부분 미국내 최하층 계급이나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도살장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가정에서 폭력적으로 푸는 경우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마약이나 알콜에 손을 대는 사람도 인터뷰 중에 나온다. 글쓴이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것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80년대에 채광석이 번역해서 나왔던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은 1906년에 발간된 소설이다. <정글>은 시카고 식육공장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이 너무나 실감나고 노동현실은 끔찍하다. <정글>의 반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당시 대통령인 테디 루즈벨트는 정육법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정육공장에는 정부 검사관이 상주하면서 고기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검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20세기 후반에 와서 서서히 역전된다. 이른바 ‘자비로운 도살’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지만, 내용은 더 후퇴해서 검사관이 도축과정을 제대로 검사하고, 문제가 생기면 정지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대폭 후퇴한다. 그 결과로 동물들은 목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껍질을 벗기우거나 삶은 물에 데쳐지기도 한다. 또한 세균에 오염된 고기가 생산되어 소비자들은 소나 돼지가 가지고 있던 병에 걸리게 되기도 한다. O157대장균이나 살모넬라균에 오염된 고기를 먹고 무서운 병에 걸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80년대 들어서 레이건 행정부가 집권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른바 규제완화가 식육공장에도 적용이 된다. 고기에 대한 검사도 모두가 아니라 일부 표본을 추출해서 하게 된다. 이른바 HACCP의 경우에는 검사권한 자체를 식육회사 자체에 맡기는 식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기업에 대한 감시가 약화되는 시대분위기를 따라서 정육공장도 그러한 감시와 규제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과는 오염된 고기의 대규모 유통이다. 작업속도를 빠르게 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다보니 도축하는 시간은 단축되고, 노동자들의 작업강도는 더 세진다. 그 과정에서 온갖 불법행위들이 벌어진다. 글쓴이가 한국어판 머리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의 도살장 실태는 믿을 수 없다. 1997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미국의 도살장은 큰 변화가 없다고 하니까 어떤 미국 쇠고기를 수입하더라도 안심하고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더불어 한국의 도살장 실태는 과연 어떨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