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
표윤명 지음 / 북웨이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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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소설이라?  신화소설은 말 그대로 신화를 기반으로 해서 쓴 소설이다.  그러나 일반 소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등장인물과 이야기의 배경을 신화에서 가져왔을 뿐 스토리는 작가에 의해 새로이 지어지는 소설을 칭하는 것이다.  신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기존의 신화와는 차별되어야 하며 하나의 개성있는 저작물로 존재하기 위해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관건이다.  물론 창작이라는것 그 자체가 상상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말이다.  이 책, 아틀란티스는 국내 최초 신화소설이란다.  이 소설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신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혹은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를 통달한 나머지 새로운 신화에 목마른 독자라면 더더욱) 한 번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다.
 
  에로스가 쏜 황금화살에 맞은 인간 안틸리우스와 님프 안실리오네의 사랑이 발단이 되어 일어나는 전쟁이다.  이 사랑을 시기하는 아폴론, 그리고 세력과 영역을 확장하려는 여러 신들이 만들어낸 전쟁이다.  그런면에서 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기도 하고 신들의 전쟁이기도 하다.  인간들에게나 신들에게나 반역과 배신 그리고 음모가 난무한 싸움들.  이 소설은 에페소스와 사모스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마치 영화 300을 보는 듯 했다.  시종일관 하늘을 찌르는 창하며 앞 발을 치켜들고 포효하는 전마(戰馬)의 모습이 그와 흡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출현 또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아라킬리온이었다.  인간들의 전쟁에 깊게 개입한(신들에게 조종당하는) 전쟁이 살벌해지고 피가 낭자할수록 아라킬리온은 전의(戰意)보다는 전쟁의 의미와 인간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 장면에서 의식이 깨어있는 자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랑이든 싸움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맹목적이 되다보면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것을 잊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라킬리온은 번뜩이는 인간의 이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왜 인간이 신탁을 따라 살아야 하며 그들이 움직이고 일하기 위한 손과 발로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야 말로 이 소설의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게 아닌가 싶다.   "자! 나를 치시오.  내 목을 쳐 당신의 에페소스를 구하고 나의 아폴론의 신탁을 부수란 말이오!(P.248)"  "보시오.  안틸리우스!  이것이 신의 신탁이란 것들이오.  자신들을 위한 일이라면 인간을 어떠한 희생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이었단 말이오.(p.249)"  이는 신들에 대한 반역이자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로를 이탈하려는 고삐풀린 망아지이거나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의 모습이다.  아라킬리온은 에페소스를 차지하게 될 인물이라는 신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도륙의 전장에서 인간들의 자주(自主)를 위해 안틸리우스에게 자신의 목을 베라 청하는 장면은 마치 독립투사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뭉클하기 까지 했다.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신탁을 거스리려던 의지, 자유의지가 처음으로 꿈틀대는 순간, 인간들에게는 화해와 화합의 길이 되고 신들에게는 인간들에게 자주성을 주고 지상을 떠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런 면에서 아라킬리온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대한 임무를 행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끝부분에서의 그의 죽음은 인간을 위해 순교가 아니었을까?  배신과 반역만이 난무했던 그 곳에 의리와 신의의 불꽃을 남기며....
 
  이 소설은 그리스로마 신화가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 때문인지 한국인 작가의 글이었지만 상당히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인간들의 세상에서 신들이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인간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의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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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미스 다이어리 - Goldmiss Diary
크리스틴 B. 휄런 지음, 박지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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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드미스다이어리.  왠지 귀익은 제목이다 했더니 언니가 책 제목을 보고서 알은 척을 한다.  "왠 골드미스다이어리. 하하"  '이 제목이 웃긴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던 나는 언니가 웃은 이유를 잠시 뒤 알게 되었다.  얼마전 TV 에서 '올드미스다이어리' 제목으로 노처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드라마가 있었단다.  TV를 잘 안보는 나로서는 사실 TV 드라마 부문은 완전 무식하다.  골드미스건 올드미스건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는 적시의 책이리라. 
 
  이 책은 '성공한 여자들은 결혼하기 힘들다' 는 편견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즉, "성공한 여자야, 니가 지금 결혼 못했어도 걱정할 필요없어.  저런 말은 사실이 아니야.  어째서 그러하냐면...." 하고 실예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어?  성공한 여자가 결혼하기 힘들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 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음, 그렇다면 '여자는 너무 잘나면 못써' '그저 여자는 남편 내조 잘하는게 최고야'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한 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가?  고개를 끄덕였다면 주로 어르신들을 통해서일게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여자는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어야하며 지나치게 똑똑한 척 해서는 안되며 밖으로 나도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남편 사랑받으며 고만 고만하게 산다는 생각이 아직도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팽배하다.  이 책은 그런 편견들을 용기내어 깨어 보겠다고 주장하며 관련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골드미스인가?'  골드미스에게 던지는 충고와 조언이 내게도 해당이 되는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골드미스' 는 성공한 여자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란다.  또 '스완족' 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럼 성공한 여자는 어떤 여자지?  '나는 성공한 여잘까?'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늠하는 잣대가 무엇일까?  음....  번듯한 전문직 여성에다 고수입에 사회적으로도 권위가 있으며 프로의식이 있는 여자?  책 속에서 말하는 '성공한 여자' 라는 말은 다소 무리가 있으며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 아닐까?  인생의 어느 순간이나 찰나를 정점으로 잡아 그 때를 잘 살고 있다고 하여 '성공' 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게 아닐까?  '성공' 이라는 자체는 지극히 가변성을 담고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보자.  소위 말해, 지금 잘 나가다가도 내일 무너질 수 있는 것이고 지금 암담하다가도 내일 팔자를 펼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인데 '성공한' 이라는 과거에서 지금 현재까지만 내포하는 표현은 정확하지 못한 것 같다.  차라리 '성공한 여자' 보다는 '능력있는 여자' 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고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라는 말처럼 남녀관계 혹은 배우자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로스쿨에 석박사 출신들은 또 그와 엇비슷한 사람들과 해외 유학파들은 또 그들끼리, 대기업 자제는 또 그들끼리, 그렇게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결혼이 늦어지는 미혼 여성들에게 "넌 성공한 여자니 성공한 남자를 만날꺼야.  너무 걱정마" 이렇게 토닥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난 성공한 여자인가?' 이다.  사실 나는 스스로 성공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성공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는 예라고 하겠지만 성공한 사람입니까? 라는 말에는 글쎄, 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점에서 나는 '성공' 이라는 모호한 단어가 썩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소위 성공한 여자들이 자신의 윤택하고 만족스런 삶을 위해 자녀나 육아 또 출산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건강한 생식기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양으로 자녀를 들일 수도 있다는 대목에서는 반감이 들었다.  그네들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바르고 착하게 잘 자라는 자녀도 개개인으로 보자면 하나의 성공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오로지 벌이가 되는 사업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며 상위권에 자리매김을 하는 것만 지향하는 것 같아 못마땅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이 책은 "성공한 여자야.  출산 걱정은 하지마.  통계로 보자면 성공한 여자일수록 출산률이 낮아.  넌 성공한 여자잖아.  그러니 뭐 안 낳아도 큰 문제 안돼" 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은 일에서 성공했으나 사랑에서는 부진한 그녀들을 위로하고자 만들어진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조바심 내던 마음을 잠시 늦추며 조금 느긋하게 결혼이나 사랑 문제를 생각하게끔 한다.  그러나 자칫 그녀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이 '아, 성공한 여자의 삶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며 결혼과 출산에 등한시하게 될 미혼여성들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이 책 골드미스다이어리.  굳이 골드미스라고 부르며 단순한 올드미스와는 격이 다른 성공한 여자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러나 저러나 늘그막한 미혼여자다.  다시 말해, 노처녀다.  ㅡㅡ;;;  더 적절하고 노골적인 제목을 취해보자면 '노처녀를 위한 지침서' 쯤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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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진주
이시다 이라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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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로맨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쎄 내 삶에서 일어나는 로맨스라면 모를까 사랑을 말하는 소설, 수기, 영화, TV드라마에는 먼저 손을 뻗는 일이 좀처럼 없다.  아무튼 나는 이 로맨스라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석연치 못한 구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시다 이라'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본 일본 작가다.  이 책을 선택하며 처음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혹자는 '처음이시면 조금 선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고 살포시 경고의 메세지를 띄워주었다.  선정적이라 한들 구태여 피해야 할 나이는 아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자면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원제를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깊은 상실감에 빠진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순진무구한(?) 십대소녀였으니 그런 성인들만의 살벌한 영역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어딜가도 그 작품은 호평을 받는 듯 했다.  그런 거대한 하루키 무리들 앞에서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가 그리 칭찬해 줄 만하다는 겁니까?  저는 그저 성욕에 호소하는 더러운 삼류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어린 나는 그들에게 식견없는 자로 보이는게 두려워 입을 닫았더랬었다.  한간에는 평론가 유종호씨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음담패설집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며 시원하게 혹평을 한 바 있다.  그 기사를 읽는 내내 반가운 마음이 그리 들 수가 없었다.  아무튼 하루키와 나의 이런 첫 만남부터가 삐걱였던 탓에 나는 그 이후로도 아직까지 하루키를 반기지 않는다.  어쩌면 내 마음 한 켠에서 여전히 푸대접을 받고 있는 그를 대할 자신이 없는 것일지도.  아무튼 그 선정적이라는 것이 부디 외설의 다른 이름이 아니기를 바랬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받기 전 나는 이 책의 작가가 여자이리라 짐작했다.  책의 표제가 주는 느낌 그리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에서도.  책을 받아들고서야 그가 남자인 줄 알았지만.  그리고 책는 동안도 여자라고 생각되기까지 했다.  '섬세한 손끝으로 새긴 러브 어페어' 라는 카피처럼 그의 글에서는 섬세한 표현과 푸른빛이 도는 문장들에서는 예술가적 감성이 느껴졌다.  물론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판화가, 아마추어 영화감독이라는 것이 이런 묘연한 분위기를 자아낸 것일지도. 
 
  물론 '선정적일 것' 이라는 경고는 적절했다.  이 경고는 나를 무장하는데 큰 효력을 발휘했을까?  역시 선정적이다는 말로 표현됨직한 장면들 앞에서도 의외로 초연한 자세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선정적이다고 해서 무조건 지탄하는 편은 아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감에 있어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묘사라면 적극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아류작이라 불리울 수 밖에 없는 것들은 이것에 치중한 나머지 스토리는 온데 간데없고 만나기만 하면 몸을 섞고 침대가 들썩이는 난리 요동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를 넣는다.  이 쯤되면 친절하게도 독자가 분출해 버린 욕망의 찌꺼기들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 준다.  그러나 분명 <잠들지 않는 진주>에서의 적나라한 표현들은 전자쪽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왜 그런 것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지금 내가 더 하고픈 이야기들을 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역시 다소 격한 그들의 육체적 사랑에서는 역시 일본다운 냄새가 물씬 났다.  어쩌면 많은 문화컨텐츠들이 일본을 오해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시절 가장 많이 본다는 영상, 일본판 야동에 길들어져서 일까.  여하튼 기발하고 창의적인 일본인들은 침대위에서도 참으로 난해한 기발한 행위들을 즐기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사요코에게 많은 공감이 갔다.  나도 여자여서 일까?  늙어버린 여자이지만 여전히 여자인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열 입곱살 차이의 연하 남자와의 로맨스라면 누구나에게 '주책스런 할망구' 정도로 비춰질 것이다.  사실 이런 시각이 일반적일 터이지만 그녀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안에 '사랑' 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착각을 한다.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는 누군가를 사랑할 나이는 지났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이 땅에 생존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는게 아닐까?  오히려 '사랑은 더 이상 그들에게 없어' 라고 치부함으로 그들안에 분명이 존재하고 있는 그 사랑을 못 본채 하려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미 늙어버린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쯤으로 여기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나는 이야기를 다 읽고 책 제목에 감탄했다.  '잠들지 않는 진주'는 바로 쉬지 않는 사랑이다.  젊은 모토키와 노아에게는 어울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늙어가는 여자 사요코와 다쿠지에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 광기어린 집착이 되어버리는 아유미 중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 다쿠지가 과연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그가 가진 모든 것들(여자들이지 뭐.)에게 스스로 버려지고 나서는 사요코에 대한 진정한 안위와 사랑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사랑은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무한히 꿈틀대고 있는 그 감정을 단지 우리는 '이제는 그럴 때가 지났지' 라고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하나의 육신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우리 가슴안의 사랑은 여전히 깨어있다.  오색빛깔을 밖으로 뿜어내는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은은한 광채가 안으로 맴도는 고즈넉한 빛깔의 진주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또 무시해서는 안되는) 광채의 그 무언가가 우리 가슴안에 존재하고 있다.  한 시도 잠들지 않는 진주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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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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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과의 첫만남은 수 해전 주말, J와의 약속날이었다.  약속장소는 서점.  서점에 볼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서점 로비가 넓고 또 냉방으로 시원하기도 하고 그리고 책들도 한 번 둘러 볼 수 있어서 나에게는 일석삼조는 족히 될 만한 약속장소이다.  그러다가 눈에 띄 이 책.  '이제 막 청춘의 꽃가지를 교단에 올려놓는 모든 풋내기 교사들에게....(이하생략)' 책 뒷면에 적혀있던 소갯글에 냉큼 이 책을 집어들었다.  우리는 '이제 막' 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는 여전히 터지지 않은 봉오리를 간직한 신참내기 교사였으니까. 
 
  이 책은 J에게 주었다.  그런데 J가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읽지 않았나보다.  가끔 나는 책을 선물하며 아주 작은 포스트잇에 "XX야, 이 책 어떠니?  이 부분 읽을즈음엔 내 생각도 한 번 해주고....  쭈욱~ 열심히 읽어~" 뭐 이런 따위의 메모를 붙이곤 한다.  그러면 책을 선물하고 얼마지 않아 "책 너무 좋다, 야" 라던가 "요즘 뭐하니?" 하며 문자나 전화가 오기 마련이다.  어떤 책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연락이 오기도 하고, 더러 아무 연락이 없기도 하다.  이런 장난질(?)은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끔 스케치북에 "사랑하는 XX야, 여기 그림을 그리려고 펼쳤겠지?  그림 그리기 전에 선생님께 와서 뽀뽀 한 방 날려줘" 이런 알콩달콩한 메모들을 적어둔다.  그리고 내게 달려와 느닷없이(?) "선생님 사랑해요" 하며 뽀뽀를 쪽 해주기도 한다.
 
  (가끔 나는 지나친 한담을 늘어놓는게 문제다.)  그러면 책 이야기를 해보자.  이 책은 '빈센토' '성탄절의 아이' '종달새' '드미트리오프' '집 보는 아이' '찬물 속의 송어' 이렇게 6편의 중단편집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있는 곳, 교실 공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풍경을 자아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을 펼치며 가장 처음 만난 '빈센토' 에는 완전 100% 공감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작가가 필시 교사시절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끝 부분 작가과 작품 소개를 보니 역시 그랬다.  '빈센토'는 아이들의 첫 등원을 그린 책인데 입학식이 있는 3월 한 달간의 교실 모습이 꼭 이러하다.  우는 아이들,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아이들, 경기하듯 드러눕는 아이들.  7세반은 덜하지만 5세반은 그야말로 여기 저기 곡(哭)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과 일과를 마치고 나면 교무실에서 의례 하는 이야기가 '아, 누가 보면 우리가 애들을 잡아먹는 줄 알꺼야' 하며 한 숨을 내쉰다.  이 '빈센토'는 그런 첫등원의 풍경이 얼마나 잘 살아있었는지. 
 
  그리고 두 번째 '성탄절의 아이' 역시 우리 아이들 그리고 내 교실의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속처럼 교사와 아이들간의 물질적인 교류가 많지는 않다.  이를테면, 학부모님의 선물같은 것은 대개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무어든 주고 싶어 한다.  이걸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솔직한지 알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이걸 주면 날 더 좋아하겠지?' 하는 배후의 계산이 전혀 깔려있지 않은 솔직한 감정이다.  그런 아이들이 가져오는 것이 편지, 색종이로 접은 것, 그림, 스티커, 학종이 같은 것들이지만 말이다.  '성탄절의 아이' 역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선생님께 무언가 주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었다.
 
  세번째 '종달새'는 지금의 우리 반 아이와 참 닮았다.  이 아이 역시 정말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하는 아이인데 가끔 교실에서 노래를 할 때면 정말 소름이 돋으면서 머리칼을 쭈뼛하게 만드는 아이다.  '종달새' 역시 노래를 잘 하는 아이의 모습을 담았다.  아이들의 노랫소리란 해맑기 그지 없다.  피아노를 치는 나는 슬쩍슬쩍 눈물을 흘리는 졸업식 노래마져 그들의 입에서는 경쾌하고 밝기만 하다.  "얘들아~ 감정을 담아서~" 해보면 아이들은 목소리만 작아질 뿐 슬픈 곡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노라면 동요는 희망차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한없이 즐거워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네번째 '드미트리오프'는 아이의 부모가 촛점이다.  교사를 곤혹스럽게 하는 학부모들.  그 분들에게는 교사란 그저 반나절 내 아이를 잘 봐주는 사람 정도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다.  메모나 전화나 편지나 면담의 과정은 필요치도 않은 듯 다이렉트콜을 날린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원장실 더 나아가 교육청의 수화기에는 담임교사에게 불만이 넘쳐나는 그들의 볼멘소리로 귀가 따갑다.  물론 원성을 쏟아놓는 그들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는 친절과 사랑으로, 학부모들에게도 이 못지 않은 정성을 쏟아주어야 하고 '내가 당신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는 느낌을 가슴판에 아로새겨주면 어떤 문제도 문제 삼지 않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아이들과 학부모를(또 교장, 원장을 ^^) 동시에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드미트리오프' 에서는 이미 교사들에게는 피해가고픈 대상이 되어버린 이런 학부모에게 지레 겁내지 않고 그 아이의 장점을 발견해주고 용기있게 나아가는 교사의 모습도 담고 있다.  그래, 학부모님이나 아이들이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사랑' 이다.  그것일 뿐이다.
 
  다섯번째, '집보는 아이' 는 몇 해전이 떠올랐다.  우리 반에는 해마다 고아원에서 오는 아이들이 서넛 있었다.  시설에 보호중인 7세 유아들에게는 유치원 교육비가 전액 무상이다.  7세반 담임인 나는 버려졌거나 부모가 없거나 혹은 부모가 보호하고 있지 못한 아이들을 많이 맡아왔다.  '집보는 아이'는 내가 맡아온 아이들처럼 고아는 아니지만 가정 형편이 몹시 어려워 학교를 더 다니지 못하고 집을 보아야 하는 딱한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교사라면 그들을 정말 품어주어야 하고 부모의 따뜻한 가슴을 나눠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우리 반 아이가 한 가슴 아픈 이야기에 나는 울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전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엄마가 없더라고요.  아빠가 엄마는 집나간거래요.  근데 백밤을 자도 아빠는 일어나니까 계속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라는 말에 나는 정말 울고 말았다.  그러나 결손가정의 아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아서는 안되지만 역시 적지않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건 사실이다.  과격하고 폭력적이거나 거짓말이나 도벽을 보일 확률이 높다.  이 말에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것은 물론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조금 높은 확률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 번은 교실에서 자지러지는듯한 울음소리가 나서 그 곳으로 가보았더니 바늘로 아이를 마구 찌르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그 바늘은 교실 환경판에서 빼낸 시침핀.  그 아이를 호되게 야단쳤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면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이라 안스럽기 그지 없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는 그 어떤 졸업생보다 인사를 잘 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교사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을 넘을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 사랑을 흉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찬물 속의 송어'는 젊은 여교사에게 연정을 품게 되는 한 어린 소년이 등장한다.  첫사랑을 말하라면(짝사랑도 첫사랑이 된다는 전제하에) 학창시절 선생님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런 기억이 있고. ^^  여교사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떠나는 기차를 자전거로 쫓아오며 그 무릎위에 들꽃으로 묶어만든 꽃다발을 던져주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젊은 시절 피끓는 연인에 대한 사랑에 비할 수야 있겠냐만은 사제지간의 사랑은 항상 포근하고 따사로운 것인가 보다.
 
  교사는 한 없는 기쁨과 설레임을 가져다 주는 이들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해야 할 것이며 그 만큼의 사랑으로 화답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유난히 까만 빛의 눈동자 아이들에게 '솔직한 사랑'을 이토록 누리는 직업이 몇이나 되겠는가?  책을 덮으며 아이들 앞에서 허둥대던 초년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금은 그들의 사랑에 안일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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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어록 - 체 게바라 서거 40주년 기념작
체 게바라 지음, 김형수 옮김 / 시학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체 게바라.  나는 그를 혁명가로 기억할 뿐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체 게바라에게 관심을 갖게 된 그 시작은 참으로 엉뚱하다.  내게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한 장 있는데 그 티셔츠가 어찌 내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티셔츠에 새겨진 그 사내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그는 '체 게바라' 라는 인물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가.  나는 그를 그 쯤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전 헌책방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질러두고 읽을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체 게바라 서거 40주년 기념작이라는 <체 게바라 어록> 을 발견했다.  <체 게바라 평전>을 먼저 읽을 것이냐 <체 게바라 어록> 을 먼저 읽을것이냐 잠시 고민했지만 <체 게바라 어록>을 먼저 읽기로 하였다.  언어라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를 비추어주는 거울이기도 하며 내면과 밖을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 보다는 그가 남긴 말을 먼저 맛보기로 했다.

  의지에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별이 새겨진 검은 베레모, 굵은 시가를 손에 낀 채 사색중이 모습(그는 금연이 필요한 천식환자였다고 한다), 전장에서 웃통을 벗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책의 시작은 몇 장의 그의 흑백 사진으로 시작했다. 

  그의 글을 통해서 혁명과 민중 그리고 동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 아르헨티나 국적의 한 사나이가 쿠바 혁명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이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한단다.  이럴 때 우리는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전국구구나' '노는 물이 다르구나' 의과대학 출신의 혁명가.  그러나 그는 의사보다는 혁명가를 택했다.  그가 의사를 택했다면 누구보다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 굳이 더 힘들고 고단해 보이는 일로 그를 불러낸 것은 어쩌면 운명이 짊어지운 혁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이었다.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낡고 헐어버린 것을 바꾸어 내려는 욕심!

  그에게 또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는 많은 문학을 탐독하던 자라는 사실이다.  그의 행동은 바로 그의 그런 고결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와 함께 했던 부대 내 한 의사는 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독서광이었던 그는 우리가 피곤에 지쳐 잠에 곯아떨어진 시간에도 언제나 책을 펼쳐들고 있곤 했다'

  그리고 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아버지가 코끼리만한 키스를 보낸다' 라는 말이 있는데 얼마나 아이의 입장을 잘 표현한 사랑 고백인지....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끝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의 어록 중 하나로 어설픈 서평의 마침표를 찍어야 겠다.


"진정한 지도자란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도록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따라 잡도록 고무해주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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