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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진주
이시다 이라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로맨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쎄 내 삶에서 일어나는 로맨스라면 모를까 사랑을 말하는 소설, 수기, 영화, TV드라마에는 먼저 손을 뻗는 일이 좀처럼 없다. 아무튼 나는 이 로맨스라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석연치 못한 구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시다 이라'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본 일본 작가다. 이 책을 선택하며 처음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혹자는 '처음이시면 조금 선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고 살포시 경고의 메세지를 띄워주었다. 선정적이라 한들 구태여 피해야 할 나이는 아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자면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원제를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깊은 상실감에 빠진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순진무구한(?) 십대소녀였으니 그런 성인들만의 살벌한 영역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어딜가도 그 작품은 호평을 받는 듯 했다. 그런 거대한 하루키 무리들 앞에서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가 그리 칭찬해 줄 만하다는 겁니까? 저는 그저 성욕에 호소하는 더러운 삼류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어린 나는 그들에게 식견없는 자로 보이는게 두려워 입을 닫았더랬었다. 한간에는 평론가 유종호씨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음담패설집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며 시원하게 혹평을 한 바 있다. 그 기사를 읽는 내내 반가운 마음이 그리 들 수가 없었다. 아무튼 하루키와 나의 이런 첫 만남부터가 삐걱였던 탓에 나는 그 이후로도 아직까지 하루키를 반기지 않는다. 어쩌면 내 마음 한 켠에서 여전히 푸대접을 받고 있는 그를 대할 자신이 없는 것일지도. 아무튼 그 선정적이라는 것이 부디 외설의 다른 이름이 아니기를 바랬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받기 전 나는 이 책의 작가가 여자이리라 짐작했다. 책의 표제가 주는 느낌 그리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에서도. 책을 받아들고서야 그가 남자인 줄 알았지만. 그리고 책는 동안도 여자라고 생각되기까지 했다. '섬세한 손끝으로 새긴 러브 어페어' 라는 카피처럼 그의 글에서는 섬세한 표현과 푸른빛이 도는 문장들에서는 예술가적 감성이 느껴졌다. 물론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판화가, 아마추어 영화감독이라는 것이 이런 묘연한 분위기를 자아낸 것일지도.
물론 '선정적일 것' 이라는 경고는 적절했다. 이 경고는 나를 무장하는데 큰 효력을 발휘했을까? 역시 선정적이다는 말로 표현됨직한 장면들 앞에서도 의외로 초연한 자세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선정적이다고 해서 무조건 지탄하는 편은 아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감에 있어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묘사라면 적극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아류작이라 불리울 수 밖에 없는 것들은 이것에 치중한 나머지 스토리는 온데 간데없고 만나기만 하면 몸을 섞고 침대가 들썩이는 난리 요동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를 넣는다. 이 쯤되면 친절하게도 독자가 분출해 버린 욕망의 찌꺼기들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해 준다. 그러나 분명 <잠들지 않는 진주>에서의 적나라한 표현들은 전자쪽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왜 그런 것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지금 내가 더 하고픈 이야기들을 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역시 다소 격한 그들의 육체적 사랑에서는 역시 일본다운 냄새가 물씬 났다. 어쩌면 많은 문화컨텐츠들이 일본을 오해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시절 가장 많이 본다는 영상, 일본판 야동에 길들어져서 일까. 여하튼 기발하고 창의적인 일본인들은 침대위에서도 참으로 난해한 기발한 행위들을 즐기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사요코에게 많은 공감이 갔다. 나도 여자여서 일까? 늙어버린 여자이지만 여전히 여자인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열 입곱살 차이의 연하 남자와의 로맨스라면 누구나에게 '주책스런 할망구' 정도로 비춰질 것이다. 사실 이런 시각이 일반적일 터이지만 그녀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안에 '사랑' 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착각을 한다.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는 누군가를 사랑할 나이는 지났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이 땅에 생존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는게 아닐까? 오히려 '사랑은 더 이상 그들에게 없어' 라고 치부함으로 그들안에 분명이 존재하고 있는 그 사랑을 못 본채 하려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미 늙어버린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쯤으로 여기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나는 이야기를 다 읽고 책 제목에 감탄했다. '잠들지 않는 진주'는 바로 쉬지 않는 사랑이다. 젊은 모토키와 노아에게는 어울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늙어가는 여자 사요코와 다쿠지에게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 광기어린 집착이 되어버리는 아유미 중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 다쿠지가 과연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그가 가진 모든 것들(여자들이지 뭐.)에게 스스로 버려지고 나서는 사요코에 대한 진정한 안위와 사랑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사랑은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무한히 꿈틀대고 있는 그 감정을 단지 우리는 '이제는 그럴 때가 지났지' 라고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한 하나의 육신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우리 가슴안의 사랑은 여전히 깨어있다. 오색빛깔을 밖으로 뿜어내는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은은한 광채가 안으로 맴도는 고즈넉한 빛깔의 진주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또 무시해서는 안되는) 광채의 그 무언가가 우리 가슴안에 존재하고 있다. 한 시도 잠들지 않는 진주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