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멋대로 행복하라 - 꿈꾸는 사람들의 도시 뉴욕
박준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나에게는 '뉴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분주함이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금융시장으로 경제를 거머지고 있는 월스트르트도.  너무 현실적이고 삭막한 대답인가?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내가 뉴욕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물론 지금도 많이 안다고는 할 수 없다.  ^^

  이 책은 표지부터가 뉴욕스타일이다.  뉴욕스타일이 무엇인지는 천천히 이야기하고....  이 책은 겉장부터가 실용성을 겸비한 기발한 표지다.  어째서 그러냐고?  아래 위로 띠지같이 둘러진 것이 있는데 그걸 벗기면 한 장의 뉴욕시 지도가 펼쳐지게 된다.  어찌보면 별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별로 어려운 방법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신선했다.   
 
  뉴욕이라는 도시.  내게는 한 손에는 햄버거, 또 한 손에는 take out 컵.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무표정, 빠른걸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 내가 알고 있는 뉴욕의 모습이 얼마나 단편적인 모습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처음으로 뉴욕이라는 도시에 무한히 잠재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모두 충격에 가까우리만치 놀랍고 기발한 것들이었다.  특히 P.S.1 이라는 미술관은 정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두 같기를, 일반적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작품들.  아니 어쩐지 작품이라고 부르기에는 석연찮은 것들도 많았다.  전깃줄에 걸린 운동화들, 길바닥에 새겨진 이러저러한 낙서들.  이 책을 보기 전 그런 것들은 그저 누군가의 장난 이상일 수 없었던 내게 정크아트, 그래피티들이 뉴요커들마냥 자유로운 그 곳.  너무 매력적이었다.  아, 책의 출발이 아주 좋았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바로 달려가고 싶었고 뉴요커들의 예술성에 동참하고픈 생각이 일었다.
 
  책을 더 넘기자 뉴욕 안에 다양한 뉴욕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카센터와 갤러리가 공존하는 첼시, 가장 힙한 동네라는 미드패킹지역까지.  아, 이렇게 쿨할수가.  (사실 나는 이국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는지도 몰라.)  그리고는 삶과 뉴욕을 사랑하는 개성있는 뉴요커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었다.  뉴요커들이 하나같은 목소리.  'I ♥ New York' 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빌어 만난 뉴욕은 렌트비가 비싸고 경쟁이 치열하며 개인주의적이며 다양한 인종과 언어들, 세계 곳곳의 요리를 맛볼 수 있으며 모두의 고향이 될 수 있는 넘버원시티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이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당당해 보이고 꿈을 가진 듯 하고 열정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심장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느낌.  과연 그들은 꿈 하나를 쫓아 뉴욕행을 결심한 것일까?  오롯이 그 이유로 인해서?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어찌보면 도피자이기도 하다.  뉴욕 이전에 살던 도시에서의 획일적이고 일반적인 것들로 부터 또한 타인들과의 이질감에서 그곳으로 도망한 것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고 싶었기에 오히려 그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저자는 그들, 뉴요커만은 진정 자유로우며 의욕이 넘치고 꿈을 쫓는 인생을 사는 마냥 묘사하고 있다.  분명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터.  그들은 이해받고자 했던 사람들이고 외로 그런 면에서 브라이언 밀러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뉴욕의 솔직한 모습과 뉴요커의 에너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면....  미국인들에게 자국 우월주의가 있듯 뉴요커들에게는 뉴욕우월주의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뉴욕을 한 나라라고 보자면 이 책은 지극히 국수주의적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들의 인터뷰 내용에서 뉴욕과 뉴요커들은 세계 어느 도시의 그들과는 다르며 월등한 사고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꼭 그렇게 단정지을 일만은 아닌 듯 싶은데 말이다.  물론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그들의(어쩌면 저자의) 뉴욕 사랑은 다소 극단적이고 편협해 보이기까지 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이 책은 전면 올컬러다.  그래서 좀 두툼한 잡지 한 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감각적이고 세련된 페이지 구성과 박준씨의 멋진 사진들, 그리고 그의 자연스러운 글은 뉴욕의 분위기를 잘 담아낸 듯 했다.  세계 어느 나라로건 여행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간 뉴욕은 내게 여행지로 꼽힐만큼 매력적이진 못했다.  그런데 이 책 한 권에 내 생각은 달라지고 말았다.  뉴욕, 그 곳에 있어라!!  내 언젠가는 그 곳을 밟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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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안의 알약
슈테피 폰 볼프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릴리안의 알약.  주인공 릴리안으로 생각되는 한 소녀,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알약.  그리고 뒤편에는 그림자처럼 표현된 사람의 실루엣.  일러스트로 된 표지라 상큼하고 발랄해 보였다.  이 책의 뒷편에는 '역사가 이렇게 우스워도 되는 것일까?', '요절복통 역사 코미디' 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중에나 읽고난 후에도 웃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요절복통이라는 말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런지.
 
  최근에 읽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도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물론 이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이지만 역시 '중세' 라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이를테면, 죄인에게 죄를 묻고 자백하도록 종용한 후 대개가 사형에 처해지는데 무죄로 밝혀지는 경우는 죄를 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방법의 하나가 끓는 물에 손을 넣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무죄란다.  그런 손을 가진 자야 말로 우리 상식에서는 마녀가 아닐런지.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의 왠지 모를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느낌.  그런 시대에 산 사람들이라면 신비주의에 빠지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어딘가에 마녀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ㅎ할런지도.
 
  역시 우리가 살지 못한 시대를 엿본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이 책은 분명 제 역할을 감당했다.  중세에 대한 재미난(?) 많은 사실들을 담고 있었다.  영주의 초야권이라고??  기가 찰 노릇이다.  또한 자신의 신부를 다른 남자와의 첫날밤에 허락해야 하는 신랑들은 어떠했을까?  여러가지 잔인한 사형방법들도 참 놀라웠다.  그걸 보면 사람을 죽이는 일에 꽤나 재미를 붙인 누군가의 연구작품인 듯 싶기도 했다.
 
  릴리안과 체칠리에가 만든 마법의(?) 알약.  그런데 그것이 그때에 왜 필요했을까?  물론 원하지 않는 많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임신을 예방해주는 알약을, 목숨까지 내놓아가며 연구했어야 할만큼 그렇게나 간절했을까?  오히려 색을 밝히는 발레리아라는 인물을 통해 그 약은 여성들에게 부담없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약인 마냥 묘사된 듯 싶었다.  물론 그 약을 개발한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그 약이 여자 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각광받는 약임에 틀림없을테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이야기 전개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형리 베르트람의 손을 통해(물론 그도 하수인이었고 그럴 생각이 없는 형리였지만) 죄없는 무모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다 갑자기 릴리안과 체칠리에의 알약연구 개발로 전환되었다.  형리의 죄책감과 그에 대한 부담과 불안 그리고 피임약의 연구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선긋기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차라리, 어리석게 자행되는 사형제도에 못마땅한 릴리안과 체칠리의 마취약 개발이라면 더 재미있었을지도.  둘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형수들을 위한 마취약을 만들고 그것을 베르트람에게 건네주고 그는 그것을 사형집행전에 몰래 사형수에게 먹이다 발각이 되는 것이다.  약의 출처가 궁금한 교회와 영주들은 약의 제조자를 쫓게되고 그런 과정에서 도피하며 생기는 일에 이 마취약.  그리고 그것이 후에 있는 라우렌티우스의 병에도 쓰여진다.  뭐 이런.....  쩝.  나는 가끔 이야기가 매끄럽지 못한 것을 보면 내가 작가가 되어 다시 써버리는 부질없는 짓을 하기도 한다.  음, 그렇지 않았다면 피임약 개발에 몰두해야 할만큼 빈번한 출산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이나 그들의 가정에 대한 묘사가 충분했어야 했다.  그리고 베르트람과 릴리안의 해피엔딩을 바랬던 것은 나의 순애보적 소녀취향이었던 것일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춘향이는 반드시 이도령과 맺어져야만 하듯 나는 이 둘이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랬다.  후훗. 
 
  그리고 재미난 부분은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익살맞은 개성을 갖고 있다.  사형집행을 두려워하는 형리, 여러가지 공포증에 걸려있는 라우렌티우스, 빗자루를 타고 날으는 비비안 할머니, 산 채로 물고기를 삼키고 뱃속에서 헤엄치는 느낌에 집중하던 브라반투스, 색을 밝히는 발레리아 등등....  그리고 귀익은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를 창시하고 구교회인 카톨록을 지탄하던 루터, 로빈 훗.  이 부분들이 이 이야기를 더 익살스럽고 재미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부분들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요절복통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익살스럽고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한 편의 재기발랄한 에니메이션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끝으로, 이 책은 가볍지 않은 중세의 분위기를 작가 나름의 유쾌함으로 재미있게 펼쳐보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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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인생수업 -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20가지 인생 이야기
푸허녠 지음, 고보혜 옮김 / 이스트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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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빌 게이츠.  음...  아마, 이 양반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가 'Micro Soft' 라는 친숙한(?) 회사의 사장이자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갑부라는 사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책을 선택하여 읽은 것일까?  빌 게이츠.  그의 이름은 이미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자명한 사실은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줌으로 인해 지구상에 위대한 업적 하나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그에게도 한 아버지가 존재함을 일깨워주는 책이었다.  뭐라고?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20가지의 인생 이야기라고?  솔직히 나는 빌 게이츠가 어떤 사람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위대한 사람 뒤에는 그를 지원해주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일깨워주거나 뒷받침을 해 준 사람이 있게 마련.  나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빌에게 그런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인 빌 게이츠에게 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그의 성공 뒤에 있는 아버지를 조명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  나는 빌 게이츠나 적어도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쓴 책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는 '푸허녠' 이라는 제 3자였다.  뭐 저자야 어찌되었건 빌 게이츠 아버지만의 자식교육 노하우(?)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더 크게 보자면,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빌 게이츠의 성장과정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화들.  거기엔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빌이 고민할 때, 자만할 때, 선택의 기로에 서있을 때, 심지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도.  마치 슈퍼맨처럼 등장하여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의 방대함에 실로 놀라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들은 어디서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우화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들은 하나의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읽기가 쉬웠다.  그러면서 자꾸 머리를 쳐드는 생각 하나.  푸허녠은 이 모든 사실들을 어찌 알고 이 책을 쓰게 된 것일까?  그의 성장에 관한 소소한 기록과 행동 묘사는 그나 그의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법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뭐 빌 게이츠 가문과 잘 아는 사람이었나 보지.'  음....  저자 푸허녠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 하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책 속의 우화들은 교훈적이었고 재미있었다.  더구나 나에게 낯설었기에 신선한 이야기들이었다.  만약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읽는 내내 지루함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이런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우화들을 어디서 들었을지 궁금했다.  책에서 만난 그의 아버지는 무릎에 앉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우리네 할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사실 책 안에서 그가 하는 것이라곤 적시적소에 빌에게 필요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용기, 창조, 열정, 슬기, 부, 신용, 인내, 관용, 예의, 운명, 박식, 경청, 잠재능력, 겸손, 신중, 도전, 성실, 우정, 기회, 집념.  이렇게 스무가지.  그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고 스스로 알아가도록 하는 조력자의 모습으로 있었다.  "아빠 말대로만 해.  시키는대로 하면 다 되게 되있어" "어른 말 들어!  어른들은 네게 옳지 않은걸 하라고 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말하는건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거지" 하는 식으로 존중과 조언의 뒤에 빼꼼히 숨어있을 법한 강압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빌에게 이야기의 해답을 찾아보도록 했고 그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빌 역시 똑똑한 아이였기에 아버지가 뜻하는 바를 쉽게 알아 내었다.  그런 모습에서 한 편으로는 '이거이거 애가 아닌데?  아무리 똑똑하다손치더라도'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책장을 좀 더 넘기면서 급기야 나는 어린 빌 게이츠가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도 나이트캡이 흐트러져서는 안되었고 누운 자세 그대로 단정하게 일어나야 했다니....  이게 어디 애한테 가능할법한 일인가?  이것은 예의범절의 문제를 떠나서 어린 아이에겐 너무 혹독한 제제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여전히 드는 생각.  그렇다면 이토록 소상하게 빌과 그의 아버지의 일화를 기록한 푸허녠.  당신은 뉘신지요?  나는 왼쪽에 넘어온 페이지보다 오른쪽에 남은 페이지수가 점점 적어질수록 과연 그, 푸허녠은 누구이길래, 빌 게이츠 가문과 얼마나 친분이 있는 자였기에 이런 것들을 기록하게 되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모든 책장이 왼쪽으로 넘어갔다.  맺음말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다음은 역자의 이야기다.  '실제 발생한 일도 있고 저자가 사실에 입각해 재구성한 내용도 있으며 빌과 아버지, 부자 사이에 발생했을 법한,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결국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상상으로 인해 쓰여진 것인지 알 턱이 없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저자는 유년시절의 몇 가지 일화나 그의 업적이나 약력, 경력에 대한 자료로 글짓기를 했다는 이야기다.  저자 푸허녠은 빌 게이츠의 지인도 아니고 그냥 그의 위대한 성공을 훌륭히 여겨 그의 성품이나 자라온 배경을 가지고 글을 썼다는 얘기다.  혼란스러웠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알기로는 실존인물(생존했던 인물에 대해도 마찬가지) 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하며(고로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이어야 하며, 오로지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책에서 보았듯 (빌 게이츠라는 유명인사를 떠나) 작고 연약한 한 아이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훌륭했다.  그리고 성공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할 20가지 명제에 대한 고찰 또한 흥미로웠다.  그러나 역시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이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가미한 한 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범상찮은 인물임을 암시하기 위해 알에서 태어났다든가 하는 따위의 증명되지 않은 신화들과는 달랐었다면 좋았을 것을.  '위인이기에 여느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유년시절을 보내며 자라왔으리라' 하는 영웅만들기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우리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의 빌 게이츠와 그의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만, 사실 그대로만을 기록했다면 좋았을 것을.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은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이 훌륭했기에 더 큰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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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365일 - 미루의 좌충우돌 1년 나기
강상구 지음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2007년 4월 1일 난생 처음으로 '이모' 라고 불려질 수 있는 첫 조카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어찌하다보니 2007년 2월 20일부터 나는 언니네 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만삭이 된 언니의 배를 보고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고 뱃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햇살이(조카의 태명)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가 출산일이 될지 내심 노심초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조카가 내일 백일잔치를 앞두게 되었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순전히 조카 때문이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도 아니고 조카 하나 얻었다고 육아책을 본다는건 여간 오지랖 넓은 이모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한 지붕아래 조카와 함께 산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강상구씨와 주현숙씨 사이에서 태어난 '강미루' 라는 남자아이의 출생에서부터 1년간의 과정을 아빠 강상구씨의 일기로 담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조카를 보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지침서인줄 알았다.  그리고 그렇기를 바랬다.  그런데 이 책은 한 편의 에세이다.  미루의 모습을 보며 준성이(조카이름)의 생활모습을 생각하게 되었고 미루 아빠 엄마를 보면서 형부와 언니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느낀 점, '역시 육아는 어느가정이나 시끌벅적하구나, 좌충우돌이구나' 하는 생각? ^^
 
  이 책의 미루아빠 강상구씨는 육아의 과정에 전적으로 동참하기 위해 육아휴직을 낸 사람이다.  그야말로 아기를 둔 모든 엄마의 로망이자 백마탕 왕자인 셈이다.  나는 먼저 육아휴직의 의무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책에서도 강상구씨는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거나 제도화 하는 것' 에 대해 살며시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옛날과 틀리다.  여자는 그저 집안 일 잘하고 남편 뒷바라지에 애 잘 키워내면 그 뿐인 세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육아휴직을 의무화' 하는 것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고민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첫째, 육아휴직동안의 생계를 위한 돈벌이는 어떡할것인가?  물론 맞벌이 부부이고 한 사람이 육아휴직을 하게 되어도 다른 한 사람에게 일정 수입이 있다면 걱정스러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만이 가정의 수입을 조달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육아휴직은 그야말로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  따로 모아놓은 돈이 있지 않고서 1년이라는 육아휴직을 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아이를 막 낳아 기르기 시작하는 초년부부가 많은 돈을 모아놓았으리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육아휴직의 의무화' 는 애 하나 키우기 위해 손가락 땟국물만 빨아먹고 강제로 놀아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불법체류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숨어서 일하고 있는 것처럼 육아휴직을 당한(?) 가장은 이리저리 전전긍긍하며 일용직이라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충분한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의무화는 멀쩡한 직장을 버려두고 하루하루 벌어 쓰게 되는, 그야말로 고생길을 어찌할 수 없이 떠안아야 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육아휴직을 하게 된 자에게 국가는 일정금액을 보조해주어 전적으로 육아휴직의 기간을 육아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둘째, 육아휴직의 기간을 악용하는 일 또한 벌어질 것이다.  쉽게 말해, 육아휴직을 얻어놓고 육아나 가정을 돌아보기는 커녕 낚시나 등산으로 휴직기간을 허비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경우는 육아휴직 보조금이 지원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육아휴직 기간동안 휴직대상자들을 위한 국가차원의 관리가 있어야 한다.  육아에 대한 강연회라던가 관할구청에서 육아휴직자들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있어 '나는 지금 피곤한 몸 쉬이며 한 번 놀아보자고 휴직중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가정에 참여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역시 이런 부분들이 잘 갖추어진 채 '육아휴직의 의무화' 가 도입된다면 그야말로 육아에 지친 많은 주부들에게는 희소식이 될 것이다.  육아책을 읽고 육아에 대한 제도적 제도를 고찰해본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나는 강상구씨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함을 통해 한 개인의 개인적인 바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진지하게 육아휴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나중에 자라서 미루가 이 책을 본다면 정말 아주 행복할꺼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랄때만 해도 우리네 엄마들은 육아일기를 쓸 수 있을만큼 여유없이 살아왔다.  그래서 나의 아기적 이야기는 그저 입으로 전해들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어린시절의 한 부분을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 있다면 정말 즐거울 것이다.  육아일기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위한 일기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한 생명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기록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건 주선생님이(미루엄마) 타임캡슐에 임신테스트기며 미루에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두는 만큼 소중한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아이를 갖는다면 그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육아서적은 역시 임신때나 아니면 아이를 갖기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의 현장은 전쟁이다.  그런데 그때 애키우기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육아서적은 절대적인 예습서적이다.  그런 면에서 볼때, 나는 약간 시기상조와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언제나 나의 육아때를 위해서라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의 귀여운 삽화도 참 재미있었고 특히나 강상구씨의 즐거운 입담에 심심하지 않았다.  마치 미루키우기에 함께 동참한 느낌이 들기도 했으며 미루 또한 내 조카인 마냥 정이 들어버렸다.  미루가 건강하게 튼튼하게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귀여운 아기선배 미루가 자라가는 것처럼 우리 조카 준성이도 그 행로를 밟게 되겠지 싶으면서 돌까지의 과정이 순탄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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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표지를 처음 보았을때, 해골을 쿠션삼아 기댄 무표정한 여인하며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이라는 제목이 더운 여름 그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거 있잖는가?  '머리도 식힐겸해서' 라는 말이 제법 어울릴 듯한....  그런데 책을 받아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흠....  두께가 장난아니군.  이 책은 페이지수가 무려 555에 달하는 책이다.  아마 올초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중 두께로 보자면 책들의 아버지쯤 될 것이고 내 평생 읽은 책으로 보자면 책들의 큰 형님정도 될 법한 두께.  나는 은근히 겁이 났다.
 
  책을 펼쳐드는 순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생각났다.  그 책의 첫 페이지는 수도원 근처를 그린 그림지도다.  이 책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곳들을 찾을 수 있는 그림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두 책에서 등장하는 수도원, 수녀등의 중세적인 분위기 또한 비슷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 인 듯 싶다.  이 책을 펼치고서는 왠지 모를 묵직함을 느끼게 되리라 생각했다.  결코 책의 두께만이 아닐 그 묵직함. 
 
  사흘만에 읽었다.  그것도 마지막날은 새벽 3시가 넘어 책을 놓을 수 있었다.  아, 이제 막 클라이막스에 달한 이야기를 손에 쥐고 눈앞의 커튼을 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새벽 3시 반경 책을 다 읽었다.  덕분에(?) 그 날은 종일 다크서클을 달고 다녀야 했다.  그렇다고 수면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 억울하지도 분하지도 않았다.  '내가 이 시간까지 미쳤다고 이러고 있었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책을 덮고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는 그 순간에는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추리소설은 읽고 참으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어요' 라고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혹시 어젯밤 읽은 책이 에거서 크리스티의 위인전은 아니었구요?" 하며 되물을지도.  뭐 그냥 들어 생각기에도 추리소설을 읽고 재미있었다고 말하기는 하나 감동을 받았다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도록 한 책이 여기 있다.  바로 <죽음을 연구한 여인> 이다.  어떤 면이 그토록 감동스러웠는지 천천히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추리소설이나 무협지, 그들이 갖고 있는 매력은 빠른 전개와 긴장감, 스릴이다.  이 책 역시 책을 손에 놓을 수가 없으리만치 흡입력이 강했다.  급기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델리아가 되어 아이들의 시체를 해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최근 읽은 추리소설은 카르멘 포사다스의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라는 책이었는데 기존의 추리소설의 룰과 형식을 탈피한 새로움이 신선했다면 역시 추리소설의 진수를 보여준 것은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이 아닐까 싶다.  아, 그나저나 추리소설이나 공포영화 따위를 접하고 나서는 숨만 쉬어도 스포일러들이 줄줄 흘러나올 것만 같은데 그것들을 글자로 남기는 위험천만한 일을 지금 하고 있다.  그리고 '낱낱이 발가벗기는 서평은 자제해야겠구나' 하고 추스리는 중이다.  만에 하나 내 글이 이야기 속 용의자를 예측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해 김이 새버리게 할 부분이 있게 된다면....  그것들을 그대들의 눈과 머리가 인식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먼저 이 소설이 가치로운 점은 이야기의 흥미진진함은 물론이요.  작가의 박식함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게중에서도 소설은 특히나 더) 이야기 구성력, 필력, 상상력, 작품에 대한 애정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하나,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모두 함께 잘 버무려져 훌륭한 맛을 내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중세 시대에 대한 작가의 이해수준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해라고 표현해버리고 말기에는 아쉬울만큼 완벽히 재현한 듯한 중세시대.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는 이야기의 배경이나 상황이 단순히 허구만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듯 역사적 배경과 뒷받침을 담고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작품을 쓰기까지 작가의 무수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있었겠지.  그 손길과 발품으로 지어진 책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겸허해졌다.  그 뿐 아니라 약초나 해부학적 지식은 물론 다양한 종교에 대한 작가의 앎의 깊이에 놀랐다.  아, 역시 작가는 글 좀 써댄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역시 아는 만큼 쓸 수 있다.  유치원생의 그림일기와 중견작가의 에세이가 또 다르듯이 말이다.
        
  한 시도 범인을 지목해내기 어렵게 하는 이야기 전개능력도 훌륭했다.  책의 빨간 띠지가 말한 것처럼 '현대 스릴러 작가들의 무수한 찬사를 받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다웠다.   이 책은 '이 사람 왠지' 싶다가도 또 금새 '아까 그 사람은 아닌 것 같군' 하다가 '틀림없이 이 사람일꺼야.  제발 그렇기를....' 하다가 '이 사람이었다니, 이럴수가' 하게 된다.  "내가 예측한 범인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소이다" 하는 다른 독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필시 친구로 삼고 곁에 두고 싶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대단히 예리하고 번뜩이는 정신력을 가진 범상치 않은 인물이니 반드시 후세에 이름을 남길터.  부디 옥체보존하소서.  

또 하나의 감동을 얻은 부분은 아델리아라가 4번째 (아직 이 부분까지 진도를 나가지 못한 독자가 이 자의 이름을 알게되지 않길 원하여) 시신을 두고 고민하던 모습이다.  그 시신을 열어젖히면 범인에 대한 큰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미 호흡이 떠나버린 망자의 시신앞에서 살아생전 믿고 따르던 그의 신과 종교를 거스르는 일이 될까봐 망설이던 모습이다.  죽은 자 앞에서 예(禮)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이 셋과 네번째 사람까지 살해한 범인에 대해 그럴수밖에 없었던 더 기가막힌 배후의 음모등이 숨어있었다면 하는 점이다.  실로 많은 공포영화가 범인의 명백한 살해 이유나 정황없이 그저 그 자신이 '미치광이' 이기 때문에 자행하고 있는 그것과는 달랐다면 더 참신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시, 읽어볼만하다.  단지 잡고 잡히는 데만 열중하지 않아도 될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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