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비밀의 집과 마법의 부채 행복한 책읽기 6
이슬기 지음 / 계림닷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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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나에게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 이상의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유년시절 너무 즐겁게 읽었던 <주근깨 소녀>를 지으신 이슬기 선생님의 책이자 그 분께 얼마전, 직접 받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슬기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된 사연 또한 나에게는 소중한 이야기가 될 듯 싶다.  내 직업이 유치원 교사이고 만 5세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림책은 한 시가 멀다하고 보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읽을 법한 장편동화책은 어린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큰 활자, 컬러의 매력적인 삽화....  어른이지만 역시 즐거웠다.  이미 다 자라 어른이 되어 버린 내가 초등학생들이 읽을 법한 이야기 책을 읽는 기분은 어떨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유치하다고 생각될까?  권선징악, 꿈과 희망에 대한 메세지...  그 뿐 일까?  그런데 책장을 펼치고 머지않아 나는 이야기 속에 포옥~ 빠졌다.  
 
  천년이상 살고 있다는 할아버지와 그를 미친 노인네로 보는 세상의 이목들, 전학 간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주인공 어린이 한수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기이한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한수는 재미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참 많은 것들을 전해주고 있다.  동화로서의 환상, 사람들간의 믿음, 자연에 대한 사랑등....  이야기의 흥미는 물론 역시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어 역시 어린이들에게는 즐겁고 배움을 줄 수 있는 책이었다. 
 
  한수와 할아버지가 주문을 외고 여러가지로 변신하는 것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이 때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변신을 꿈꾼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환상이야말로 동화속에서 허용되는 특권이 아닐까?  그리고 전학간 아이 한수와 뇌성마비를 앓은 아이 영우를 모질게 대하는 장면에서는 '이 아이들은 나빠.  이렇게 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라는 생각과 동시에 어떤 아이건 우리의 친구로 품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은 용기와 도전이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아기 사슴이 올가미에 걸려 있을 때였다.  이 부분에서는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길러 준다.  그리고 저자가 자주 오르내리는 아차산이라는 곳에 있는 보루터를 통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군사들의 모습을 상기시켜주는데 이런 역사를 통해 애국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역시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라 교육적인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용도 참 재미있었다.  
 
  역시 동화는 아이답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이 성인이건 누구건 간에?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정말 아이가 된 것 같아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실지 아기사슴이 올가미에 걸린 장면에서는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 차는 것을 느끼고는 '이건 동화야' 하고 생각해야 할만큼 마음이 아팠다.  가끔은 동화를 읽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유년시절 나에게 잊지 못할 이야기를 쓴 작가가 여전히 아이들을 위한 좋은 동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며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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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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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내가 읽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으로는 <좀머씨 이야기> <콘트라베이스> <향수>에 이어 네번째 책이다.  이 중 스토리 그 자체를 가장 잘 살린 이야기는 <향수>인 듯 싶고 예술적 감각을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좀머씨 이야기>와 <깊이에의 강요>는 사뭇 철학적인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시집과 같이 얇아서 놀라기도 했는데, 이 두께에 담긴 깊은 내용에 더 놀랐다.  이 책은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그리고 하나의 고찰 이라는 4개의 단편을 담은 책이다.  가장 인상깊은 단편은 역시 표제로 사용된 소설 '깊이에의 강요' 였다.  두 번째는 '......그리고 하나의 고찰' 이었다. 
 
  '깊이에의 강요'는 유능한 한 화가가 그녀에게 깊이가 없다고 말하는 평론가와 대중으로 인해 무기력 상태가 되고 결국 자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쥐스킨트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한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사람들의 경솔한 언변을 꾸중하는 것일까?  소심한 화가의 어리석음을 탁하려는 것일까?  둘 다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세상의 평론가들이 종이 한 장 뒤짚듯 하는 태도도 꼬집고 있다.  말이 나와 이야긴데, 명색이 평론가라는 자들의 평론을 보면 어떨땐 왠만한 사람들의 '후기'가 더 현실적이고 잘 와닿을 때가 있다.  어쩌면 그들 또한 죽어버린 한 화가처럼 깊이데 대한 강박이 있을런지도.  우리도 흔히들 그런 말을 한다.  '그 사람은 깊이가 없어'  나는 깊이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고 싶다.  가로의 폭이 좁고 세로나 높이가 긴 밀폐된 그 무엇을 보고 말할 수 있는 그 깊이?  그렇다면 그 깊이를 무형의 어떤 것에서 어떻게 담거나 발견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깊은 것은 훌륭한 것이고 얕은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인가?  예술작품이나 인품을 보고 쉽사리 표현하는 '깊이'  이것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  이야기 속 화가는 그 깊이를 찾으려다 찾으려다 결국은 깊이 있는 떨어짐(투신)을 통해 숨바꼭질을 끝낸다.  어떤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깊이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의내리기 힘들며 발견하기 힘든 그 무언가를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또한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승부' 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체스를 두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체스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여하튼 체스에는 많은 전략들이 존재하고 사고가 필요한데 폰을 살리기 위해 퀸을 죽이기도 하는 대담한 패자의 모습을 통해 체스의 대가가 체스판에서는 이겼지만 스스로가 패배자라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뭔가 스릴있고 아찔한 필치로 담은 듯한 이야기나 체스를 모르는 나로서는 반밖에(혹은 그보다도 덜) 이해할 수 없었을 밖에.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에퓨~
 
  '장인 뮈사르의 유언' 네 편의 단편 중 가장 난해한 단편이었다.  또한 가장 쥐스킨트다운 독특한 단편이 아닌가 싶다.  화단에 장미를 가꾸려던 뮈사르가 땅에서 우연히 조개 암석을 발견하게 되고 땅은 모조리 조개 암석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땅은 조개화 되어가고 인간의 뼈역시 조개화 되어간다는 일종의 맹신(?)을 담고 있다.  죽음을 면전에 둔 한 인간의 (어떤 특정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무모하고 광기어린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장미를 심고 화단을 가꾸며 삶을 제대로, 잘 살고 싶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절망의 메세지, 죽음앞에서 무엇에든 매달려 보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뮈사르를 통해 그려내었는지도.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 내지는 자아성찰을 가져다 줄 단편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본다.  방대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으나 많은 책들.  이 책들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게 했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고 그것을 넘어선 정보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자연적으로 망각하게 된다.  그런 망각에도 불구하고 읽는다는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에게 읽는다는 것은 그 내용을 기억하기 위함보다는 읽는 순간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책이 정보전달의 기능보다는 유희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망각이 간섭한다손치더라도 별 억울함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방대한 정보와 망각의 사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원수지간일게다.   
 
  얇은 책에 담긴 네 단편이었지만 읽고난 뒤의 느낌은 몇 권짜리 전집을 읽은 듯한 기분이다.  이 책이 얇았으니 망정이지 두꺼운 자태로 왔다면 아마 읽다 몇 번이고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휴~  파트리크 쥐스킨트씨, 이 책이 얇아서 감사하네요.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내용을 다루기엔 적당한 두께가 아닐까?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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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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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간을 기다려왔다.  그의 책으로는 <개미>서부터 이제껏 국내에 출판된 책은 모두 읽었다.  <개미>는 그간의 통속적인 소설들에 찬물을 끼얹는 신선하고 기발하며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그때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는데 그 이후 출간된 책들 역시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그의 소설의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신선한 소재가 아닐까?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파피용> '이번에는 대체 무엇일까?' 기대하며 읽었다.  그리고 <신>이라는 작품 또한 머지않아 출간될 예정이라니 갑절로 반갑다. 
 
  근데 이 책은 어찌 이세욱씨가 아닌 전미연씨라는 번역가에 의해 번역이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문장 구석구석이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살짝 한 문장만 보자면 p.17 '엘리자베트는 휴대 전화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우산을 받쳐 든 채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유머 감각을 발후하는 한 구애자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이어폰을 꽂고 우산을 들었다는 것인지 '한 구애자'가 이어폰을 꽂고 우산을 들었다는 것인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는 상황으로 봐서는 전자일 듯 싶다.  그리고 편집에서의 실수이겠지만 몇 개의 오, 탈자도 눈에 띄었다.  그간 이세욱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 덩어리인마냥 익숙해진 나는 괜시리 텃세를 부리고 싶은지도.  아니, 나는 이세욱씨가 그리운거야.
 
  그러면 이제 파피용의 겉모습을 한 번 훑어보자.  까만 우주의 광활의 공간에 둥둥 뜬 신비로운 푸른빛의 나비 한 마리.  표지가 참 예뻤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  그리고 얇지는 않지만 무겁지 않은 책.  그리고 <나무>에서 삽화를 맡았던 뫼비우스의 그림.  그의 만화같은 삽화때문이었는지 한 편의 공상과학 만화 내지는 영화같은 스토리였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기전 예약구매자들에 한해 한국독자에게 띄우는 저자의 메세지가 수록된 책을 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몇 일 늦게 주문했지만 내 책에도 역시 미농지에 새겨진 그의 메세지가 있어서 즐거웠다.  물론 친필은 아니지만.  
 
  그러면 파피용에 올라타보자.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그의 기발함과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문체나 표현력보다는 이야기 구성이나 상상력, 기발함이 두드러지는 작가다.  그래서 간결하고 어렵지 않은 문장들로 읽히는 속도도 빨랐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성서의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에서 스토리를 착안한 듯 닮은 이야기다.  동물의 종류별로 '파피용' 호에 탑승시키는 장면, 신(新)지구인의 이름 또한 이브, 아담이 되는데다가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드는 것, 사물과 동물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나....  이브는 '파피용'의 창시자인 이브 크라메르를 야훼(여호와)하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책은 분명 아니었다.  '노아의 방주'라는 그 큰 실루엣에 베르나르 베르베르 특유의 구체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어 완전 새로운 창작물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만약 '파피용'이 우리 시대, 현재 지구 어느 곳에서의 일이라면....  당신이 '파피용' 탑승자를 모집하는 공고문을 읽게 된다면....  지원할 것인가?  나는 절대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애시당초 지원할 자격도 않되겠거니와 설사 된다하더라도 탑승자 선별 과정에서 첫번째로 탈락할지도 모르지.  사실 지구가 험난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름다운 별이다.  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거대한 깡통속에서 여생을 살고 싶지는 않으며 단순히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되기에도 겁이 많다.  또 틀림없이 지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이 곳의 냄새, 이 곳의 소리 그리고 이 곳의 적절한(?) 중력까지도.
 
  그렇다면 '파피용'은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내 생각은 실패다.  새로운 터전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자면 성공일런지 모르겠으나 창시자들이 꿈꿔왔던 새로운 세상, 즉 파라다이스 건설을 꿈꾸었다면 실패다.  어찌 단정짓느냐 할 지도.  그렇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정착한 남, 녀.  그들로 인해 자손이 번창할 것이며 역시 그 별을 다스리는 인간들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프로젝트는 결국 제2의 지구를 만들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탈출이 아닌 이주일 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생선을 싼 천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꽃과 향수를 싼 천에서는 은은한 향내가 난다는.  또 비슷한 뜻을 우리 속담에서 보자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정도?  다시 말해, '파피용' 호가 도달할 곳은 미지의 새로운 곳이며 그들이 탑승할 공간 역시 지상과는 다른 새로운 곳이다.  그러나 파피용에 탑승한 인간은 여전히 지구인이다.  인간들의 본질은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천년이나 뒤에 있을 후세를 위한 신도시라 할지라도 지구에서 살아왔던 선조들의 생활과 사고의 방식은 여전히 후손들이 답습될 것이다.  결국 그들이 새로이 정복하게 된 그 별에서 역시 약탈, 살인, 강간, 전쟁, 어리석은 정치들이 있게 될 것이란 말이다.
 
  '파피용'은 현 사회와 세계의 부조리와 오염(환경오염 뿐만 아니라)을 비웃고 있다.  그리고 삶의 모습과 삶의 터전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며 인간의 삶에 있어 통제와 규율과 법이 필요한지를 되짚어 보고 있다.  파피용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우주선 안은 우리네의 과거다.  법도 없고 돈도 필요없던 곳에서 법이 필요해지고 어떻게 지도자가 생기게 되고 감옥이 생기게 되며 규범이 만들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단순히 공상과학같은 이야기를 넘어서 사회의 변화양상과 인류의 진화과정을 친절히 보여주는 철학냄새 물씬 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여전히 지구가 좋다.  나는 그 어느 별도 아닌 이 곳에서 천대를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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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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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한국수필의 맥을 이어온 분이라면 단연코 고 피천득씨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여태 그의 저서 하나 제대로 읽은 것이 없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수필 몇 편 읽은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들은 것은 있어, 예나 지금이나 수필하면 '피천득' 하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난 5월, 그의 부고소식은 나에게도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곁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만날 수 없는 것이 이리도 다른 느낌으로 와닿으리라곤 전에 생각지 못했다.  그간 누누이 '그의 수필집 언제 한 번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던 것이 결국 그가 떠난 지금에서야 가능하게 됐다.  그것도 이 책 <인연>을 몇 번이나 장바구에 담았다가 뺏다가 담았다가 뺏다 하기를 거듭한 끝에 읽게 된 책이다.  책 한 권 사는 일에 무어 그리 고민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읽힐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제법되는데 '더 이상 책들을 쌓아두어서는 안되겠구나.  이 책들을 다 읽어본 다음에야 읽어보아야지' 하던 찰나, 지인에게 뜻밖의 이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나는 생각보다 일찍(실은 아주 늦은 것이지만) 이 책 <인연>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조그마한 눈의 늙은 피천득씨가 떠올랐다.  그가 작고하며 다룬 인터넷기사에 얹힌 그의 작은 사진.  이 책에는 총 81편의 수필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그의 젊은 시절 주로 쓰여진 수필들이다.  그렇기에 늙은 피천득씨의 모습을 그리며 읽는 것이 다소 무리는 있겠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늙은 피천득씨의 얼굴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수필의 대가인 고 피천득씨의 수필이라고 해서 그의 글이 탁월하다거나 '여느 수필과는 차원이 다르군'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수필은 마치 일기장을 보는 듯 했다.  진솔하고 정직한 한 인간의 일기장과 같은 느낌이랄까.  화려한 미사여구로 휘황찬란하거나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일부러 감동을 주고자 썼다거나, 잘난 자신을 드러내고자 쓴 글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하는 스승에 대해, 딸 서영이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찬양하던 봄에 대해 그만의 필치로 조용하게 끄적거린 글이었다.  어쩌면 그의 글은 이리도 솔직한 모양새를 하고 있기에, 특별하지 않은, 오히려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기에 더 진한 감동을 주는 게 아닐까?  소위 말해, 문학의 거장이요, 최고봉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학식이나 지식 따위를 자랑하거나 남다른 시각을 드러내기 위한 글들을 써내려 머리를 싸매는 고달픈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친근한 옆 집 아저씨같이 허식이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할런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쉼이다.  '이 무슨 의미일까?' '왜 이리 생각하나?' 따지고 견줄 필요도 없이 그저 읽히는 대로 그의 글자들을 따르면 된다.  그렇기에 한 폭의 고즈넉한 수묵화같이 느껴지는게 아닐까?  
 
  이 책은 고 피천득씨의 삶이 그의 수필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딸 서영이에 대한 사랑을 다룬 수필에서는 '우리 아빠도 이렇게 나를 위해 글을 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했다.  필시 아버지의 마음이야 같은 것이 아니겠냐마는 활자로 새겨진 딸에 대한 사랑이 마치 내게 없는 것인냥 부러웠다.  그리고 훌륭한 많은 스승과 지인들을 둔 일로 놀라웠는데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여심 주요섭, 프로이트까지.  그와 인연이 있던 자들이라니....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역시 그 자신만큼이나 훌륭한 지인들과 스승을 두고 있구나 싶었다.  그들 모두 이제는 한 곳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겠지. 
 
  한 편의 따사로운 일상의 기록들을 품고 있는 이 책.  두고 두고 읽고 그를 기리기에 이 보다 좋을 수는 없을 듯 싶다.  문학이라는 것이, 글이라는 것이 이토록 고귀하다.  육신은 사그라들고 말지언정, 그의 정신과 영혼과 숨결은 그 곳 그 자리에 영원하니 말이다.  귀한 인연만큼이나 좋은 책을 전해주신 서유경님께도 다시 감사드린다. 
 


고 피천득씨에게,
이 책의 표지를 봅니다.  진주를 입에 문 조개가 살그머니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우아하고 은은한 빛깔의 아름다운 진주를 뱉아내는 조개....  당신은 조개를 닮았습니다.  
이제는 가고 없지만 우리게 이렇듯 귀한 진주 한 알 남겨두셨으니.  
 
봄을 그토록 찬양하시던 당신, 
잠없는 곳은 천국도 싫다하시던 당신....  
그처럼 당신은 봄에 오시고 봄에 가시었습니다. 
부디 따사로운 바람과 연초록의 새순으로 가득 찬 
싱그럽고 찬란한,
그 봄에 안기어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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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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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라도에서 생긴 일'?  능라도라....  작은 한 섬일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번뜩 실미도가 떠오른 것은 어인 일인지.  독도, 울릉도, 실미도는 내가 3초안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섬들이다.  몇 해전 실미도라는 영화의 비밀부대의 느낌이 강했던 탓인지 능라도에서 '뭔가 모를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려나 보다' 하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능라도는 섬이 아니다.  인터넷상의 가상공간이다.  그렇다면 왜 능라도일까?  나는 무엇이든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가보다.  책을 다 읽고 나서의 일이지만 검색을 통해 능라도는 평안남도 평양시 대동강에 있는 섬의 이름이며 최찬식이라는 작가가 1919년에 능라도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 섬에 가본 적이 없으며 그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 능라도 속으로 들어가보자.  그들 앞에 놓여진 권 총 하나.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이 권총으로 무엇을 처단할 것인가 하는 자뭇 위험하기까지한 문제에서 작가는 거침없었다.  비루먹을 민주당, 염병할 개나라당, 여의도 의사당, 국세청, 검찰청, 서초동 법원, 삼성, 현대, LG 본부건물, MBC, KBS, SBS,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국민은행 로또부, 한국마사회, 문예진흥원, 이태원 미군부대, 세계무역센터, 판문점, 임진각....  작가에게 들려진 펜 한자루는 권총인 셈이다.  이쯤이면 작가 이제하는 우리 사회 굵직굵직한 기관과 신문사들, 방송사들에게 이미 난사를 한 셈이다.  나는 이 대목으로 책의 성격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바랬다.  신랄하고 도발적인 이 글이 문학에 충실하기를, 독자들을 어느쪽으로도 선동하는 일이 없기를.    
 
  능라도라는 온라인 공간.  그들은 그 권총을 '코끼리' 로 부르기로 한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라는 영화는 내게도 인상깊은 영화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데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온하기까지하던 잔잔한 영상속에 담긴 총성은 몇 배나 더 끔찍하게 와닿았던 영화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은 영화 <엘리펀트>와 상당히 닮았다.  그러자면 영화 <엘리펀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코끼리 한 마리 등장하지 않는 그 영화는 왜 <엘리펀트> 일까?  물론 이에 관해서는 아무도 진의를 알지 못하며 단지 이러이러해서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겠는가? 하고 유추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엘리펀트>라는 제목이 영화가 의미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라 생각한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냐면 째, 이 영화에서는 같은 장면을 카메라 위치를 달리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  '장님들의 코끼리 다리 만지기' 라는 이야기가 있듯 모두 같은 부분을 만지지만 각기 다른 것을 유추해내는 행동을 일컫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각기 다른 생각에 주목함으로써 전체적인 모습을 만들며 같은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 그 장면들을 통해 전체적인 한 '실체' 가 만들어 진다.  둘째, 서양에서 전해내려져 오는 우화 중에 내부안의 커다란 문제을 의미하는 '거실안의 코끼리'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린시절부터 집안에서 커왔기에 이미 커져버린 몸집을 집 밖으로 쫓을 수도 없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코끼리에게 무감각해지고 익숙해 져버린다.  그런데 가끔 코끼리가 몸을 움직여 집을 흔들어 버리기도 하고 엉망진창을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와 이 소설이 무슨 관계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하의 이 소설이 이 영화에 상당히 충실했다고 말하고 싶다.  능라도 회원들이 함께 소유하게 된 권 총, 그리고 그것을 집어드는 여러 회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반복적인 상황을 통해 이야기의 실체가 만들어 지고 있다.  또 이 권총이 그들에게는 '거실안의 코끼리' 인 셈이다.  우연히 그들 앞에 놓인 권 총 한 자루.  그것을 누군가가 손에 쥐게 될 때가 바로 집 채가 흔들리는 순간, 그들이 흔들리는 순간인 것이다.  이 소설 <능라도에서 생긴 일>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하노라면 나는 반드시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라는 영화부터 권하고 싶다.
 
  또 이 책 안에서 오가는 토론(혹은 논쟁)은 상당히 흥미진진했고 매력적이었다.  친일시인 S씨에 관한 탱자꽃과 로르카의 의견, 그리고 이들의 무모한 행위를 꾸짖는 키티의 댓글이 참 인상적이었다.  시인의 창작물과 고귀한 정신은 한 번의 실수(친일)를 능가하는 것이며 그 하나만으로 그 정신과 작품까지 싸잡아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로르카.  친일한 자에게 어찌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정신과 그의 작품이 서로 다를 수 없다는 탱자꽃.  다들 잘난 것 없소이다.  모두 조용히 하라는 키티.  모두들 어찌나 설득력이 있는 대화들인지.  물론 논리적인 면에서는 로르카의 입장이 가장 와닿았는데 로르카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은 작가의 견해가 아닐런지.  이 책의 저자 이제하씨가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몇 해전, 나 역시 친구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입장으로만 보자면 탱자꽃쪽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업적과 창조의 산물들이 그의 정신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이들의 논쟁같은 토론이었다.  분명 이 토론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를 가져다 주고 있다. 
 
  능라도, 권총 이것은 무엇일까?  능라도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능라도는 우리 사회다.  각기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상의 작은 공간이 결국은 우리 삶의 공간인 셈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놓여지는 권총은 무엇일까?  권총은 다양한 상징물이다.  첫째, 권총은 권력이다.  그 권력을 거머진자는 누군가를(혹은 사회를) 응징하고 처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 개인적인 아픔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총을 집는 그들 내면의 아픔과 슬픔은 이 총을 발포함과 동시에 씻겨지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현실만을 비웃고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누군가에게 고해바치려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랬다.  물론 작가는 글에 목소리를 얹을 수는 있으나 단지 그 기능에만 충실한다면 소설은 문학이기 이전에 신문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사설(社說)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에 일축을 가하기라도 하는 듯 작가는 책의 후미에서 '시범시' 라는 신도시를 세웠는데 이 시(市)는 완전한 상상력으로 응집된 공간인데 이 곳에서는 매주 토요일은 방송이 중단되고 삼성, 현대, 검찰청, 국세청 건물이 붕괴된 곳이다.  모든 관공서와 언론사들이 실명으로 공개된 현실적인 글의 바탕에서 이 공간이야 말로 참된 상상력의 공간이다.  
 
  이 작품 <능라도에서 생긴 일>은 작가의 기발한 발상과 위험천만한 소재인 '권총' 으로 흥미를 불렀으며 사회적인 규범이나 가치에 대해 독자에게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시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드러내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사회와 현 세태를 꼬집고 비틀어 보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 무거워 독자들로 하여금 지레 겁을 먹게 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대상과 작가의 신념과 의도에 좀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작품 <능라도에서 생긴 일>은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며 훌륭한 소설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간만에, 가뭄에 콩나듯 하는 좋은 작품을 만난 것 같다.  충분히 눈여겨 볼 만한 작가 하나 알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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