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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능라도에서 생긴 일'? 능라도라.... 작은 한 섬일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번뜩 실미도가 떠오른 것은 어인 일인지. 독도, 울릉도, 실미도는 내가 3초안에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섬들이다. 몇 해전 실미도라는 영화의 비밀부대의 느낌이 강했던 탓인지 능라도에서 '뭔가 모를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려나 보다' 하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능라도는 섬이 아니다. 인터넷상의 가상공간이다. 그렇다면 왜 능라도일까? 나는 무엇이든 고분고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가보다. 책을 다 읽고 나서의 일이지만 검색을 통해 능라도는 평안남도 평양시 대동강에 있는 섬의 이름이며 최찬식이라는 작가가 1919년에 능라도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 섬에 가본 적이 없으며 그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 능라도 속으로 들어가보자. 그들 앞에 놓여진 권 총 하나.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이 권총으로 무엇을 처단할 것인가 하는 자뭇 위험하기까지한 문제에서 작가는 거침없었다. 비루먹을 민주당, 염병할 개나라당, 여의도 의사당, 국세청, 검찰청, 서초동 법원, 삼성, 현대, LG 본부건물, MBC, KBS, SBS,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국민은행 로또부, 한국마사회, 문예진흥원, 이태원 미군부대, 세계무역센터, 판문점, 임진각.... 작가에게 들려진 펜 한자루는 권총인 셈이다. 이쯤이면 작가 이제하는 우리 사회 굵직굵직한 기관과 신문사들, 방송사들에게 이미 난사를 한 셈이다. 나는 이 대목으로 책의 성격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바랬다. 신랄하고 도발적인 이 글이 문학에 충실하기를, 독자들을 어느쪽으로도 선동하는 일이 없기를.
능라도라는 온라인 공간. 그들은 그 권총을 '코끼리' 로 부르기로 한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라는 영화는 내게도 인상깊은 영화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데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온하기까지하던 잔잔한 영상속에 담긴 총성은 몇 배나 더 끔찍하게 와닿았던 영화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은 영화 <엘리펀트>와 상당히 닮았다. 그러자면 영화 <엘리펀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코끼리 한 마리 등장하지 않는 그 영화는 왜 <엘리펀트> 일까? 물론 이에 관해서는 아무도 진의를 알지 못하며 단지 이러이러해서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았겠는가? 하고 유추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엘리펀트>라는 제목이 영화가 의미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목이라 생각한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냐면 첫째, 이 영화에서는 같은 장면을 카메라 위치를 달리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 '장님들의 코끼리 다리 만지기' 라는 이야기가 있듯 모두 같은 부분을 만지지만 각기 다른 것을 유추해내는 행동을 일컫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각기 다른 생각에 주목함으로써 전체적인 모습을 만들며 같은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 그 장면들을 통해 전체적인 한 '실체' 가 만들어 진다. 둘째, 서양에서 전해내려져 오는 우화 중에 내부안의 커다란 문제을 의미하는 '거실안의 코끼리'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린시절부터 집안에서 커왔기에 이미 커져버린 몸집을 집 밖으로 쫓을 수도 없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코끼리에게 무감각해지고 익숙해 져버린다. 그런데 가끔 코끼리가 몸을 움직여 집을 흔들어 버리기도 하고 엉망진창을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와 이 소설이 무슨 관계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하의 이 소설이 이 영화에 상당히 충실했다고 말하고 싶다. 능라도 회원들이 함께 소유하게 된 권 총, 그리고 그것을 집어드는 여러 회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반복적인 상황을 통해 이야기의 실체가 만들어 지고 있다. 또 이 권총이 그들에게는 '거실안의 코끼리' 인 셈이다. 우연히 그들 앞에 놓인 권 총 한 자루. 그것을 누군가가 손에 쥐게 될 때가 바로 집 채가 흔들리는 순간, 그들이 흔들리는 순간인 것이다. 이 소설 <능라도에서 생긴 일>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하노라면 나는 반드시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라는 영화부터 권하고 싶다.
또 이 책 안에서 오가는 토론(혹은 논쟁)은 상당히 흥미진진했고 매력적이었다. 친일시인 S씨에 관한 탱자꽃과 로르카의 의견, 그리고 이들의 무모한 행위를 꾸짖는 키티의 댓글이 참 인상적이었다. 시인의 창작물과 고귀한 정신은 한 번의 실수(친일)를 능가하는 것이며 그 하나만으로 그 정신과 작품까지 싸잡아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로르카. 친일한 자에게 어찌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정신과 그의 작품이 서로 다를 수 없다는 탱자꽃. 다들 잘난 것 없소이다. 모두 조용히 하라는 키티. 모두들 어찌나 설득력이 있는 대화들인지. 물론 논리적인 면에서는 로르카의 입장이 가장 와닿았는데 로르카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은 작가의 견해가 아닐런지. 이 책의 저자 이제하씨가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몇 해전, 나 역시 친구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입장으로만 보자면 탱자꽃쪽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업적과 창조의 산물들이 그의 정신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바로 이들의 논쟁같은 토론이었다. 분명 이 토론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를 가져다 주고 있다.
능라도, 권총 이것은 무엇일까? 능라도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능라도는 우리 사회다. 각기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상의 작은 공간이 결국은 우리 삶의 공간인 셈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놓여지는 권총은 무엇일까? 권총은 다양한 상징물이다. 첫째, 권총은 권력이다. 그 권력을 거머진자는 누군가를(혹은 사회를) 응징하고 처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 개인적인 아픔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총을 집는 그들 내면의 아픔과 슬픔은 이 총을 발포함과 동시에 씻겨지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현실만을 비웃고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누군가에게 고해바치려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랬다. 물론 작가는 글에 목소리를 얹을 수는 있으나 단지 그 기능에만 충실한다면 소설은 문학이기 이전에 신문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사설(社說)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에 일축을 가하기라도 하는 듯 작가는 책의 후미에서 '시범시' 라는 신도시를 세웠는데 이 시(市)는 완전한 상상력으로 응집된 공간인데 이 곳에서는 매주 토요일은 방송이 중단되고 삼성, 현대, 검찰청, 국세청 건물이 붕괴된 곳이다. 모든 관공서와 언론사들이 실명으로 공개된 현실적인 글의 바탕에서 이 공간이야 말로 참된 상상력의 공간이다.
이 작품 <능라도에서 생긴 일>은 작가의 기발한 발상과 위험천만한 소재인 '권총' 으로 흥미를 불렀으며 사회적인 규범이나 가치에 대해 독자에게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시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드러내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사회와 현 세태를 꼬집고 비틀어 보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 무거워 독자들로 하여금 지레 겁을 먹게 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대상과 작가의 신념과 의도에 좀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작품 <능라도에서 생긴 일>은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며 훌륭한 소설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간만에, 가뭄에 콩나듯 하는 좋은 작품을 만난 것 같다. 충분히 눈여겨 볼 만한 작가 하나 알게 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