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껏 한국수필의 맥을 이어온 분이라면 단연코 고 피천득씨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여태 그의 저서 하나 제대로 읽은 것이 없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수필 몇 편 읽은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들은 것은 있어, 예나 지금이나 수필하면 '피천득' 하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난 5월, 그의 부고소식은 나에게도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곁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만날 수 없는 것이 이리도 다른 느낌으로 와닿으리라곤 전에 생각지 못했다.  그간 누누이 '그의 수필집 언제 한 번 읽어봐야지, 봐야지....' 하던 것이 결국 그가 떠난 지금에서야 가능하게 됐다.  그것도 이 책 <인연>을 몇 번이나 장바구에 담았다가 뺏다가 담았다가 뺏다 하기를 거듭한 끝에 읽게 된 책이다.  책 한 권 사는 일에 무어 그리 고민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읽힐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제법되는데 '더 이상 책들을 쌓아두어서는 안되겠구나.  이 책들을 다 읽어본 다음에야 읽어보아야지' 하던 찰나, 지인에게 뜻밖의 이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나는 생각보다 일찍(실은 아주 늦은 것이지만) 이 책 <인연>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조그마한 눈의 늙은 피천득씨가 떠올랐다.  그가 작고하며 다룬 인터넷기사에 얹힌 그의 작은 사진.  이 책에는 총 81편의 수필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그의 젊은 시절 주로 쓰여진 수필들이다.  그렇기에 늙은 피천득씨의 모습을 그리며 읽는 것이 다소 무리는 있겠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늙은 피천득씨의 얼굴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수필의 대가인 고 피천득씨의 수필이라고 해서 그의 글이 탁월하다거나 '여느 수필과는 차원이 다르군'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수필은 마치 일기장을 보는 듯 했다.  진솔하고 정직한 한 인간의 일기장과 같은 느낌이랄까.  화려한 미사여구로 휘황찬란하거나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 일부러 감동을 주고자 썼다거나, 잘난 자신을 드러내고자 쓴 글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하는 스승에 대해, 딸 서영이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찬양하던 봄에 대해 그만의 필치로 조용하게 끄적거린 글이었다.  어쩌면 그의 글은 이리도 솔직한 모양새를 하고 있기에, 특별하지 않은, 오히려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기에 더 진한 감동을 주는 게 아닐까?  소위 말해, 문학의 거장이요, 최고봉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학식이나 지식 따위를 자랑하거나 남다른 시각을 드러내기 위한 글들을 써내려 머리를 싸매는 고달픈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친근한 옆 집 아저씨같이 허식이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랑할런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쉼이다.  '이 무슨 의미일까?' '왜 이리 생각하나?' 따지고 견줄 필요도 없이 그저 읽히는 대로 그의 글자들을 따르면 된다.  그렇기에 한 폭의 고즈넉한 수묵화같이 느껴지는게 아닐까?  
 
  이 책은 고 피천득씨의 삶이 그의 수필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딸 서영이에 대한 사랑을 다룬 수필에서는 '우리 아빠도 이렇게 나를 위해 글을 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했다.  필시 아버지의 마음이야 같은 것이 아니겠냐마는 활자로 새겨진 딸에 대한 사랑이 마치 내게 없는 것인냥 부러웠다.  그리고 훌륭한 많은 스승과 지인들을 둔 일로 놀라웠는데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여심 주요섭, 프로이트까지.  그와 인연이 있던 자들이라니....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역시 그 자신만큼이나 훌륭한 지인들과 스승을 두고 있구나 싶었다.  그들 모두 이제는 한 곳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겠지. 
 
  한 편의 따사로운 일상의 기록들을 품고 있는 이 책.  두고 두고 읽고 그를 기리기에 이 보다 좋을 수는 없을 듯 싶다.  문학이라는 것이, 글이라는 것이 이토록 고귀하다.  육신은 사그라들고 말지언정, 그의 정신과 영혼과 숨결은 그 곳 그 자리에 영원하니 말이다.  귀한 인연만큼이나 좋은 책을 전해주신 서유경님께도 다시 감사드린다. 
 


고 피천득씨에게,
이 책의 표지를 봅니다.  진주를 입에 문 조개가 살그머니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우아하고 은은한 빛깔의 아름다운 진주를 뱉아내는 조개....  당신은 조개를 닮았습니다.  
이제는 가고 없지만 우리게 이렇듯 귀한 진주 한 알 남겨두셨으니.  
 
봄을 그토록 찬양하시던 당신, 
잠없는 곳은 천국도 싫다하시던 당신....  
그처럼 당신은 봄에 오시고 봄에 가시었습니다. 
부디 따사로운 바람과 연초록의 새순으로 가득 찬 
싱그럽고 찬란한,
그 봄에 안기어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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