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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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겉으로보나 속으로보나 가볍게 읽는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추리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싱겁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이 책이 주는 분위기가 더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러스트로 된 발랄해 보이는 표지나 평범한(?) 사람의 습작과 같은 문체나....  역시 사람이건 책이건 뭐건 그것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본질의 혼동을 줄만큼 영향력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해설에서도 라이트노벨이라고 당당히(?) 밝힌 것처럼, 정말 그저 편하게 읽으면 될 소설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책은 추리소설이지만 기존의 추리소설처럼 사건을 두고 독자가 함께 추리하며 해결해나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이 아이들의 암호는 과연 어떤 뜻일까?' 정도만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다시말해, 일반적인 예측이나 상식적인 추리가 가능한게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 고바토와 오사나이 둘만의 약속과 같은 암호를 해독하면서 사건이 해결되니 말이다. 
 
  오사나이의 음모로 인해 나름 반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반전이 그리 신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어쩜....  아무리 일본이라지만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되는 아이들이.....'  학생들의 발상이라고 보기에는 참 악랄하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해맑고 귀여운 소녀같은 오사나이에게 어울리지 않을범한 계획적인 음모와 범죄행위에 실망감이 컸다.  마치 마피아들에게나 있을법한 살벌한 고문들도 그렇고.  귀엽고 우스운 '샬로트게임' 하며 여름방학동안 맛있는 먹을거리를 정해놓고 함께 찾아다니며 먹으러 다니는 낭만적인 설정에 가슴이 설렌 만큼 말이다.  나는 순정만화를 기대한 것일까?  극적인 사건을 고바토의 추리에 의해 해결되고 둘 사이의 우정과 진한 감동이 생겨나길 바랬는데....  아니, 풋풋한 사랑을 기대했는데....  그와는 달리 너무나 매몰차게 돌아서는 두 아이의 뒷모습이 씁쓸하게 여겨졌다.  그저 소시민(이 단어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거슬렸다 ^^;;)이 되기위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용하고 이용된 것뿐인 그 둘의 관계.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  뭔가 감동보다는 두 아이의 순수하지 못한 마음에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은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에 이어 가을, 겨울 시리즈로 출간이 될 예정이란다.  애석하게도, 후속작을 기다려 읽고 싶을만큼 재밌거나 매력적이진 않다.  하지만 바라는 점은 있다.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이 작별인사를 주고 받은 두 아이가 좀 더 끈끈한 우정을 갖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필요에 의해서만 함께하는 그런 사이, 그저 사건을 해결하고 추리하는게 재미를 붙인 아이들의 만남 이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뭔가 가슴 훈훈한 감동이 있는 그런 인간적인(!) 이야기 말이다. 
 
  이 여름이 다가기전, 고바토와 오사나이처럼 좋은 친구와 함께 맛있는 파르페 따위를 찾아다니는 일도 참 즐거울 것 같다.  물론 그런 납치극같은 위험한 일은 없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제 파르페를 보면 한동안은 이 이야기가 떠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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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빨래를 훔친 엄마 트롤 - 스웨덴 편 세계의 전래동화 (상상박물관) 2
안나 발렌베리 지음, 욘 바우어 그림, 박인순 옮김, 엄해영 감수 / 상상박물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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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한 편의 장편동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은 단편동화 모음집인데 왕의 빨래를 훔친 엄마 트롤, 마법사의 망토, 왕의 선택, 뒤바뀐 아이, 네 명의 거인 트롤과 어린 목동 페터, 큰 산의 늙은 트롤, 꼬리에 소금이 묻은 까치, 겁 없는 소년 이렇게 8편의 동화다.  트롤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고 명칭인데 우리나라 동화에서 가까운 대상을 찾아보자면 바로 '도깨비' 란다.  그런데 도깨비가 아름답고 예쁠 수는 없겠지만 이 동화의 삽화는 어쩐지 흉칙했다.  트롤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한 그림이라 그런거겠지?  그러나 우리나라 동화의 도깨비는 흉칙하기보다는 익살스러운 구석도 있고 영리한 캐릭터인데.... 여전히 삽화에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중 몇 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솔직히, 점차 이야기의 흥미를 잃어 기억에 남는 것은 앞쪽의 동화 네 편 뿐이다. 
 
  '왕의 빨래를 훔친 엄마트롤' 에서의 엄마트롤은 양심이라곤 없다.  처음 옷을 훔치고 왕실 시녀인 잉가가 누명을 쓰고 쫓겨난 사실에 대해 알고도 또 옷을 훔친다.  누군가의 나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면 반성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같은 짓을 하고 심지어는 잉가에게 그 옷을 보여주기까지 하는 개념없는 짓을 한다.  내가 만약 잉가라면 그 사실을 왕실에 고했을 것이다.  "당신의 옷을 훔친 범인을 알았어요" 하고.  이 책을 읽기 전 혹자는 가슴이 갑갑해지는 책이라고.  나 역시 비슷한 느낌?  
 
  '마법사의 망토'는 한 마법사가 소녀들을 납치하는데 알비다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역시 납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다 망토가 찢어지게 되자 그걸 모른 알비다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망토를 꿰메주게 되는데 그 망토에서는 밤낮 빛이 뿜어져 나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던 마법사는 결국 소녀들을 모두 풀어준다는 내용이다.  내용 자체가 억지스럽다.  마법사가 소녀들을 잡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굳이 우리나라 동화를 읽듯 해석하려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동화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 보면 대개 '나쁜 심정이나 못된 버릇을 가진 아이들이 도깨비에게 잡혀가게 되고 풀려나면 그 행실을 고치게 된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동화를 들으며(혹은 읽으며) '도깨비에게 잡혀가지 않도록 해야돼'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동화는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한다.  동화라면 적어도 이런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 동화에서는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마법사가 망토에서 발하는 빛으로 시달림을 당하는 것과 소녀들을 풀어주는 것에 대한 연관성이 별로 없다.  이를 테면 알비다가 '소녀들을 풀어주면 망토의 실을 풀어주겠다' 라는 대목이 있다면 모를까 단지 망토에서 빛이 나와서 잠을 못이루자 소녀들을 풀어준다는 것은 앞 뒤가 안 맞는다.  소녀들을 풀어주면 망토에서 빛이 안나오나?  그렇다면 마지막 대목에 '마법사가 소녀들을 풀어주자 이상하게도 더 이상 망토에서는 빛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법사는 다시는 아이들을 납치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깊은 잠에 빠졌답니다' 정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지.
 
  '왕의 선택' 이야 말로 가장 한국(?)의 정서에 맞는 동화라 하겠다.  왕좌를 넘겨주기 위해 많은 수상들을 후보삼아 살펴보던 왕이 그 수상들 중 왕좌를 이을 자를 찾게 되는 내용인데 왕이 나무꾼이 되어 수상들에게 도움을 주고 보답하겠다는 수상들에게 식사 초대에 와주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은 일부러 나무꾼의 약속 날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연회를 연다.  결국 수상들은 모두 왕과의 약속에 가고 단 한 명의 수상만이 먼저 약속을 했던 나무꾼의 식사초대에 가게 된다.  결국 왕은 그 수상이 백성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겼기에 나라의 왕으로 뽑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나랏일 하는 사람에게는 백성과 혹은 국민과의 약속이행이 가장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보아서는 이 동화는 교훈 적이고 조화로운 상황의 이야기였다.
 
  '뒤바뀌 아이' 에서는 트롤의 본성에 대해 잘 설명해준 동화였다.  트롤 부부는 자신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인간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바꾼다.  그런데 역시 트롤부부에게서 자라는 인간 아이는 심성이 바르고 착하지만 트롤 아이는 제멋대로이고 말도 듣지 않는 아이로 자란다.  일반적으로 보면 성장환경이나 가정환경이 아이의 성격형성에 큰 좌우를 한다.  그러나 두 아이들이 거의 부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란 것을 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트롤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트롤이라지만, 자신의 자식을 추하게 여기고 인간의 아이를 원하는 트롤 부부의 모습도 이해가 안된다.  
 
  트롤....  우리나라의 도깨비와 비슷하다지만 인간과는 판이하게 다른 트롤, 추하고 악한 트롤에게는 정이 안 갔다.  나는 모든 이야기가 교훈적이어야 하며 전달하는 메세지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유희적 기능, 즉 재미만 가지고 있다고 해도 괜찮다.  그러나 이 재미도 없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동화라면 어쩌자는 것인지.  이 동화가 그 두 가지 기능(교훈적, 유희적)을 완전 상실한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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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주신 눈물
이이지마 나츠키 지음, 임희선 옮김 / 이너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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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신이 주신 눈물>은 평택에서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는데 오랫만에 눈물을 훌쩍이며 읽은 책이다.  때마침 장소가 기차안이라 연신 헛기침을 하며 남몰래 눈가를 훔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오래 전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했던 영화 <편지>가 떠올랐다.  그 영화를 보고도 참 많이 울었는데....  그렇게 보니 닮은 구석이 많네.  불치병이라는 소재와 그리고 떠나는 자가 남는 자에게 남기는 편지....  이 책은 암환자들의 이야기이며 역시 편지글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오오사와 타카오와 이토 미사키 주연의 영화 원작소설이라는데 우리나라에도 개봉했는지, 어떤 이름으로 개봉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이 주신 눈물> 은 암 센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다시말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다.  책을 읽기전 작가소개를 보니 이 작가 이이지마 나츠키는 2002년 5월에 간암판정을 받아 2005년 2월 28일 사망했단다.  이 책은 그가 암을 앓고 있는 당시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글로 쓸 수 있었을까?  참 담대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인생을 정리하는 기회로 삼지 않았을까.  그리고 작가는 프로 윈드서퍼였는데 이 책에서도 암에 걸린 요트선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 소개나 책의 내용을 보았을때 이 작가는 일기를 쓰는 듯한 심정으로 쓰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마 많은 눈물을 흘리며 쓰지 않았을까 싶다.   
 
  등장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장래를 촉망받는 축구선수 유지, 축구 매니저 미호, 암센터 병동의 꼬마 아이짱, 편지센터'heaven'을 운영하는 준이치, 요트선수 노부, 암센터 의사 니노미야정도다.  유지와 노부.  그리고 유지를 향한 변함없는 마음의 미호, 어린 아이지만 작은 감동을 주는 아이짱, 모든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준이치, 암환자를 위한 의사 니노미야, 그리고 그의 진심어린 우정....  이 모든 이야기는 준이치를 통해 말하고 있다.  '~했습니다'하는 식의 경어체의 문장이 죽음 앞에서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야기는 준이치의 입을 빌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곳곳에 등장하는 편지를 통해 각 등장인물의 감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시 편지란 어떤 시점이든 그 시점을 택함으로 갖게되는 문제를 완벽하게 커버해주는 소설 속 좋은 장치인 것 같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노부와 유지가 아닐까 싶다.  노부는 한 쪽 팔을 잃은 요트 선수이자 암도 여러차례 겪은 사람이다.  성격도 강인하고 어찌보면 거칠기까지한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노부의 죽음만큼이나 가슴이 아팠던 건 노부를 향한 니노미야의 우정이었다.  노부만을 위한 'JPN3' 라는 약이나 그의 눈물에서는 정말 나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날카롭고 소위 말해, 까칠한 유지가 죽음으로 다가가며 혼자만으로 가득찼던 세상에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한 시 앞을 모르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의문을 던져주고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로는) 건강한 육신이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교훈적이기도 하다.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는 노부의 모습을, 그리고 완치를 향해가는 사람들에게는 유지의 모습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위로를 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얇팍한 경계를 두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말해주는 한 편의 지도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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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밴드왜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4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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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 책의 소개를 보고 이시이 카츠히토 감독의 <녹차의 맛(茶の味)>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물론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역시 <녹차의 맛>이 떠올랐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등장인물들은 엉뚱한 괴짜 가족들이다.  영화 <녹차의 맛>과 이 책 <도쿄밴드왜건> 은 가족이야기다.  그리고 <녹차의 맛>에 등장하는 자칭 마임 예술가 할아버지와 <도쿄밴드왜건>에 등장하는 전설의 록커라는 가나토 할아버지는 서로 많이 닮았다.  이 밖에도 등장인물들의 느낌들이나 가족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닮았다.  가장 큰 공톰점은 바로 가족들의 평범한 듯 한 일상다반사를 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해지는 잔잔한 감동이다.
 
  나는 책의 띠지를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살포시 솔깃한 띠지의 내용들....  띠지에 새겨진 대로라면 나는 일생일대의 귀한 책을 얻으리라 생각했다.  대절찬에, 모두가 입 모아 호평이라....  음~~  그렇지만 역시 띠지는 띠지일 뿐, 광고일 뿐이라는 것.  이번 역시 느꼈다.  이 책, 나에게 나쁘진 않았지만 솔직히 그리 좋지도 않았다.  음, 아서라!!  니가 오늘 본론부터 너무 섣불리 얘기하는 듯 하구나~
 
  이 이야기에서 새로운 점이 있었다면 죽은 할머니가 가족들 곁에 머물며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점이다.  시점을 보자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인데,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시점이야 그렇지만 그 화자가 '죽은 자' 라는 것이 재미있는 발상이다.  가족(특히, 대가족)의 이야기라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그 집안의 어린아이를 화자로 삼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이야기가 무겁고 진지한 집안이야기가 아니라면 더욱이 그렇다.  익히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이다.  이 작품에서는 옥희의 입을 빌어 이야기들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실제 일어나는 사건들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고 개입되어 있지 않은 죽은 할머니가 화자라는 것이 참 새롭다.  마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읽는 듯 한 어투.  '이 오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이야기 초반부에는 이런 어투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조금 거슬리는 듯 했다.   
 
  그리고 아무리 대가족이라지만 이 책의 등장인물 어찌나 많은지....  책장을 펼치고 쭈욱 나열된 등장인물소개를 보고 '이거 완전 사돈의 팔촌까지 나오려는가보구만' 하고 한 숨.  이야기를 읽으며 한 동안은 앞장을 들추락 들추락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름들은 또 어찌나 비슷한지.  아오에다, 아미에다, 아이코에다....  개인적인 이야기겠지만,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오~ 두렵다.  기억력의 한계라고 봐야할지.  에혀~ 쩝쩝.    
 
  아, 이 가족들~  역시 범상찮구려~!!  전직 록커 할아버지, 미혼모, 아빠없는 딸, 밖에서 낳아온 아들, 가족을 버린 아버지, 여자가 졸졸 따르는 남자, 많은 고양이들....  역시 보통 집안은 아니야.  이 가족들의 참 재밌는 모습은 바로 대화의 모습이었다.  식탁위에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둥 그야말로 대가족다운 대화들이 오간다.  매일 매일을 명절처럼 온 가족이 모여살면 어떨까?  글쎄....  나도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것인지 쉽게 '그거 내가 바라던 바요' 하지는 못하겠다.  그리고 이들의 가훈은 얼마나 재밌는지.  '식사는 가족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게 먹는다(p.15)'  이 가훈은 참 마음에 든다.  우리 가족이 다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일이란 외식을 제외하고는 손에 꼽을 정도니 말이다.     
 
  <도쿄밴드왜건>은 사랑과 치유와 회복의 메세지다.  헌책방을 하는 한 가족들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어떻게 보면 한 가지의 굵직한 이야기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따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실지, 나도 조금 따분했다는.  이 책은 가족들의 많은 사연들을 통해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며 화합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가족을 버렸던 아버지가 노년이 되어 딸와 사위와 손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일, 외국인은 무조건 싫어라하던 남자가 그를 점점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 아버지의 외도에 상처 받았던 딸이 아버지와 여자를 용서하는 일,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던 부모님이 딸을 용서하는 일, 책을 훔쳐갔던 자가 수년이 지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 등 사연이 많고 아픔으로 얼룩진 가족들이 치유되며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을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흥미를 반감하지 않기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연이 많은게 아닐까?  마치 단편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성 싶을 정도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조금 어지러웠다.  그치만 이것이 가족들의 사는 모습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이들의 말을 빌자면 이것이 진정한 러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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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8-0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책 일어야지 하면서 아직도 못본 책 중 하나네요..저는 결혼전에 집에 갈때마다 너무 너무 좋았던게 가족 모두 둘러 앉아 함께 식사할수 있다는 것이였어요.

매우맑음 2007-08-06 16:02   좋아요 0 | URL
가족 모두 둘러앉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참 소중한 일인 것 같아요 ^^
 
렌트
이시다 이라 지음, 최선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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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다 이라의 <잠들지 않는 진주> 를 읽은 뒤로 두 번째 읽은 그의 소설이다.  <잠들지 않는 진주>를 읽기 전, '다소 선정적' 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 책 <렌트>를 읽기 전, '아주 선정적' 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들지 않는 진주>에서 적나라한 성행위가 묘사되었다면 이 책 <렌트>는 변태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책이다.  오로지 그 부분에 대해서만 보자면 <잠들지 않는 진주>는 <렌트>에게 게임이 안된다.  살다 살다 이런 책은 또 처음이다. (아, 처음은 아니군. 에헴)  좀 다르긴 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섹스에 경악한 일이 있으며 슈카와 미나토의 <새빨간 사랑>의 '내 이름은 프랜시스'를 읽고 역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런데 모두 일본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군그래.  일본의 성문화는 정말 이리도 난잡하고 지저분한지.  역시 야동의 교과서같은 나라답다.  뭐 그건 그렇고, 이 책의 수위(?)를 보자면, 절대 절대 비닐포장용이다.  
 
  음....  왜 이 책을 두고 그리를 떨었는지, 이 책을 읽고나니 알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는 '에이~ 뭐 얼마나 그럴라구' 하는 마음 반,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하는 마음 반이었다.  뭐 그저 적나라한 묘사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이 책은 완전 그간의 상식(?)을 뒤엎었다. 
 
  <렌트>와 <잠들지 않는 진주>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욕망과 감정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두 작품에서 그 점을 살펴보자면, 모두 다 남녀가 호텔 로비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체취가 씻기지 않은 상태를 원하는 점, 마지막으로 '노년에도 성욕(사랑)은 있다.' 하는 이시다 이라의 목소리다.  역자 후기를 보면 이시다 이라는 베드신 묘사를 좋아한단다.  그의 이런 면이 훌륭해보인다거나 멋져보이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거야 뭐, 개인취향일수도 있지.  그치만 개인취향이라고 보기에는 <렌트>는 너무나 비정상적이고 난잡한게 아닌지 싶다.  이시다 이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각기 다르고 다양한 형태로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이 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을 말하고자 한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런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서라면 이 소설은 너무나도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이다.  관전(누군가의 행위를 지켜보거나 자신들의 행위를 타인에게 보게 하므로 쾌락을 얻는 것), 동성애, 쓰리썸, 성매매, 가학행위....  많이도 나오는군 그래.       
 
  나는 이시다 이라의 섬세하고 여성스런 감성과 문체, 그리고 그의 표현력을 좋아한다.  <잠들지 않는 진주>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이런 점들 때문이다.  그리고 <렌트> 역시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했다.  그러나 이시다 이라는 왜 이런 글을 쓰는 것일까?  어떤 글을 쓰든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이유는 작가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다 이라가 단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적나라한 글을 써내는 재미에 하는 짓거리라면 언젠가는 그의 글은 쓰레기 이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값비싸고 좋은 그릇이라 한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 이상일 수 없듯이.  솔직히, <렌트>를 읽고 이시다 이라의 성적 취향 또한 의심스럽다.  속된 말로 '이 작가 변태 아니야?' 싶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의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장선우의 <거짓말>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례이다.  혹자는 외설로 단정하고 판정함으로 인해 예술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존중되지 못하며 질이 떨어지게 되며 예술가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하고 혹자는 예술을 빙자한 건전하지 못하고 온건하지 못한 것이야 말로 예술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수요자(관객 내지는 독자가 되겠지)를 교란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책 <렌트> 역시 일본에서는 나오키상 후보작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작품이라 일컫고 또 다른 곳에서는 쓰레기로 칭해지는 이렇게 양분되는 창작물을 판가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그러니 여전히 풀 수 없는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자각에 의해, 지극히 주관적으로 판가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 <렌트>는 인간에게 감추어진 근본적인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다양성을 꺼내어 보이는 일에는 매우 친절했다.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욕망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리고 이시다 이라만의 섬세한 필치로 써내려간 작품이라 반갑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렌트>에 대한 당혹감과 일본인들의 성의식에 대한 의문은 지울 수 없을 듯 싶다.  끝으로, 이 책을 내게 건넨 이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에 대해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나 역시 이렇게 응수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그러게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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