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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빈센트 반 고흐. 나는 그의 그림을 알기도 전에 그의 전기를 읽고 처음 만났다.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미치광이 화가에게 뜻모를 동정과 함께 호기심이 일었다고 해야할까? 그 이후부터 그의 그림들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던 것이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꽤 절묘한 순간에 그를 알았다. 그림하면 맑디 맑은 수채화를 쉽게 떠올리던 그 때, 왠지 모를 투박함과 거칠게 칠해진 물감의 유화들이 슬금슬금 매력적으로 다가오던 그 때, 그의 그림을 보았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그것이 호감이든 호기심이든) 그것을 가까이 하면 친해지듯 나도 고흐와 그렇게 친해졌던 것 같다. 그림을 알지도 못했던 내게 두터운 캔버스를 들이댔던 한 미친 남자가 나는 좋았다. 단순히 그가 미치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알면 알수록 그는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언제나 혼자였던 남자. 아니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일까?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고, 막역한 동생 테오에게마져 씁쓸한 형이 되어야 했고, 유일한 벗이던 고갱과의 큰 싸움으로 절교했으며 압생트에 취해 시력장애를 얻어야 했으며 화상들에게마져 외면당한 화가였다. 그림을 팔지 못하는 화가라는 애달픈 넋두리같은 인생을 살았던 남자다. 그러나 그림은 그를 좌절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림' 으로 그 진저리 나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흐, 그는 그림으로 명성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당대에는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던 외로운 화가였다. 어쩌면 나는 그의 그림보다 그의 기구한 일생이 더욱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소년소녀가장의 눈물겨운 수기를 읽고 마음에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그의 그림 '밤의 테라스(1899)' 가 표지를 장식한 이 책 <고흐를 만나다>는 색다른 미술서적이었다. 고흐와 그의 작품에 관한 책은 적잖이 봐왔지만 대개 당시 작품을 만들던 때의 그의 일화나 그림의 감상과 이해를 돕는 책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와는 아주 다른 느낌의 책이었다.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의 고흐에 관한 시와 고흐 자신이 했던 말들.... 그리고 노경실씨의 단상들이 기록된 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고흐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음.... 뭐랄까? 고흐의 그림이 걸린 작은 방 안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 여느 책들이 고흐와 그의 작품에 대해 백과사전같은 객관화된 정보를 주려한다면 이 책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을 허용하는 책이다. 그림에 관한 정보라고는 소장처와 시기, 작품 사이즈뿐이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고흐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보다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조용하게 그를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데 더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좋았던 점은 수록된 그림들의 색채가 선명했다는 것이다. 고흐 작품의 매력이라면 색채들의 어우러짐과 붓의 터치 아닐까? 그런데 그것이 잘 살아있어 코앞에 대고 보면 마치 물감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림을 비교적 크게 실어 조금 더 자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하나 더 앞서 말한 것처럼, 고흐 자신이 직접했던 말들을 통해 그의 그림 열정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 서울 시립미술관에서는 '반 고흐' 전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이 책을 덮고난 지금, 어서 그곳에 가서 그를 보고 싶어진다. 그는 불멸의 그림으로 남았다. 얼마나 많은 외로운 가슴을 달랠까? 무언가에 미친자들에게 결코 절망은 없노라 말할까? 생을 살게하는 단 하나를 열망하라고 말할까? 그는 그가 낳은 사각의 화폭 안에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 고귀한 한 줄기 빛으로, 영원한 노란빛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