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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이펙트 -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스등 이펙트라는 제목과 '지금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 는 문구때문일까? 나는 이 책이 스릴러 소설인 줄 알았다. 소개를 읽어보고 그제서야 인간심리에 관해 다룬 책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심리에 관련된 책이라는 것은 내게 더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다니? 그게 어떻게 해서 가능하다는거야?' 하는 의문과 함께 이 책을 펼쳤다.
가스등 이펙트가 무엇일까? '가스등 이펙트'란 저자인 로빈스턴 박사가 <가스등(1944)> 이라는 영화에서 착안한 것으로 인간관계의 현상을 명명하는 말인데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조종당하는 현상을 뜻한다. <가스등>이라는 영화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한 남자가 아내의 유산을 빼앗기 위해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그가 보석을 찾기 위해 다락방에 불을 켜면 그로 인해 아내 방의 가스등이 희미해지곤 하는데 아내가 가스등이 흐릿해진다고 할 때면 그는 아내가 미쳐서 환각을 보게 되는 거라며 미친 여자 취급을 한다. 결국 아내는 자신을 잃고 남편이 주입한 대로 미친 여자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다. 사회나 집단에 속해 있는 이상. 엄밀히 말해, 둘 이상의 인간관계에 속해 있는 이상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설사 그가 의도적으로 은둔이나 칩거를 통해 스스로에게서 사회와 타인을 단절시켜 고립을 꾀할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인간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영향을 받는지, 관계에 속한 존재인지 하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는 타인의 기대와 사고와 생활방식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수정해나가는 건설적인 영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버리고 상대에게 무조건적으로 맞추려 하는데서 오는 갈등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영향을 입어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거나 생활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가스등 이펙트를 경고하고 스스로 진단해 보고 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읽는 내내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타인으로 인해 소신없이 살거나 그로인해 고통을 겪는 등 삶이 피폐해지는 일을 겪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가스등 이펙트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나의 주변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주었음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례들에 큰 공감이 갔다. 그 중 몇 몇 사례들은 내게 일어났거나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대화가 참으로 현실적이었고 충분히 이해가능한(공감가능한)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저자의 연구생활동안의 조종자와 피조종자의 실례이기도 하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야 말로 가스등 이펙트에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실지 뜨끔했는데, 나 역시 인간관계에 있어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제로 한 양보, 배려, 인내가 가장 값진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참으면 돼', '내가 맞추면 돼', '나보다는 당신을 먼저 생각하면 돼', '당신을 위해서는 내가 원치 않는 것도 할 수 있어' 라는 태도야말로 언쟁을 잠재울 수 있고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시키는 바람직한 자세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칫 잘못하면 관계속에서 오로지 상대방만 존재하게 되거나 그로 인한 갈등과 고통에 빠지기 쉽다는 설명이었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에 있어 타협이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전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되었다. 또 타인에게 혹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위해 혹은 그의 이해범주 안에 머무르기 위해 아니면 아량이 넓고 이해심이 넓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내 생각은 달라' 라는 목밖으로 끄집어 내지 않는 일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그리고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에서 이 책은 내게 참으로 훌륭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다.
첫째, 가스등 이펙트에 벗어나기(혹은 빠지지 않기) 위한 대안들이 효과적인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사실 예문으로 제시해 놓은대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타인에게 더한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현상의 특성상 관계의 악화는 피해자에게는 더 큰 절망감을 줄 것이다.
둘째, 인간관계에 따르는 갈등들 속에서 어느 한 쪽을 가해자로 어느 쪽은 피해자로 단정짓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책대로라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상은 모두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책에서 말한 가해자에게는 피해자가 도리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르기에 몰이해와 불용, 행동과 의견의 차이를 지닌 관계를 굳이 피해를 주는 자 받는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까 말이다. 도리어 책에서 밝혔듯이 조종자, 피조종자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온당하게 아닐까?
셋째, '나는 소중해' 가 아니라 '나만 소중해'를 심어주고 있지는 않는가? 이 책의 포커스는 분명 '나는 소중해' 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러나 이 책은 완전히 자아를 상실해 그것이 삶에서 고통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자아존중감을 심어주는데만 급급하다 보니 '나만 소중해' 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라.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는 대상이라고 하여 무조건 '나'만을 주장해서는 안될 일이다. 도리어 역지사지의 순간이 더욱 많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타인으로 인하여 심하게 고통받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자들에게 치료를 목적으로 한 책이라면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내용 역시 타인과의 견해와 입장차이를 조율 조정하여 윤택한 인간관계를 위한 조언보다는 타인의 요구와 강요에 끌려가지 않고 항상 내가 옳다는 신념을 갖게하는 등, 진단과 치료의 기능이 컸던 것 같다.
몇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짚어보았지만 역시 이 책은 읽을만했고 인간관계에 절망한 자들에게, 자아존중감이 필요한 자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로운 존재이며 타인으로 하여금 함부로 취급받아서는 안될 귀한 사람인지 생각해 보라!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위해 그동안 숨겨왔던 목소리를 내보라! 더 이상 그 상처 속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당당히 박차고 나와 자신을 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