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시집 범우문고 44
김병연(김삿갓) 지음 / 범우사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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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삿갓.  참 귀익은 이름이다.  어린 시절, TV에서는 많은 소녀팬들에게 오빠라 불리우던 홍서범씨가 '김삿갓~  김삿갓~  나는 좋아~  김삿갓~' 하며 그를 노래했었고 그 때의 나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었다.  당시에는 그의 이름과 삿갓을 쓴 한 남자라는 것 외에는 아는게 없었다.  오랜 동무처럼 친근한 이름의 이 남자가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보다는 흥겨운 리듬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것만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학창시절을 보내며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역시 그는 나에게 독특한 별칭을 가진 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김삿갓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이청의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을 읽고서 였는데 이 책은 김삿갓의 일생을 소설화한 작품이었다.  다름 아닌 이 책에서 처음 읽은 그의 시는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그 시는 바로 김삿갓이 주막에서 지은 시로 '죽 한 그릇' 이라고 알려진 시다.

  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네 다리 소나무 밥상에 올려놓은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徘徊 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오락가락하는구나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주인 양반 무안해하지 마오 
  吾愛靑山到水來 오애청산도수래 청산이 물에 비치니 그 아니 좋소 

  이 시는 나에게 김삿갓이 누구인지 모조리 고해주는 한 편의 시였다.  죽에 어찌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오락가락했을까?  이는 필시 주인이 내 놓은 사발에는 건더기도 없거니와 무르기가 국과 같은 멀건 죽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든 것도 없는 것을 죽이라고 내어 놓은 주인에게 '무안해 하지 마세요.  죽에 푸른 산이 비치니 좋은걸요' 하며 주인양반을 위로하는 장면이다.  가진 것 없지만 차려 내놓은 주인 양반의 따스한 인정,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드는 소박하고 따스한 김삿갓의 모습.  그리고 '죽 그릇에 청산이 비치는 좋기만 하다' 는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와 자연을 벗삼아 살며 그것을 발견하고 느낄 줄 아는 풍요로운 마음에 크게 감동 했었다.  그게 김삿갓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을 읽고나서 '곧장 김삿갓의 시들을 읽어보아야지' 했던 것이 이제서야 되었다.  참 오래도 걸렸다.

  이 시집을 읽고, 나는 정말이지 행복했다.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김삿갓이라는 시인을 알 수 있어서 , 그의 시를 읽을 수가 있다는게 정말 행복했다.  김삿갓의 시는 풍자와 해학이 살아있다.  그리고 자연을 떠도는 방랑객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이 시인 김삿갓이 천하를 집삼아 떠돌아 다닌 걸인이었기에 이런 시들을 지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팔도강산을 떠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재치와 유머를 익혔을 것이고 달 보고 산 보고 흐르는 물을 보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심이 일었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김삿갓은 영민하다.  기생과 또 스님과 주거니 받거니 겨룬 시에서 그의 순발력과 재치를 알 수 있었고 정해진 시제나 즉흥시와 하나의 운으로 지은 시들의 빼어난 솜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훈장에게 시로 응수하는 장면에서는 자신만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가슴시린 삶, 배고픈 방랑시절을 견뎌왔던 것은 조상에 대한 속죄의 의미였으리라.  하지만 여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처자식을 버리고 천하를 유랑하는 모습이 야속하기도 하였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반역자 김익순을 꾸짖는 시로 장원 급제했으나 그 김익순이라는 자가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충격으로 천하를 집삼아 떠도는 신세가 되다니.  자신의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영예로운 이름을 얻으나 그것을 뿌리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니.  마치 한 편의 통속소설같은 삶을 살다간 방랑시인, 김삿갓.

  가슴의 한이 그를 떠돌이로 만들었고 밤 하늘의 달과 별, 푸른 숲과 나무와 바람이 그에게 시를 발견하게 했으며 마주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 시를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끝내 김삿갓, 김병연을 지탱케 했으리라.  내 가능만 하다면 그와 만나 술상을 봐놓고 오랜 벗처럼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라.  삿갓쓴 방랑시인 김삿갓에게 시 한 수 바친다.  

  삿갓시인, 김병연

   바람따라 
   물길따라 
   산길따라 
   떠돌다 

   발 닿는 곳에서 
   밥 한 숟갈 얻어먹고 
   눈 닿는 곳에서 
   눌 자리 찾누나. 

   배고픔이 컸으련만 
   주리지 않았고 
   가슴 한이 깊었건만 
   넘어지지 않았도다. 

   달빛에 몸을 씻고 
   청산에 맘을 씻어 
   술 한 상 받아놓고 
   별들을 올라 보니 
   찬란한 그 빛깔  
   고웁기도 하구나.

   삼킬 것은 술 뿐이오 
   뱉을 것은 시 뿐이니 
   천하를 떠돌던 
   그 기운이 예 서려 
   마음 한 올 쉼 모른채
   이 곳 저 곳 누비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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