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의 규방철학 바리에테 4
D.A.F. 사드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끝에 실려있는 가라타니 고진이 쓴 작품 해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사드를 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것은 접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드의 저작이라곤 거의 이 한 권만을 꼽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토록 흔하게 인용하곤 있지만 정작 온전하게 접하진 못하고 있는 사드라는 인간과 그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야할 것인지, 다시 묻는 것은 썩 온당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너무 자주 행해져 왔기 때문이다. 

[규방철학]은 역자의 말과 [규방철학] 본편,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방철학] 본편 안에는 '프랑스인이여,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조금만 더 노력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실려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밀고 당김과 역전되는 역할극에 대한 예술적인 경지의 가학-피가학적 광경 보다는 선생들의 교육을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행동들을 본능적으로 수행하는 으제니의 고분고분한 모습이 사디즘의 순진했던 고전시대를 느끼게 만드는데 사드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당시 문학양식 특유의 장식적이고도 장황한 설명으로 이뤄져 있는 소책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으로도 짐작 가능하거니와 끼울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접합을 연구하며 묘사되는 난교의 풍경들이 양념 치듯 간간이 나오는 반면 상대적으로 도덕과 이성에 대한 사드 자신의 이론들이 현란한 수사의 장광설로 펼쳐지는 이 책의 흐름은 다분히 정치적인 사드 자신의 사상에 대한 개인적 욕구가 반영되어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글이 보여주는 자유는 현학적이고도 거침없는 상상의 영역과 동의어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혐오할 수밖에 없는 영역의 행위에 쾌락의 왕관을 씌워서 온갖 수사를 동원해가며 호들갑스럽게 찬사를 퍼붓는다. 그 방법론이 되려 과장과 망상으로 이뤄진 일종의 독임을 알아챈 이들은 과장스럽게 구축된 혼돈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쾌락을 통해 찾아내려 하는 사드가 일종의 골방혁명가였음을 간파해냈다. 그의 혼돈은 실로 혼돈 그 자체이며 그 도발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이론적인 설명의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은 예리하다. 과연 지고의 가치인 '쾌락'을 어떻게 해야 이론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쾌락은 플라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로 설명되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충분히 천박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노골적이며 끈적이는 타액과 타액의 교환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하는 세계다. 개구리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뭐가 다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끈적거리고 금기투성이며 궁극적으론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는 작업이었기에 사드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구속된 상태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의 글들은 지하를 통해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까지 광기에 절은 풍경에 천착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실상 현실은 이미 사드의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였기 때문이리라. 혁명으로 인해 구체계가 부숴지고 로베스피에르의 압제가 날뛰던 세계. 로코코풍의 부패한 일탈들과 권력에 의한 민중의 도륙, 그리고 민중에 의한 권력의 도륙이 마구 뒤엉켰던 시대. 그의 글이 아직도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폭력의 광경들이 말그대로 혼돈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경험들의 댓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나온 이 번역판은 말그대로 완역본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사드의 원저작을 삭제 없이 그대로 뽑아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 문학 전공자인 역자의 꼼꼼한 태도는 이 소설을 하나의 두툼한 풍속 및 문학사전으로 보이게 만들어놓을 정도로 풍부한 주석과 해설로 채워놓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현상 그 자체인 사드의 저작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리라. 그래서 별이 하나가 부족한 까닭은 사드라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영원히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사람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끝없는 고통 끝에 스스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들은 비로소 울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냉소적으로, 약간의 자만심을 섞은 웃음과 함께 뱉곤 한다. 어른이 되고 성숙해진 거다, 너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결국 세상과 인간은 다 똑같은 거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부여된 고통에게 악의라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악의가 바라 마지 않은 결과가 아닐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삶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 너는 틀렸다 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리고 그 어려움 만큼 무감해져야 했던 그들의 말 또한 두터운 진실들을 담고 있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외피를 차가운 철갑으로 두르게 된 것에 대해서 비난하고픈 마음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겪어야 했던 것들의 가혹함은 그들에게 건낼 수 있는 비판과 충고의 효력을 현저히 무너뜨린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런 식으로 차츰차츰, 우리는 늙어가면서 점점 교활해지고 무디어져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 보내고 있는 이 한 생애 동안 충분할 정도의 폭력과 냉소와 자기모멸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이 짧지만 깊숙이 파고드는 몽상과도 같은 동화는 그들의 이야기, 아니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기적인 고양이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강렬한 공명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우리들이 여기서 삶에 대한 슬픈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환생과 경험을 거듭하는 고양이, 타인의 사랑을 모르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이 뻔뻔스러운 고양이는 명백히 에고이스트이며 더없이 이기적으로 진화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명한 작가는 섣불리 이 고양이에게 어리석다든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든지 하는 작가적 결론 같은 걸 내리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고양이가 겪어야 하는 조용한 운명의 흐름뿐이다.

 

마침내 고양이는 단 한 번, 구원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너무 오랜 시간 끝에 부여된 이 마지막 경험의 끝에서 고양이는 비로소 냉소적으로 웃지 않고 슬프게 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예정된 우울과 묵직한 평온함이 공존하는 이 마지막은 슬픔을 몰랐기에 슬퍼해야 했던 고양이를 향해 '드디어' 라고,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렇게 동화는 그들, 혹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꿈꾸게 만든다. 달콤하고 잔인하지만 더없이 소중한 그런 구원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트라 헤븐 Ultra Heaven 2
코이케 게이치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윌리엄 버로우즈와 [클락웍 오렌지]가 적절하게 섞인 때깔 좋은 칵테일. [벌거벗은 점심]의 성긴 맛을 좀 덜고, [클락웍 오렌지]에서의 세련된 감각과 디스토피아적 풍경들을 흡수해낸 코이케 케이이치의 [울트라헤븐]은 우리가 지금, 2000년대에 들어서서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싸이키델릭 코믹이라고 부를만 하다.

배경은 아주 멀지만은 않은 미래. 인간의 생활엔 약물이 깊숙하게 들어와서 감정과 기분, 상태 같은 걸 약물 한방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인간의 정신세계마저도 인스턴트화된 세상. 이런 세상에서 주인공 카브 역시 약에 쩔어 사는 인간군상 중 한명이다. 약에 취해 잠들고 약에 취해 깨고 하는 생활 속에서 카브는 어느 날 이상한 중국계 남자에게서 받은 약을 통해 꿈과 현실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초강력 드럭 울트라헤븐인가. 약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후유증을 겪는 카브는 결국 자신의 의식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보기로 결심한다.

1960년대, 히피즘의 창궐과 함께 드럭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 영향받은 싸이키델릭 음악이 비틀즈와 도어즈, 제퍼슨 에어플레인 등등의 걸물들에 의해 시도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팝아트와 같은 미술 분야와 코믹북과 앨범 쟈켓을 중심으로 한 서브컬쳐 쪽에서도 싸이키델릭적 시도들이 감행되기 시작했다. 곡선을 중시하는 컷분할과 씬, 디자인들, 부서진 경계, 모호한 이미지들과 지나칠 정도로 집중된 이미지들의 극단적 대립 등등 환각상태에 있는 이들이 겪는 이미지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정체성을 삼았던 작업들. [울트라헤븐]은 그런 이미지들의 충실한 적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환각상태의 풍경들을 다루고 있다. 다각화되고 분산되는 이미지들과 끊임없이 회전하는 플롯. 물론 꿈과 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이 흐름에서 이제는 지겹게 접해본 뻔한 도가적 풍경과 결말을 의심하지 않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아직 2권까지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울트라헤븐]은 뻔한 결론에 대한 의식적인 회피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익숙하지만 흥미로운 장치로 보여준다. 그것은 진화에 대한 문제제기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이와 가장 비슷한 작업의 결과물을 찾으라면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그래픽노블 정도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코이케 케이이치가 여기서 보여주는 광경은 낯설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풍경들이다. 마블코믹스에서 일했던 경력에서 예상가능하듯이 코이케 케이이치의 작화는 단단한 데셍과 인체비례에 바탕을 둔 아메리칸 코믹스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리고 그 치밀한 작화는 환각상태의 풍경들을 그려내는데 모든 것을 집중한다. 드럭은 함유물과 화학반응 외엔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제재다. 그것은 경험experience 그 자체와도 같다. 그렇게 코이케 케이이치는 [울트라헤븐]을 말그대로 '울트라헤븐'으로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개 2005-11-01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으로.....^^
 
제브라맨 5
야마다 레이지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세상은 바꿀 수 있다. 좀 바꿔보자 새퀴들아!'

야마다 레이지는 언제나 저렇게 외친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경파'라는 작가에 대한 일각의 코멘트처럼 그 외침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왔다. 그것은 작가적 측면에서의 실패로도 귀결됐다. 연재는 안 이뤄지고 스스로는 지독한 슬럼프의 나날을 보내게 됐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일까 나일까. 그 시점에서, 쿠도 칸쿠로우가 쓴 각본 [제브라맨]이 들어오게 된다. 주제는 확실히 야마다 취향이니까, 라던 편집장의 코멘트. 그러나 야마다 레이지는 쿠도 칸쿠로우의 각본이 가진 트렌디함과 희망만 있으면 결말은 다 된다 라는 원본의 주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을 내 만화로 만들어보이겠다, 이것이 야마다 레이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5권 완결. 과연 야마다 레이지는 자신의 목적을 이뤄냈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다.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 해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마법이나 초능력이 없어도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영웅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제브라맨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뻔한 얘기라고? 물론 뻔한 얘기다. 뻔한 주제다. 그러나 [제브라맨]은 그 뻔한 이야기를 커다란 공명으로 퍼지게 만드는 만화다. 그것은 작가의 삶과 맞닿은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자장이기도 하고 또한 [제브라맨]의 시대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받는 경험과도 공명하는 이야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동서고금의 선현들이 만들어낸 잠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잊고 지낸다. 가끔씩 생각나면 이렇게 얘기한다. '뭐야, 그런 뻔한 얘기. 뻔하잖아.' 심지어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라는 법칙은 법으로나 DNA적으로나 새겨져 있는 금언이지만 우리는 때로는 사람을 죽인다. 무엇이 그 단순명료한 진리를 거부하게 만들었는가. [제브라맨]은 그 구조의 틈을 자극하는 만화다. 평범한 사람이 영웅일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을 잿빛으로 만드는 것은 악당이나 괴물이 아니다. 그레이라 불리우는 그 회빛 또한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안이하고, 소소한 욕구를 가진 우리들이. 무의식적인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내는 잿빛 세상. 그렇다고 [제브라맨]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도덕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관용의 시선, 용서하고 더 나은 현실을 만들 수 있는 의지를 가져달라고 하는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 마음을 제발 한 명이라도 더 가져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5권 뒷쪽엔 본편인 [제브라맨]의 변주인 단편 [제브라퀸]과 [펭귄사냥]이 실려있으며 작가의 또다른 작품인 [절망에 효과적인 약]에 실린 쿠도 칸쿠로우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브라퀸]은 상당히 매력적인 단편이며 쿠도 칸쿠로우를 다룬 단편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극작가인 쿠도칸에 대한 쓸만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참고.

관련 포스트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69877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가본드 2005-11-07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납니다..ㅋㅋ 리뷰만으로도 감동먹었습니다.. 제브라맨 엄청 좋아합니다
제가 만화를 좋아하는데 평론의 수준과 책에대한 지식의 범위나.. 나이차가 좀 나는듯 하군유..(20살입니다) 바빠서 횡설수설.. 감동에 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ㅋ
다른글도 감사하게 읽겠습니다 ^^

hallonin 2005-11-0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까지.... 뭔가 얻어가셨으면 잘 된 거죠.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창비시선 248
이기인 지음 / 창비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에 대해서 리뷰를 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꽤 곤혹스러운 얘기다. 대체 시라는 것을, 주절주절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긴 있는 건가? 시라는 것은 아주 너무 대단히 진부한 설명이지만 (쌍팔년도 삘로)결국 삘링 아닌가... 라는 어줍잖은 의식 덕분에 언제나 시집 뒤에 붙는 설명들은 언어영역 시험문제의 문제풀이 답안지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에 대한 진정한 비평은 뭐, 조선시대 한량들이 누렸던 풍류에 대한 소망도 있거니와, 그에 바치는, 혹은 그에 대항하는 시로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지금 이런 설명을 주루루 쓰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말은 그렇게해도 아직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 헐.

이기인이 낸 이 시집, [알쏭달쏭 소녀 백과사전]이란 제목은 대단히 팝적이다. 그 제목에선 의미적 해독을 치뤄낸다 하더라도, 혹은 그런 의미적 해독까지 포함해서라도 시부야케 프렌치팝 계열의 노래 제목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달콤함이며 색다름이고 몽환적 발랄함과 함께 적절한 우울함을 갖춘 양산형 보사노바의 리듬과도 같다. 그 발랄일탈스러울지도 모를 감각에 대한 기대감이 이 이 시집을 골라 보게 된 이유였다.

고백하지만, 난 시집을 거의 안 본다. 시 자체를 잘 안 읽는 편이다. 뻔한 독자다. 그 뻔한 독자가 읽은 이기인의 첫시집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앞서 말했듯 제목이 전해주는 자장, 뻔한 표현으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는 감각은 역설적으로 작품들 안에선 말끔히 거세되어 있다. 작가는 인용이나 패러디, 문자 놀음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유희심을 잊어먹은 건 아니지만 화려하지도, 건조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게 짜여진 문장들로 구성된 이 매력적인 시어들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결국 현실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가혹하고 폭력적인 현실. 이 노래들엔 프렌치팝이 들려주는 달콤함 따윈 없다. 그러니까 제목은 속임수, 혹은 일종의 아우라다. 잔인한 현실에 대한 독한 반추로서의 꿀과도 같다.

공장의 소녀들과 죄수,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들의 독백들. 이 시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흐름은 끊임없이 뭉쳐지지 않는 심상의 분해를 추구하며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과 성적인 도발이 느슨하고 평온한 풍경과 달콤한 시어들과 함께 공존한다. 시 속에서 소녀는 쇳가루를 씹어야 하고 제비는 흰 농약과 같은 문장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시어들은 제목이 당당하게 천명하고 있는 솜사탕 간판과는 정반대로 쉼없이 달아나는 것처럼 잡힐 듯 하면서도 잡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해설자가 말한 것처럼 죄의식으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일까 아니면 작가가 밝힌 것처럼 전략적인 모색의 결과인 것일까. 불안하고 완성되지 않는, 그러나 그래서 매혹적인.

그러니 별이 네 개인 것은 순전히 나의 머뭇거림의 결과인 것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