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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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영원히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사람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끝없는 고통 끝에 스스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들은 비로소 울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냉소적으로, 약간의 자만심을 섞은 웃음과 함께 뱉곤 한다. 어른이 되고 성숙해진 거다, 너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결국 세상과 인간은 다 똑같은 거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부여된 고통에게 악의라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악의가 바라 마지 않은 결과가 아닐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삶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 너는 틀렸다 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리고 그 어려움 만큼 무감해져야 했던 그들의 말 또한 두터운 진실들을 담고 있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외피를 차가운 철갑으로 두르게 된 것에 대해서 비난하고픈 마음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겪어야 했던 것들의 가혹함은 그들에게 건낼 수 있는 비판과 충고의 효력을 현저히 무너뜨린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런 식으로 차츰차츰, 우리는 늙어가면서 점점 교활해지고 무디어져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 보내고 있는 이 한 생애 동안 충분할 정도의 폭력과 냉소와 자기모멸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이 짧지만 깊숙이 파고드는 몽상과도 같은 동화는 그들의 이야기, 아니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기적인 고양이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강렬한 공명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우리들이 여기서 삶에 대한 슬픈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환생과 경험을 거듭하는 고양이, 타인의 사랑을 모르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이 뻔뻔스러운 고양이는 명백히 에고이스트이며 더없이 이기적으로 진화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명한 작가는 섣불리 이 고양이에게 어리석다든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든지 하는 작가적 결론 같은 걸 내리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고양이가 겪어야 하는 조용한 운명의 흐름뿐이다.

 

마침내 고양이는 단 한 번, 구원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너무 오랜 시간 끝에 부여된 이 마지막 경험의 끝에서 고양이는 비로소 냉소적으로 웃지 않고 슬프게 우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예정된 우울과 묵직한 평온함이 공존하는 이 마지막은 슬픔을 몰랐기에 슬퍼해야 했던 고양이를 향해 '드디어' 라고,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렇게 동화는 그들, 혹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꿈꾸게 만든다. 달콤하고 잔인하지만 더없이 소중한 그런 구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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