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 20세기신학거장들의자서전
위르겐 몰트만 / 한들출판사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이라 이름하는 20세기 신학의 거장. 그의 70회 생일을 맞아 내노라하는 동시대의 신학 거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대신학자들. 에베하르트 윙엘, 도로테 죌레, 요한 밥티스트 메츠, 엘리자베트 몰트만-벤델, 필립 포터, 한스 큉. 뭐라고 이름을 붙인들 그들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할 듯 싶다. 이들이 몰트만의 70회 생일에 모여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무엇이 자신들의 신학을 방향지었고,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한 사람씩 돌아가며 고백하였다. 이 세미나의 결과물이 바로 <나는 어떻게...>이다. 세미나에 나선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시대의 아픔, 그리고 그 아픔을 어떻게 짊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통스러운 고민을 이야기한다.

윙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또한 반면에 스탈린주의 사회 안에서 자유를 말하여도 처벌받지 않는 장소로 카바레와 교회를 발견한 것이 그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 가운데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증언하는 이들에게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기대게 되었다. 몰트만은 공군 지원단의 일원으로 고사포 부대원이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의 동료들이 다 죽고 자신만 살게 되었다. 이날 밤에 처음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에게 외쳤다.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들끓던 관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몰트만을 동요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바르멘 신학선언을 초안하며 독일고백교회 운동을 이끌었다. 도로테 죌레 역시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지적한다. 어떻게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 어째서 그 이전의 신학과 똑같을 수 있는지 죌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가르텐을 통해 개념을 바꾸는 용기와 다시 질문하는 법, 역설적으로 되묻는 법을 배웠다.

메츠 역시 아우슈비츠의 재앙으로 얼룩진 역사를, 어째서 신학이 그러한 재앙을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지에 깊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겪게 되었던 바닥공동체 생활이 그를 변화시켰다. 그라이나허는 월요일에 정치적인 사회에서 더 많은 정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일요일에 강단에서 자유, 평등, 우애, 정의와 후원에 대해 설교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끊임없이 반추한 개념은 예언자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변함없이 예언자가 필요하며, 예언자적 운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난 시대 속에서 끝나버린 역사가 아니다. 필립 포터 역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의 상황-context-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해야 했다. 11살부터 식민 통치에 대해 반기를 들어야 했던 포터는 성서 본문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 교회의 역사, 여러 세기를 지나온 교회의 역사, 그리고 이 세계의 역사와 그 현실의 상황 안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역사는 어떠한가?
근대사만 돌아보아도 외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식민의 상태에서 일제에 부역하던 자들, 친일파는 지금도 사회의 지도층이다. 전쟁을 겪어야 했다. 곳곳에서 학살이 있었고, 말로 할 수 없는 참상들을 지금까지 꺼내 놓을 수도 없었다. 긴긴 독재의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설핏 민주화되었다는 요즘.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근대사 내내 똑같았다. 식민 침략과 전쟁과 독재, 민주화에도 우리 신학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고 상황은 바뀌는데 그 지평은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아우슈비츠를 겪고 나서도 변함없는 그 신학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무엇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냉정하게 버림받고 있는 기독교. 나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 디자인 나쁜 디자인 - 로고에서 웹디자인까지
로빈 윌리암스 & 존 톨렛 지음, 배진수 옮김 / 비비컴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웹 디자인이건 인쇄 디자인이건 좋은 디자인을 가르는 몇 가지 기준들이 있다. 통일이라든지, 균형, 대비 같은 요소들을 항상 머릿속에 넣어 두고 디자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디자인이 조잡해지거나 쓸데없이 산만해진다.

이 책의 장점은 많다. 우선, 맨 앞장에 나오는 개념들에 대한 질문은 읽는 사람을 난처하게 하지만, 그간 이것저것을 만들면서 왜 그렇게 하는지 묻지 않고 습관적으로 해 왔던 것들에 대해 되짚어보게 한다. 왜 디자인이 촌스럽게 보이는지, 전형적인 디자인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다섯 가지 이상을 짚어 내라는 저자의 요구는 디자인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는 질문들이었다. 그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면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의 디자인이라는 책을 먼저 읽으라나. 물론 무시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이 책의 장점은 여기에서 더 돋보인다. 클립아트, 사진, 강한 시각적인 효과, 로고, 명함, 청구서, 광고, 옥외광고, 차례와 색인, 회보와 브로셔, 광고 전단, 웹 사이트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이 쓰일만한 곳은 다 짚고 넘어간다. 어떻게 디자인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인지 나쁜 디자인인지를 실제 디자인을 보여주면서 설명한다. 하나의 사진을 놓고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해보며 시도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거쳐 어떻게 훌륭한 디자인의 결과물이 나오는지를 보여 준다.

매 장마다 작업이 끝난 후에는 그 장에 관련된 워크샵 질문들을 '참고'라는 이름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책의 표지를 어떻게 디자인했는지 설명해 주는 뒷부분이었다.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요소들을 도입하고, 어떻게 변형해서 표지의 모습이 나왔는지를 구석구석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것과는 무관한 책이다. 어떻게 만든 것이 더 사람들의 관심과 눈길을 끌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디자이너가 먼저 습득해야 할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인지 나쁜 디자인지를 알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볼 만한 참고서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좋은 디자인...>은 대비, 반복, 정렬, 근접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어떤 디자인이건 4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갖추어져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눈에 띄는 요소들을 만들어 나간다면 그 디자인은 성공한 디자인이라고 제시해 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지음, 김경숙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되어간다. 우리 나라에서 유독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 요즘 들어 존 그레이의 시리즈물들을 보며 얼른 읽어야 할 텐데 하다가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며 진지한 자세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을 읽고 나서 여자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전부터 다르다는 것을 어슴푸레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화성에서...>를 통해 비로소 어떤 것이 어떻게 틀린 것인지가 분명해졌다.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 멜 깁슨이 연기한 닉처럼 여성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바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인지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점점 소극적으로 변화해 가면서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결국 이혼 직전 혹은 결별 직전에 이르게 되고, 뭔가 극적인 계기가 없다면 그 관계는 끝나고 말 것이다.

이 책은 목적과 용도는 분명하다. 남녀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 본래 서로 다른 출생 성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이 목적을 위해 세운 대전제는 이렇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것.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할 것. 그리고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 것.

다른 점들을 말하는 방식과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세세하게 묘사한다. 화성인(남성)들의 언어는 정보를 전달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뿐이지, 말 속에 다른 의미들을 담고 있지 않다. 감정을 표현하는 말일 경우에 특히 금성인(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데 느낀 그대로를 말하기 때문이다. 금성인들의 언어는 이중적 의미일 경우가 많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금성인들은 말 속에 정보보다는 감정 또는 마음을 더 담고 있다는 것이다. 화성인들은 금성인들의 말을 정보로써 받아들이기 때문에 숱한 오해를 하게 되며, 금성인들은 화성인들의 정보만을 전달하는 말 때문에 극심한 상처에 시달리게 된다. 스트레스를 대하는 방식에서 있어서 화성인들은 동굴에 들어간다고 존 그레이는 표현한다.

화성인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옆에 와서 왜 그러냐고 묻는 것 대신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함께 사는 금성인으로서는 불쾌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 회의가 들기도 하겠지만, 화성인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반면 금성인은 누군가에게 자기 문제를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이야기를 화성인이 듣게 되면 마치 자신에 대한 비난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금성인들은 한바탕 자기 이야기를 해 놓고 나면 금방 기분이 나아진다. 이때, 화성인이 해야할 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가끔 맞장구를 쳐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계 악화는 이러한 서로의 차이를 잊게 될 때 시작한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과 나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라고 저자는 줄곧, 때때로 지루할 정도로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 책은 남자와 여자의 1:1 관계,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면, 왜 남녀간의 그런 차이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원인은 알지 못한 채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남녀가 생겨난 이후부터 계속 지금까지 쭉 이런 방식의 차이가 존재했다고만 서술하고 있다. 남녀간의 차이가 무엇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남녀간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려는 열심 정도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단점은 가정을 넘어선 이웃, 직장, 사회에서 남녀 관계에 대한 고찰의 부족이다. 물론 가정 안에서, 1:1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도 해야할 말이 무척이나 많겠지만, 여전히 구조적인 문제들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의 미덕은 차이를 인정하는 법에 대해 확신있게 설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는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자 다른 사람과의 구별, 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인간의 문제, 그것은 모두가 연루되는 치사한 문제이다<역사의 한 페이지 中>. 이 세상 하늘 아래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연루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이 관계에는 한 두명의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연루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치사한 문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기형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적당한 말이 없는<본능의 기쁨 中>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풀어가는 인간이란 참 딱한 존재이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의 도움을 통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늘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만이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존재라고 여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 속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로맹 가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엮어가고 있다. 열 여섯 편의 단편들은 제각각 다르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파괴적이고 몰인정하고 극단적 이기주의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로맹 가리는 집을 나선 한 여인의 수모와 몰락을 다루고 있다. 그 여인은 모욕을 감당할 길이 없어 바다로 달려가다가 목숨은 부지하지만, 자신이 당한 모욕으로 끊임없이 몸서리를 치며 괴로워한다.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 끝끝내 죽음을 향해 가면서 생명을 조금씩 연장해 가긴 하지만 실상은 날마다 자신이 받았던 모욕을 되새기거나, 새로운 모욕을 만들어낸다.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이러한 모욕의 메커니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가짜>에서 등장하는 인간은 또 어떤가? 고귀한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을 둘러싸고 진위 논쟁이 벌어지다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살아있는 작품(?)이 사실은 위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이라는 별로 깨끗하지 못한 존재에게 예술 작품의 진위가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가짜는 다 불살라버린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살갗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거짓으로 도배되어 있는 가짜인 것을. 이 세상, 인간과 연루된 이 세상에서 참된 가치를 찾으려거든 <가짜>의 주인공처럼 홀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은둔하며 살아갈 것.

<본능의 기쁨>에서는 난쟁이와 거인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간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들이라면 구역질이 나요, 선생님.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요. 그들은 속속들이 흉악해요. …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요, 선생님, 하하!' 로맹 가리가 느꼈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인간들은 난쟁이와 거인이 어떻게 섹스를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거나 그들을 구경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지, 난쟁이와 거인도 당연히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럴 땐 정말 내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다니까.'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은 인간 운명의 어리석음과 운명 자체의 반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벽을 통해 흘러나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음 소리가 실상은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 때문'에 비소에 중독 되어 죽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것도 절망적인 고독이라는 이유로 벽 하나를 두고 하나는 목을 매달고, 하나는 비소를 먹고 죽어 가는 것이 인간 운명의 어리석음이라는 말 말고 다른 어떤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로맹 가리가 일생을 신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더러운 모습들을 관찰할 수 없다는 용기 어린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에 매여 사는 인간들. 우리는 노예, 운명은 가혹했다. 언제쯤 인간의 치사한 연루는 막을 내릴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의 의미
마커스 보그 외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읽기는 언제나 해석학적 요구를 한다. 내가 처한 상황과 처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기초로 책은 읽힌다. 여러 날 동안 낑낑대며 읽었던 <예수의 의미>는 내 고민과 우리의 현실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반성을 던져 주었다.

마녀재판이 횡행하는 한국이라는 현실, 고상하게 마커스 보그식으로 말하자면, 문자주의적, 교리적, 도덕주의적, 배타주의적, 내세지향적 기독교가 주류인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는 역사적 비평과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그 의미들을 되새기는 일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책의 저자들과 함께 공부한 많은 이들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 신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자신이 갇힌 한국교회의 교리적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다시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는 '과연 유다는 무엇을 배신했는가?'하는 따위의 질문법을 알지 못했다. 차라리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예수님의 탄식도 있는 마당에 유다가 무엇을 배신했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다는 무엇을 배신하였는가? 성경은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맞춤함으로써 그가 예수임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랐을까? 유다가 배신했다는 것은 그 안에 또다른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성경이 언급하는 단어들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했는데, 하늘 나라라든지 영생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어떤 해석이 옳은지 교리와 그 당시 의미 속에서 다시 재해석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해야 할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이나 고민없이 무턱대고, 문자적으로 읽히는대로 해석해대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톰 라이트나 마커스 보그 둘 다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이렇다. 성경의 어떤 사건이 역사적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과학은 반복되는 것을 다루지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것과 부딪힌다. 그렇다면 '만일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적합한 것이었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그것에 반대할 것인가?'하고 말할 따름이다. 톰 라이트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비평의 결과들을 무시하지 않지만, 스스로 그것을 비켜설 충분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마커스 보그는 어떠한가? 예수의 이야기 전체가 은유화된 역사이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성과 상관없이 충분히 참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커스 보그의 생각은 전형적인 불트만을 닮았다. 실존 속에서 경험된 예수, 예수 사건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되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분명한 역사적 토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커스 보그는 그 토대를 무너뜨릴 충분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톰 라이트와 마커스 보그는 결론으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배와 선교, 영성, 신학, 정치, 치유로 요약하며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통합, 유대인 메시아 예수와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예수 사이의 통합, 기독교인들의 서로 다른 경험들의 통합, 역사와 종말론의 통합, 역사와 신앙 사이의 통합을 주창한다. 반면 마커스 보그는 비판 이후적 소박함을 말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비평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성이 주인이던 시절을 통과하며 거쳐온 비판의 과정을 없던 것으로 되돌이킬 수는 없다. 비판적 사고는 마커스 보그가 설득하는 것처럼 새로운 이해를 낳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본래 전하고자 했던 본질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역사 비평의 시대를 겪어 보지 않은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진리는 어떤 악의와 험담 속에서도 진리이다. 오히려 진흙탕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이 책의 서로 다른 두 주장들이 나란히 토론되어지는 모습처럼 우리 현실 속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이 책 <예수의 의미>가 나에게 주는 최종적 도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