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냐
박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야구팬이라면 한번쯤 가능성이 없는 꿈을 꾼다. 나 어릴적 친구들의 장래희망이 거의 다 '박사', '대통령' 등이었고 중고등학교 때 농구에 심취하며 내 키가 10cm만 더 컸어도 한국농구가 바뀌었을거라고 허풍을 쳤듯이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야구선수를 꿈꾼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한 복판에 꽂아넣으며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파이어볼러'는 야구팬들에게는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 불가능한 꿈이고 그런 꿈을 달래기 위해 사회인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이 소설은 말도 안되게 황당한 꿈을 기적처럼 이루어내는 찌질한 청춘의 이야기를 통해 이룰 수 없는 그 꿈들에 대한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또 하나의 탈출구다. 오죽이나 황당했으면 책 제목이 벌써 '말이 되냐?' 겠는가? 제목 그대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들을 야구와 무협의 절묘한 만남으로 그려낸 청춘로망 야구 판타지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어릴 때 내 가슴에 파고들었던 이현세의 '설까치'가 그랬고, 이상무의 '독고탁'이 그랬듯이 소설 속 주인공 이원식도 처음에는 아무런 재주도 없는  3류 사회인 야구팀의 후보였지만 기적같은 일들의 연속으로 프로야구 1군무대에 까지 오르는 성장을 보여준다. 소설로 읽는 만화같은 스토리. 일면 유치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 속에 내가 빠져들게 되는 건 만화와는 다른 설정들 때문이다. 그 설정의 가장 큰 중심은 주인공의 나이가 10대가 아닌 30대라는 것. 30대의 사회인 야구 후보선수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행운으로 강철어깨를 갖게되고 때마침(?) 실직까지 하게되자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한다.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본다면 한 마디로 '철부지'라고 매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난 그 설정이 주는 의미에 이 소설의 가치를 둔다. 그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적을 통해 프로야구 1군에 올라갔을 때 리포터가 30대의 나이에 왜 프로야구를 했냐고 묻자 주인공은 '꿈을 이루는 데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모하고 철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꿈을 버리지 말라고. 불황과 실직으로 인해 의기소침해지고 위축된 채 방 한구석에 쳐박혀 세상을 원망하는 찌질한 청춘들에게 이원식이 던지는 불같은 강속구는 잃어버린 자심감을 되찾으라는 명령이고 자신의 꿈을 향해 열정을 불 태우라는 자극제이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희생자가 된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가슴속 뜨거운 열정을 되살려보라는 부추김이다.

  시종일관 말도 안되는 상황들의 연속이고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웃음을 유발하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지만 중간중간 사회에 대한 날이 선 비판을 보여준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어묵 먹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 개그프로의 유행어처럼 '1등만 기억하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간 중간 섞여있다. 그런 비판들은 시대의 억울한 피해자들인 지금의 청춘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비판들도 잠깐 스쳐갈 뿐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의 최고 매력이다. 

  야구라는 종목을 불확실성의 종목이다. 어느 종목보다 복잡하고 엄격한 규칙을 가지지만 둥근 공과 둥근 배트의 만남이 일으키는 수많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단 한 경기도 동일한 형태의 경기가 일어나지 않는 경기. 수많은 법규와 도덕으로 짜여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한 사람도 똑같은 삶을 살지 않는 우리들의 인생과 닮아있는 경기이다. 그래서 난 야구에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 스트라이크존을 통해 사회를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스트라이크는 한 복판에 들어오면 아무리 좋은 공도 얻어 맞는다. 훌륭한 투수는 스트라이크존의 구석 구석을 찌르는 칼날같은 제구력을 발휘한다. 우리 사회에도 한복판의 노른자위를 차지하는 기득권들에 대한 정책보다는 사회의 경계선을 지키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야구는 그렇게 우리네 삶을 위로하는 수단이다.

  나도 야구라면 자다가도 깨는 열혈 야구광이지만 이 작가에는 Give-Up이다. 야구에 반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소설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나오는 만화를 보면 작가의 정신세계가 심히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미친 작가가 나의 마음에 쏙 들어온다. 야구라는 종교에 빠진 광신도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재미는 정말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소설집 '이원식씨의 타격폼'은 이미 내 북카트에 들어있다. 기대되는 신인작가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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