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의 즐거움
하성란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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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커다란 십자가가 꽂힌 흰색의 둥근 돔형 지붕이 보인다. 저벅저벅 발짝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자, 이곳이 너의 집이야. 좀 보렴. 후끈한 입김이 얼굴에 다가온다. 사자 머리 모양의 청동상이 보인다. 남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개가 짖으면서 달려온다. 아득히 높은 곳에 붉은 열매들이 달려 있다. (책에서)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흰색 돔형 지붕을 보고 '남자'는 강렬한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구불거리는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그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남자가 찾아헤매던 '진짜 자기 집'이었다. 그러면 '남자'에게 집(가족)이 없느냐 하면 아니다. 술에 취하면 멀쩡한 밥상을 뒤집어 엎는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아버지와, 밥 지을 때마다 찬장 깊숙이 숨겨둔 소주를 홀짝이는 어머니가 있다. 그런데도 '남자'는 오래 전부터 자기 '집'을 찾고 있었다.

 

 

 

   직업적 권태에 빠진 산부인과 간호사의 실수로 아이가 바뀐다는 독립적인 짧은 일화를 기점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의 '진짜 집 찾기'를 이해하려면 이 짧은 일화를 간과할 수 없다. 하성란 작가는 간호사 일화를 통해 '남자'의 '업둥이 콤플렉스'를 암시하고 있다. '남자'는 어디엔가 자신의 친부모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심리학적 용어로 '기억과잉 증후군'이라고 한다. '재경'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아이로, 왕따를 당하다 자살한다. 당시의 '재경' 역시 '업둥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재경'이 "주파수가 맞"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느낀 것이 '업둥이 콤플렉스'라는 공통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주파수가 맞"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시점에서 '업둥이 콤플렉스'가 시작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작가는 '재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남자'의 심리적 형성 요인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신의 '진짜 집'을 찾았다고 믿는 '남자'는 그러나 뜻밖의 행동들로 지켜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남자'는 자신의 '진짜 집'이 비워지는 일요일마다 몰래 들어가 개를 길들이고, 너무 익어버린 붉은 감을 따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인다. '남자'는 '진짜 집'에 '들어갈' 욕심도 용기도 없어 보인다. '남자'가 찾은 '진짜 집'은 '현실의 집'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속에 그렸던 이상적인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저 집이 사실은 '내 집'이라는 믿음은 남자가 '현실의 집'에서 받은 상처들을 위무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노파는 저녁때까지 혼자 이 큰 집을 키지고 있었다. (...) 며느리는 집에 있는 동안에는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는데 노파의 귀가 어둡다는 사실을 안 날부터 대개가 노파의 흉을 보는 이야기들이었다. 며느리는 이제 직접 대놓고 노파에게 욕을 했다. 늘 미소를 짓는 눈과는 달리 입에서는 흉측한 험달들이 쏟아져나왔다. (...) 노파는 며느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병 속에 죽은 바퀴벌레를 넣었다. 짐작대로 커피를 마시던 며느리는 커피잔에 둥둥 떠오른 바퀴벌레를 발견했고 커피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책에서)


 

   소설에는 '바퀴벌레'가 자주 등장한다. '남자'의 아버지가 아무리 방역 작업을 해도 "일꾼의 허리가 기역 자로 구부러지고 냉장고의 밑면이 막 땅에서 떨어질 찰나 바퀴벌레 떼가 일꾼의 발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 내"리거나 '남자'가 일하는 "회사 제품 번데기 통조림에서 바뀌벌레가 발견"되는 등 '바퀴벌레'는 죽지 않고 오히려 그 수를 늘려간다. '바퀴벌레'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대 가정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바퀴벌레는 떼지어 산다. 반면 현대 가정은 개별화되어 간다. 바퀴벌레를 죽이는 살충제는 해를 더할수록 농도가 진해지지만 바퀴벌레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이 놀라운 바퀴벌레의 생명력은 무리를 이루어 산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자꾸 흩어지려고만 하는 현대 가정의 위기를 작가는 1105호 노파의 죽음으로 암시하고 있다. 늙은 여자가 떠난 텅 빈 아파트에는 바퀴벌레들만이 그 수를 늘려갈 것이다.

 

 

 

    하성란 작가의 소설은『식사의 즐거움』이 두 번째이다.『삿뽀로 여인숙』을 절반쯤 읽다 '재미가 없어서' 덮어버린 기억이 있다. 이번 소설은 끝까지 읽었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장 아쉬운 것은 결말이다. 유원지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를 데리고 오는 '남자'의 모습은 너무 작위적인 데가 있다. 그 아이를 통해 '남자'가 '재경'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다. 작가는 이 무시무시한 결말을 통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하려고 했던 것일까.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가면 간호사 일화로 연결된다. 간호사 일화의 결말은 다른 간호사에 의해 바뀌었던 아이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과 이어서 생각할 때, 역시 너무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내가 어렸을 때, 한동네 사는 작은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잦았다. 엄마가 아프기 때문이었는지, 할머니가 우리를 불러들여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작고 둥근 접이식 밥상. 밥상은 너무 작았고, 둘러앉은 사람은 많았다. 반찬을 집으려고 팔을 놀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밥상이 네모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작은아버지는 내 젓가락질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고, 나는 아무리 해도 젓가락이 평행이 되게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반찬을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작은아버지는 자꾸만 그것을 지적했다. 동생과 사촌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그 자리가 싫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차리는 밥상과 다르게 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올라와 있었지만 나는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반찬 한 두개를 놓고 밥을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작은집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간 직후 집에서 밥을 또 먹는다고 꾸중을 하셨다. 여기서 많이 먹고 가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작은아버지보다 아픈 엄마가 더 미웠다. 하성란 작가의『식사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떠오른 불편한 기억 한토막. 식구(食口)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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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즐거움 - 삶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한
왕샹둥 지음, 강은영 옮김 / 베이직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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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을 주제로 한 도서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혈액형별 심리유형에서부터 심도 있는 연구서적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심리학 서적을 읽는 독자층도 일반으로 확산되었다. 어린 학생에서 나이든 분들까지 연령층도 다양해진 것 같다. ‘심리학’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서먹한 자리에서 한두 가지 심리테스트로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고, 자기 문제의 뿌리를 파악해 개선의 여지를 얻기도 한다. 네오내오없이 ‘심리학’ 서적들을 찾아 읽는 사람들은 과연 책에서 무엇을 찾는 것일까.







   지금보다는 어린 시절, 나는 그 유명한 프로이트 박사의 ‘꿈의 해석’을 읽으려고 ‘시도’를 했던 적이 있다. 그 두께만도 상당한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사냥감을 앞에 두고 굶주린 하이애나처럼 군침을 삼켰었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당혹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프로이트 박사는 너무 멀리 있구나 실감을 하고 과감하게 책을 덮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해설서들과 프로이트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는 칼 융이나 저 먼 나라의 고대 서적도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왜 이토록 심리학 서적에 목말라 했던가. 그 당시에는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 냄새를 따라가는 굶주린 짐승처럼, 그렇게 심리학 서적에 마음을 붙들렸다. 나는 ‘내 안의 나’를 찾아 그렇게도 헤맸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나는 수많은 심리 서적들을 먹어치우고 있다. 프로이트처럼 소화가 안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내 수준이나 정서에 들어맞아 유익하다. 유익함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야겠다. 내가 말하는 유익함은 단지 심리학적 지식을 얻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책에서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만난다. 나 자신과의 불화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심리학은 ‘나 자신과의 화해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번에 내가 만난 심리학 서적은 무엇보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 심리학의 즐거움. 제목에서 나는 ‘내 안의 나’와의 해후,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던 다른 사람과의 화해를 도와주는 심리학의 이점을 떠올렸다. 나 자신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리학 서적을 찾는 것에는 이런 이점들이 큰 몫을 한다고 믿는다. 단순히 이론적 지식을 얻는 데서 나아가 나 자신과 우리 주변 사람들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심리학이 주는 즐거움의 일면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요리에 비유해 보자면 일본요리가 적합하지 않나 싶다. 양은 적지만, 그 맛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일반 심리, 사회 심리, 인격 심리, 의학 심리, 기타 심리. 이렇게 총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의 심리를 제시하고 그에 대해 간략한 해설만을 곁들인 군더더기 없는 구성이다. 실제 사례들과 실험 결과들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심리학 이론을 보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이런 구성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프로이트에 좌절했던 오래 전의 나처럼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종류의 심리학 서적을 만나는 독자도 늘어날 것 같다. 양념이 많이 들어간 푸짐한 요리도 좋지만, 담백한 요리를 다양하게 맛보는 것도 즐겁지 않은가. 심리학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개론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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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볍게 해주는 현명한 네거티브
모가미 유 지음, 이지연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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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적 사고를 찬양하고 권장하는 현 시대에 부정적인 사고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모가미 유의 주장은 신선하다. 특히 나 같은 부정적인 인간에게는 더욱 마음이 쏠리는 내용이다. 하지만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한 게 사실이다. '부정적 사고'를 옹호하기에는 세상은 이미 긍정적인 것을 신처럼 받들고 있지 않은가. 그게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사고의 장점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확실히 나는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긍정적 사고, 부정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인 것이며, 그 사고가 어떤 감정과 기분을 낳느냐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차이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 때  ‘슬프다 ’ , ‘실망스럽다’, ‘불안하다’, ‘화가 난다’ 등의 마이너스적인 기분이 생겨나면 그 생각은 부정적 사고다. 그리고 ‘기쁘다’, ‘용기가 난다’, ‘유쾌하다’는 플러스적인 감정이 생기면 그 배후에 있는 생각은 긍정적 사고다. (책속에서)

 

 

   매사에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쳐 있는, 부정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나 같은 사람도 긍정적 사고의 이로움을 잘 안다. 긍정적인 자세를 배우고 싶어서 '긍정'에 대한 자기계발서나 심리학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책들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좌절감과 실망감 같은 '부정적인' 것들 뿐이었다. 긍정! 긍정! 긍정! 외쳐대는 세상이 나는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이른바 '긍정적인' 사람들이 부르짖는 '긍정의 힘' 같은 것들이 나는 미심쩍었고, 그럴수록 나는 '부정적인 사고'에 안주했다. 적어도 그것은 나에게 익숙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는데, 그것을 두루 보지 못할 때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이다. 긍정적인 사고로 '일관'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눈앞의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을 직시할 만큼의 용기가 없거나 긍정적 자세에 대한 강박 사고 같은 것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표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은 마음은 물론 몸에 병을 유발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부정적인 감정표현은 기쁨이나 행복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면역기능을 높여준다고 하니까. 슬프고 괴로운 일 앞에서 긍정적인 사고나 감정을 품기는 쉽지 않다. 슬프고 괴로울 때는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글쓴이는 역설한다. 그것을 '정상적인 비애반응'이라고 하는데, 그런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표출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한다. 억눌린 감정들은 몸과 마음에 이상징후로 나타나기도 한다. 부정적인 것들을 표출하는 것. 일명 카타르시스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지금 눈앞의 상황만 생각하기보다는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자세가 현명할 수도 있다. 단, 미래의 일만 지나치게 걱정하기보다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나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책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속하는 걱정이나 불안은 눈앞의 대상을 다각도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 경우만 봐도 그렇다. 다른 사람 같으면 예사로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사소한 일 앞에서 나는 수많은 가정(假定)과 예측을 쏟아낸다. 그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지만 때때로 현실에서 이롭게 작용하기도 한다. 세상 일이란 것이 대개 단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걱정이나 불안은 몸과 마음에 해롭다. 현재 나를 불안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는 것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책에서 말하는 '현명한 네거티브'이다.

 





 부정적인 시점이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정적 사고나 긍정적 사고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경직되어 한 가지 태도밖에 취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인생을 고달프게 만든다. (책속에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보자. 닥쳐올 겨울을 위해 매일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봄부터 겨울까지 띵까띵까 노는 베짱이. 닥쳐올 겨울을 준비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베짱이는 '현실도피적 긍정주의자'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름다운 계절을 즐길 생각도 않고 죽어라 일만 하는 개미 또한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우화 속 개미나 베짱이는 지나치게 한 쪽으로만 치우쳐 있다. 모든 것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긍정적인 사람, 혹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긍정과 부정을 적절히 통제하고 조절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 긍정적 사고에 치우쳐서 현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부정적 사고에 내재된 힘과 장점을 잘 활용하자는 것이『현명한 네거티브』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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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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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까 왜인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집으로부터 까마득한 거리, 돌아갈 수 없는 먼 나라 낡고 추운 여인숙에 들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내가 앉아 있는 방이 쌀랑하다. 난방장치를 작동시킨다. 새삼스럽게 참 편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좋아졌구나. 늙은이 같은 감격과 그리움 같은 것이 지나간다. '집'은 '엄마'나 '고향' 같은 말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이의 살림집』을 들여다보는 내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집들을 떠올렸다. 그 집들의 냄새, 소리, 촉감, 공기, 어두움의 농담(濃淡) 같은 것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이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한 번도 집에게 배신 당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나 '고향', 하느님조차도 우리를 내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집을 배신할 때도 있다. 어릴 때 나는 얼마나 자주 집 떠나는 꿈을 꾸었나. 집이 춥거나 소음이 심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 불편함보다는 보이지 않는 날갯짓 같은 것이었다. 작은 동네를 떠도는 허황한 소문 같은 것은 어린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큰 도시에 가면 큰 돈을 벌어 큰 집을 사고 큰 텔레비전을 보면서 큰 방에서 잠들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동경을 품고 살았다. 딱딱하고 더운 방에 등을 대고 누워 나는 여러 번 집을 떠나곤 했다.

 

 

   그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가장 크게 떠오르는 '집'이 하나 있다. 그야말로 '가난한 살림집'이었다. 그 집은 산골 친구집. 길가에 지어진 '외주물집'이었다. 대문이 없고 마당은 길로 이어지는 곳. 그리고 마당 앞에는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창호지문. 모두 잠든 한밤중 불 끄고 누우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 낭만적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안 살아봐서 그런다. 사람 다니는 길과 면해 있는 변소에 앉으면 머리가 쑤욱 나왔다. 똥 누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한편 지나가는 이와 눈길 마주칠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친구집 가서 똥이 마려우면 정말 고역이었다. 한데 마련된 수돗가에서 등을 구부리고 세수를 하면 가랑이 사이로 뒷집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어쩌다 친구집에서 잠을 잔 날 아침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오면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들이 내 앞에 나타날 적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좋은 추억이 된다. 그 친구도 그럴 것이다. 오래지 않은 어느 날 그 집을 찾았었다고. 하지만 그 작은 집은 사라지고 없다. 큰 도로를 내는 데 땅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 집에 살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없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낯설음에 잠 못 이루던 그 방. 그 방을 흐르던 도랑물 떠가는 소리. 새소리. 늙은 할머니가 피우던 솔 담배의 매캐한 내음. 담뱃진이 누렇게 배인 오래된 벽지 같은 것들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노익상 씨가 발품 팔고 세월 팔아 문 두드린 '가난한 이의 살림집'들에는 내가 잘 알고 있고 언젠가 알았던 것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언젠가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며 그 집들을 스쳐지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집'에는 역사가 흐르고 있다. 사람 따라 세월 따라 국세(國勢) 따라 지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집'이다. '집'은 자고 먹고 싸고 씻고 입게 해주는 곳. 그래서 인간에게는 중요한 장소다. 사람들이 평생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도 나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요즘에는 집의 기능이 반드시 '생활'에만 국한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제 몸 하나 뉘일 수 있을 정도면 만족했던 옛날 사람들과 달리 요즘 사람들은 '집'을 자기의 '얼굴'이라고 여긴다. 제 얼굴이니 사람들이 쳐다볼 적에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편리한 집을 꿈꾼다. 세간붙이의 수준이나 생활의 편한 정도를 떠나 집은 제집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행복의 척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라고 불편함을 모르겠는가. 좋은 집에서 호사 한 번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그 집과 한몸이 되어 산다. 아들 딸이 도시의 아파트로 들어오시라고 해도 늙은 부모는 한사코 거절을 한다. 나는 이들이 아들 딸에게 짐 될까 하여 부러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집과 한몸이 되어서 이제 다른 데 가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데'에는 자기의 '세월'과 '생활'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녘 변소에 가려고 윤 씨 집 마루로 나섰을 땐 이미 여명의 기운이 산 능선으로부터 배어났다. 내처 보랏빛으로 번져갔는데, 맑고 상큼한 바람이 살갗 곳곳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그러면서도 이 적막강산에 홀로 들어와 제금 낸 윤 씨 부부가 새삼스레 커 보였고 이제껏 겪었을 온갖 풍파에 절로 숙연한 맘이 들었다. 그즈음 새벽별이 순정하게 반짝였고, 나는 오래도록 그 별을 쳐다보며 내년에 윤 씨 부부가 심굴 황기와 더덕 농사를 잘 해내길 맘 다해 빌었다. (37쪽)


 

   『가난한 이의 살림집』에는 세월이 흐르고 있다. 어린 것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도시로 떠나고 늙은 부모는 더 늙어간다. 햇볕과 바람과 구름은 가난한 살림집에 흔적을 새겨가고. 46쪽에 실린 누렁이는 밥은 먹고 다니는지. 바람처럼 달음박질하던 아이들은 지금 커서 어디 살고 있을지. 승부(承富)역 앞에서 담배 피고 앉았던 역무원 아저씨들은 이제 늙었겠지. 노익상 씨는 사람과 함께 집도 낡아가고 집과 함께 사람도 늙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나는 어릴 적 꿈꾸었던 안락하고 깨끗한 집에 산다. 매달 대출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집이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안락(安樂)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안락이라는 것도. 누추하고 불편하더라도 제집이 최고라는 늙은이들의 말을 생각한다. 나 늙어서 그런 집에 들 수 있을까. 늙어서까지 나는 이 허황한 안락을 포기하지 못할까.

  

 

   어떤 이들에게 '집'은 자신을 내치는 설움일 수도, 저 먼 고향 하늘일 수도 있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지옥일 수도 있다. 남 보이기 부끄러운 얼굴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누운 자리를 제집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살림집'이라는 것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며, 품었다 내쳤다 하는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것이라고. 왜냐하면 거기 '사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어느새 사늘했던 방이 따듯해졌다. 이 크나큰 우주에서 나를 품어주는 작은 집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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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3-0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월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이 마음 아련합니다.
구입해서 읽어봐야겠어요.
 
딱한번인.생
조대연 지음, 소복이 그림 / 녹색문고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소 2마리, 돼지 20마리, 닭 1.000마리, 달걀 17.380개, 명태 1.026마리, 오징어 1.750마리, 고등어 583마리 . . . 감귤나무 22그루에서 열린 감귤과 사과나무 19그루에서 열린 사과, 포도나무 29그루에서 열린 포도. 일주일 내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물의 양, 서울시 수도요금으로는 88.000원어치. 쌀 75가마. 평균수명을 80세로 두고 볼 때 평생 인간이 먹는 양이라고 한다. 어쩐지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라는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도 정말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 내가 평생 마시는 물의 양이 고작 88.000원어치라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80세 이전에 죽을 경우라면 그보다 더 줄어들겠지. 물의 양이 88.000원어치라고 인생도 88.000원어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평생'이나 '죽을 때까지'라는 말에서 무의식적으로 유구한 역사를 기대하기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 망각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막인 동시에 시간의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다. 매순간 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차곡차곡 쌓아온 저축, 내 가족과 집.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 무(無)로 되어버린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뜩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나는 삽질하고 있는 것인가? 심각한 허무감에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딱 한 번인.생. 가볍게 손에 들어오는 이 책의 내용은 그러나 가볍지만은 않다. 책 표지에는 고만고만한 얼굴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책장을 넘길 때에도 소복이의 그림들은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다. 그렇더라도 내용은 썩 즐겁지만은 않다. 딱 한 번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 번인 생'이라는 주제 앞에서는 어쩐지 엄숙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예의일 것 같았다. 인생 뭐 있어?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인생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사는 것 아닌가 하고.







  텔레비전 속은 동화처럼 평등한 세상이군요. 가진 게 꿈뿐인 사람이 꿈도 겸손도 가진 사람과 경쟁을 해요. 저런, 경쟁에서 꿈만 가진 사람이 용케 승리하는군요. 텔레비전 속은 천국처럼 평등한 세상이군요. 꿈만 가진 사람은 이제 꿈도 겸손도 돈도 가진 사람이 됐군요. 거봐, 내가 그랬지? 그렇군요. 드라마에선 어떤 불행도, 어떤 절망도 다 이겨내는군요. 아이들 볼까 꺼림칙한 게 에로물뿐인 건 아니군요. 에로틱과 드라마틱 중에서 뭐가 더 꺼림칙한가요? “그냥 재미로 보는 건데, 뭘…….” 그래요. 현실은 썩 재미있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으니까요. (책속에서)




 

   그러면 우리를 살게 하는 인생의 의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딱 한 번인.생. 우리가 나서 먹고 자고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먹고 자고 늙어서 죽기까지의 인생을 무섭도록 직설적인 어조로 펼쳐놓은 것이 바로『딱 한 번인.생』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뭐야.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다리 찢어진다는 건가. 너는 새우니까 딱 그만큼 새우처럼만 살아야지 왜 고래처럼 되려고 발버둥이냐. 이런 말이야 뭐야? 그리고 조금 더 읽으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뱁새는 뱁새대로 황새는 황새대로 인생의 가치나 의미가 있다는 것. 새우니까 고래의 삶을 넘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새우라면 새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나가자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새우는 천분의 일의 1을 차지하는 고래를 제외한 나머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조대연 씨는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존재를 '평범 씨'라 지칭한다.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무서운 통계까지 들이대가면서 풀어가고 있다. 지겹도록 사실적인 다큐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즐겁지만은 않다. 이 기분을. 알랑가 모르것어요.

 


  평생 거짓말을 8만 번 해요. 예뻐졌다, 반갑다 같은 빈말까지 거짓말로 치면 577만 번이나 돼요. 평범 씨가 거짓말쟁이라고요? 못된 사기꾼도 거짓말하는 횟수는 평범 씨와 비슷해요. 대부분의 거짓말은 듣는 사람에게 그리 해롭지 않아요. (...) 거짓말은 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요. 그게 진짜 행복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행복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거라면 가짜는 없겠어요. 행복의 크기는 언제나 예상보다 작아. 그럴 거예요. 미래의 배고픔을 미리 배고파하듯, 사람은 미래의 만족을 미리 만족해하거든요. 내일도 행복하려면 오늘보다 큰 만족이 필요하거든요.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요. (책속에서)



  


   이 책은 바른 말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짝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한편 바른 말만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조대연 씨 말처럼 세상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대한민국의 평범 씨들에게 허황한 꿈을 획일적으로 심어주고 있다는 것은 맞다. 그렇더라도 그 꿈을 반드시 허황되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 천분의 일의 확률이라 해도, 그 꿈을 모두가 좇고 있다고 해도 그 꿈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꿈꾸는 그 순간 자체가 값진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천분의 일 중 천에 속하는 사람들 모두를 '평범 씨'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은 어쩌면 무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저마다 다른 생각에 빠지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4.800조분의 1의 기적 속에서 태어난 귀한 생, '딱 한 번인. 생'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평범 씨'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보통의 존재들은 잠시 고래 꿈 좇기를 멈추고 '딱 한 번인.생'을 펼쳐봐도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감동시킨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장난 아니고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지옥에 떨어져도 좋으니 정말로 천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소설에서 이 글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돈 기억이 나요. 사람들은 위로받고 싶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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