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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번인.생
조대연 지음, 소복이 그림 / 녹색문고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소 2마리, 돼지 20마리, 닭 1.000마리, 달걀 17.380개, 명태 1.026마리, 오징어 1.750마리, 고등어 583마리 . . . 감귤나무 22그루에서 열린 감귤과 사과나무 19그루에서 열린 사과, 포도나무 29그루에서 열린 포도. 일주일 내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물의 양, 서울시 수도요금으로는 88.000원어치. 쌀 75가마. 평균수명을 80세로 두고 볼 때 평생 인간이 먹는 양이라고 한다. 어쩐지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라는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도 정말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 내가 평생 마시는 물의 양이 고작 88.000원어치라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80세 이전에 죽을 경우라면 그보다 더 줄어들겠지. 물의 양이 88.000원어치라고 인생도 88.000원어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평생'이나 '죽을 때까지'라는 말에서 무의식적으로 유구한 역사를 기대하기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 망각은 자기를 지켜주는 보호막인 동시에 시간의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다. 매순간 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차곡차곡 쌓아온 저축, 내 가족과 집.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 무(無)로 되어버린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뜩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나는 삽질하고 있는 것인가? 심각한 허무감에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딱 한 번인.생. 가볍게 손에 들어오는 이 책의 내용은 그러나 가볍지만은 않다. 책 표지에는 고만고만한 얼굴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책장을 넘길 때에도 소복이의 그림들은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다. 그렇더라도 내용은 썩 즐겁지만은 않다. 딱 한 번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 번인 생'이라는 주제 앞에서는 어쩐지 엄숙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예의일 것 같았다. 인생 뭐 있어?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인생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사는 것 아닌가 하고.
텔레비전 속은 동화처럼 평등한 세상이군요. 가진 게 꿈뿐인 사람이 꿈도 겸손도 가진 사람과 경쟁을 해요. 저런, 경쟁에서 꿈만 가진 사람이 용케 승리하는군요. 텔레비전 속은 천국처럼 평등한 세상이군요. 꿈만 가진 사람은 이제 꿈도 겸손도 돈도 가진 사람이 됐군요. 거봐, 내가 그랬지? 그렇군요. 드라마에선 어떤 불행도, 어떤 절망도 다 이겨내는군요. 아이들 볼까 꺼림칙한 게 에로물뿐인 건 아니군요. 에로틱과 드라마틱 중에서 뭐가 더 꺼림칙한가요? “그냥 재미로 보는 건데, 뭘…….” 그래요. 현실은 썩 재미있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으니까요. (책속에서)
그러면 우리를 살게 하는 인생의 의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딱 한 번인.생. 우리가 나서 먹고 자고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먹고 자고 늙어서 죽기까지의 인생을 무섭도록 직설적인 어조로 펼쳐놓은 것이 바로『딱 한 번인.생』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뭐야.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다리 찢어진다는 건가. 너는 새우니까 딱 그만큼 새우처럼만 살아야지 왜 고래처럼 되려고 발버둥이냐. 이런 말이야 뭐야? 그리고 조금 더 읽으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뱁새는 뱁새대로 황새는 황새대로 인생의 가치나 의미가 있다는 것. 새우니까 고래의 삶을 넘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새우라면 새우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나가자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새우는 천분의 일의 1을 차지하는 고래를 제외한 나머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조대연 씨는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존재를 '평범 씨'라 지칭한다.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무서운 통계까지 들이대가면서 풀어가고 있다. 지겹도록 사실적인 다큐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즐겁지만은 않다. 이 기분을. 알랑가 모르것어요.
평생 거짓말을 8만 번 해요. 예뻐졌다, 반갑다 같은 빈말까지 거짓말로 치면 577만 번이나 돼요. 평범 씨가 거짓말쟁이라고요? 못된 사기꾼도 거짓말하는 횟수는 평범 씨와 비슷해요. 대부분의 거짓말은 듣는 사람에게 그리 해롭지 않아요. (...) 거짓말은 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요. 그게 진짜 행복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행복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거라면 가짜는 없겠어요. 행복의 크기는 언제나 예상보다 작아. 그럴 거예요. 미래의 배고픔을 미리 배고파하듯, 사람은 미래의 만족을 미리 만족해하거든요. 내일도 행복하려면 오늘보다 큰 만족이 필요하거든요.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요. (책속에서)
이 책은 바른 말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짝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한편 바른 말만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조대연 씨 말처럼 세상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대한민국의 평범 씨들에게 허황한 꿈을 획일적으로 심어주고 있다는 것은 맞다. 그렇더라도 그 꿈을 반드시 허황되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 천분의 일의 확률이라 해도, 그 꿈을 모두가 좇고 있다고 해도 그 꿈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꿈꾸는 그 순간 자체가 값진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천분의 일 중 천에 속하는 사람들 모두를 '평범 씨'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은 어쩌면 무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저마다 다른 생각에 빠지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4.800조분의 1의 기적 속에서 태어난 귀한 생, '딱 한 번인. 생'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평범 씨'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보통의 존재들은 잠시 고래 꿈 좇기를 멈추고 '딱 한 번인.생'을 펼쳐봐도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감동시킨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장난 아니고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지옥에 떨어져도 좋으니 정말로 천국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소설에서 이 글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돈 기억이 나요. 사람들은 위로받고 싶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