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의 즐거움
하성란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멀리 커다란 십자가가 꽂힌 흰색의 둥근 돔형 지붕이 보인다. 저벅저벅 발짝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자, 이곳이 너의 집이야. 좀 보렴. 후끈한 입김이 얼굴에 다가온다. 사자 머리 모양의 청동상이 보인다. 남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개가 짖으면서 달려온다. 아득히 높은 곳에 붉은 열매들이 달려 있다. (책에서)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흰색 돔형 지붕을 보고 '남자'는 강렬한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버스에서 내린 '남자'는 구불거리는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그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남자가 찾아헤매던 '진짜 자기 집'이었다. 그러면 '남자'에게 집(가족)이 없느냐 하면 아니다. 술에 취하면 멀쩡한 밥상을 뒤집어 엎는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아버지와, 밥 지을 때마다 찬장 깊숙이 숨겨둔 소주를 홀짝이는 어머니가 있다. 그런데도 '남자'는 오래 전부터 자기 '집'을 찾고 있었다.

 

 

 

   직업적 권태에 빠진 산부인과 간호사의 실수로 아이가 바뀐다는 독립적인 짧은 일화를 기점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의 '진짜 집 찾기'를 이해하려면 이 짧은 일화를 간과할 수 없다. 하성란 작가는 간호사 일화를 통해 '남자'의 '업둥이 콤플렉스'를 암시하고 있다. '남자'는 어디엔가 자신의 친부모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심리학적 용어로 '기억과잉 증후군'이라고 한다. '재경'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 아이로, 왕따를 당하다 자살한다. 당시의 '재경' 역시 '업둥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재경'이 "주파수가 맞"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느낀 것이 '업둥이 콤플렉스'라는 공통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주파수가 맞"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시점에서 '업둥이 콤플렉스'가 시작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작가는 '재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남자'의 심리적 형성 요인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신의 '진짜 집'을 찾았다고 믿는 '남자'는 그러나 뜻밖의 행동들로 지켜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남자'는 자신의 '진짜 집'이 비워지는 일요일마다 몰래 들어가 개를 길들이고, 너무 익어버린 붉은 감을 따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인다. '남자'는 '진짜 집'에 '들어갈' 욕심도 용기도 없어 보인다. '남자'가 찾은 '진짜 집'은 '현실의 집'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속에 그렸던 이상적인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저 집이 사실은 '내 집'이라는 믿음은 남자가 '현실의 집'에서 받은 상처들을 위무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노파는 저녁때까지 혼자 이 큰 집을 키지고 있었다. (...) 며느리는 집에 있는 동안에는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는데 노파의 귀가 어둡다는 사실을 안 날부터 대개가 노파의 흉을 보는 이야기들이었다. 며느리는 이제 직접 대놓고 노파에게 욕을 했다. 늘 미소를 짓는 눈과는 달리 입에서는 흉측한 험달들이 쏟아져나왔다. (...) 노파는 며느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병 속에 죽은 바퀴벌레를 넣었다. 짐작대로 커피를 마시던 며느리는 커피잔에 둥둥 떠오른 바퀴벌레를 발견했고 커피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책에서)


 

   소설에는 '바퀴벌레'가 자주 등장한다. '남자'의 아버지가 아무리 방역 작업을 해도 "일꾼의 허리가 기역 자로 구부러지고 냉장고의 밑면이 막 땅에서 떨어질 찰나 바퀴벌레 떼가 일꾼의 발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 내"리거나 '남자'가 일하는 "회사 제품 번데기 통조림에서 바뀌벌레가 발견"되는 등 '바퀴벌레'는 죽지 않고 오히려 그 수를 늘려간다. '바퀴벌레'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대 가정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바퀴벌레는 떼지어 산다. 반면 현대 가정은 개별화되어 간다. 바퀴벌레를 죽이는 살충제는 해를 더할수록 농도가 진해지지만 바퀴벌레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이 놀라운 바퀴벌레의 생명력은 무리를 이루어 산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자꾸 흩어지려고만 하는 현대 가정의 위기를 작가는 1105호 노파의 죽음으로 암시하고 있다. 늙은 여자가 떠난 텅 빈 아파트에는 바퀴벌레들만이 그 수를 늘려갈 것이다.

 

 

 

    하성란 작가의 소설은『식사의 즐거움』이 두 번째이다.『삿뽀로 여인숙』을 절반쯤 읽다 '재미가 없어서' 덮어버린 기억이 있다. 이번 소설은 끝까지 읽었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장 아쉬운 것은 결말이다. 유원지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를 데리고 오는 '남자'의 모습은 너무 작위적인 데가 있다. 그 아이를 통해 '남자'가 '재경'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다. 작가는 이 무시무시한 결말을 통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하려고 했던 것일까.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가면 간호사 일화로 연결된다. 간호사 일화의 결말은 다른 간호사에 의해 바뀌었던 아이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과 이어서 생각할 때, 역시 너무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내가 어렸을 때, 한동네 사는 작은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잦았다. 엄마가 아프기 때문이었는지, 할머니가 우리를 불러들여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작고 둥근 접이식 밥상. 밥상은 너무 작았고, 둘러앉은 사람은 많았다. 반찬을 집으려고 팔을 놀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밥상이 네모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작은아버지는 내 젓가락질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고, 나는 아무리 해도 젓가락이 평행이 되게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반찬을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작은아버지는 자꾸만 그것을 지적했다. 동생과 사촌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그 자리가 싫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 아빠가 차리는 밥상과 다르게 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올라와 있었지만 나는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반찬 한 두개를 놓고 밥을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작은집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간 직후 집에서 밥을 또 먹는다고 꾸중을 하셨다. 여기서 많이 먹고 가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작은아버지보다 아픈 엄마가 더 미웠다. 하성란 작가의『식사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떠오른 불편한 기억 한토막. 식구(食口)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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