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여행처럼 - 지금 이곳에서 오늘을 충만하게 사는 법
이지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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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기나 여행을 주제로 한 다양한 책들이 쏟아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말에서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울림을 느끼는 것 같다. 그 울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순히 일상이 무료해서라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한 목적 이외의 매력이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그토록 여행에 열광하는 것일까.

 


   방랑과 방황은 존재 자체의 숙명인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페졸리에 의하면 방랑과 방황 욕구는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은 잃어버린 성배, 혹은 하늘에 있는 별을 찾아 떠도는 욕망의 표현이고 무한의 손길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다. '존재(existence)'라는 어원은 'ex-sistence'에서 왔다. 즉 존재란 '자아에서 벗어난 타인에게 열린다'는 것을 것을 의미하며 존재는 불변하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로, 혹은 더 큰 타자 즉 우주의 섭리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존재는 늘 자신의 울타리를 넘고 싶은 갈망에 시달리는 것이다.  - (책에서 옮김)

 

 


   사회학자 마페졸리는 인간의 방랑, 방황욕구가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로지 마페졸리의 말로써 여행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현실과 욕망의 불화, 사회 규범 부적응 따위의 개인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이 본디 잠재해 있던 방랑 욕구를 깨우는 것.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인간을 떠돌게 하는 것은 '불만(滿)'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페졸리의 말을 내 식대로 살짝 변형해 보면 '불만(滿)'은 존재 자체의 숙명인 것이다. 이것이 '끝없는 여행'의 이유이다. 다시 마페졸리의 말을 인용해 보면,

 


   '역동적 뿌리내리기'는 뿌리를 내리면서도 그것을 거부하고, 떠돌면서도 또한 동시에 뿌리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곳에든 저곳에든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내린다 함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고, 돈을 벌며, 보람과 의미를 찾으며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뿌리를 내리는 만큼 여행자들은 뿌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것이 존재의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역동적으로 뿌리를 내릴 때 삶은 역동적이 된다. 역동적 뿌리내리기는 떠돎과 안주를 동시에 허락하지 않지만 두 가지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 (책에서 옮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 한다. 돌아옴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여행자는 돌아온다.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한 자리에 순응하며 정착하는 삶도 물론 좋다. 그런데 '잡을 수 없는 바람' 같은 존재 방식은 더욱 매혹적이다. 마음속에 바람을 가두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기계적인 삶은 마페졸리가 말한 본능적 방랑 욕구를 부추기는 것 같다. 1990년대 해외여행이나 배낭여행이 순수한 호기심이나 낭만적 감성에서 비롯한 유행 같은 것이었다면 오늘날 여행의 대부분은 '일탈욕구'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에 비해 다방면에서 풍족해지고 편안해진 우리 삶은 동시에 삭막하고 메말라 있다.

 

 

   이지상 씨는 20여 년 동안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은유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걷고 소비하는 진짜 여행 말이다. 사람들은 부러움과 놀람 섞인 눈을 모로 굴리며 물어올 것이다. 대체 어떻게? 여행을 하려면, 여행 아니라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지상 씨가 고물가 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여행가'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덜 쓰고 덜 갖는 소박한 삶의 자세 덕분이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삶의 원리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를 얻는 대신 욕망을 줄여나갔다. 그러면서 생활 터전을 떠났다 돌아오고 또 떠나는 여행자의 삶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떠도는 행위가 되풀이되고 익숙해지면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방랑 속에서도 권태는 반복되고 있었다는 사실.

 


      얘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행자가 있단다. 하나는 지도를 보는 여행자고, 또 하나는 거울을 보는 여행자지. 지도를 보는 여행자는 떠나려는 여행자고, 거울을 보는 여행자는 돌아오고 싶어하는 여행자야. - (책에서 옮김)


 

   지도를 보며 떠나는 여행자의 시선은 외부로 향한다. 반면 거울을 보는 여행자는 그 시선을 내면으로 돌린다. 지도를 보며 더 넓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던 젊은이 이지상은 이제 잠시 발을 멈추고 거울을 들여다 본다. 늙어가는 그가 펼쳐보이는 거울 속 빛과 그림자들에는 간간이 지도가 일렁이기도 한다. 떠돎과 안주의 성향은 끝없이 공존하는 것이다. 불안한 유목민적 삶에서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불필요한 욕망의 절제와 가치관의 확립이었다. 타인이 정한 가치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을 누리는 것이다. 멋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본 적 있는 그러나 지금은 다독이고 다독여 잠재운,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런 바람을 풀어놓고 살아가는 모습은 나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어준다.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그렇게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던 중, 불현듯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의지해야 할 것은 '성스러운 장소'도 아니고, '성스러운 순간'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덧없는 것일 뿐. 결국 세상으로부터의 '출구'와 세상의 '중심'은 다 내 몸과 마음 속에 있었다. 내 몸이 신전이고 성소였다. 또한 성스러운 순간은 그 신전에 깃든 내 마음이 그리는 꿈이었다. 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나의 몸과 마음이었다. - (책에서 옮김)

 


   우리는 자주 여행을 꿈꾼다. 그 중 일부는 실제로 여행길에 오르기도 한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혹은 집안의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피난가는 모양으로 길을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닐 것이다. 삶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너무 식상하지만, 그래도 삶은 여행이고 여행은 삶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욕망을 배낭처럼 짊어지고 길을 간다. 다른 사람 가는 길이 더 멋져보여 한눈을 팔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똑같은 구멍에 재차 빠지면서 절망하기도 한다. 이지상 씨가 여행길에서 만났다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후손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생존만큼 숭고한 것은 없다". 어쩐지 눈물이 핑 도는 말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생존보다 더 숭고한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만큼 중요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여행지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지상 씨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에서 상처받고 외로울 때 나는 이 책을 펼쳐볼 것 같다.

 


   무능력자가 아니야. '미운 백조'지. 내자. 언젠가는 내 세상을 찾아 훨훨 날아올라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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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누를 때
야마다 유우스케 지음, 박현미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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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번영유지법'이라는 법률에 따라 일본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예방접종을 한다. 그런데 이때 1000명 중 1명에게는 죽음의 나노캡슐이 주입된다. 모든 국민은 '국가번영유지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죽음을 부르는 캡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캡슐의 효과가 나타나는 시기는 18세에서 24세까지이다. 이 나이가 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죽음에 대해 안심할 수 없게 된다. 바이러스처럼 일본 전역을 떠도는 이 위기감이 생명의 귀중함을 인식시켜 자살률과 범죄율이 낮아지는 효과를 낳는다고 국가는 주장한다. '생명의 귀중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 '이키가미(イキガミ)'를 보고 심한 분노를 느꼈던 적이 있다. 아무리 가상의 이야기라지만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잊혀지기도 전에 나는 또 다시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스위치를 누를 때 』는 '자살억제프로젝트'라는 가상의 법률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자살억제프로젝트라고 하니 뭔지는 몰라도 참 바람직한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이키가미(イキガミ)'의 오류가 재현되고 있었다. 젊은 연령층의 자살자들이 날로 급증하자 일본 정부는 자살억제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정부가 무작위로 선별한 아이들은 다섯 살이 되면 심장수술을 받는다. 이때 심장에 부착한 특수 전자기기는 외부의 빨간 스위치와 연결되어 있다. 이 빨간 스위치는 일명 죽음의 스위치이다. 스위치를 누르면 곧장 심장이 멎게 된다. 국가로부터 영장이 발부되고 5 년이 지나면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각각 지정된 센터에 감금된다. 감금된 아이들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준 뒤 빨간 스위치를 건넨다. 아이들은 제한된 장소 안에서 제한된 생활만을 하며 지내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권태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스위치를 눌러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 잔혹한 실험을 통해 아이들이 어떤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하는지 심층 분석을 한다. 정부는 자살억제프로젝트라는 명분 아래 자살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실험 데이터 덕분에 젊은이들의 자살률은 낮아졌지만, 실험용 쥐가 되어 사회와 분리된 아이들은 스위치를 누르며 죽어간다.

 


   이런 쓸쓸한 곳에서 매일매일. 우린 나쁜 짓 같은 거 하지도 않았는데말이야. 앞으로도 쭉 똑같은 생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 당연히 괴롭지. 뭐가 자살억제프로젝트야.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 우리들은 국가의 장난감일 뿐이야.



                                                         - (책에서)




  

   그런데 이 혹독한 상황에서도 7 년간이나 살아남은 아이들이 있다. 다카미야 마사미, 신조 료타, 코구레 기미아키, 이케다 료. 일기장에 기록된 그들의 불안과 혼란, 두려움, 그리고 절망의 외침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이 네 명의 아이들이 생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은 '살아야 할 희망' 때문이었다. 침착하게, 혹은 무료하게 살아남아 있던 아이들을 자극할 요소는 별로 없어보였다. 감시원 요헤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감시원 요헤이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심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신들의 희망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원히 갇힌 신세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그 희망은 '죽은 희망', 결국 절망에 다름 아니다. 국가의 비인간적인 법률에 반감을 품고 있던 요헤이는 아이들의 희망을 풀어줄 결심을 한다. 아이들과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심장에 스위치가 심어진 아이들은 국가의 끈질긴 추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하얀 옷을 입은 한 소년이 태양빛을 받으면서 하늘을 향해 한가득 팔을 벌려 날고 있는 그림이었다. 산보다도 구름보다도 높이, 몇 마리의 새와 함께 자유롭게 날고 있다. "이것이. . . . . . <꿈>." 

 

                                                                 - (책에서)


 

   잠시 새장을 탈출한 어린 새들처럼 그들의 자유는 시한부(時限附)였다. 요헤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삶에서 허용될 수 없었던 그 잠깐의 순간을 누리고 아이들은 스위치를 누르며 죽어간다. 삶이 커다란 감옥이었던 아이들은 코구레의 아버지가 보여준 그림처럼 "산보다도 구름보다도 높이" 하늘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혹독한 상황을 7 년간이나 버텨내었던 아이들이 한 순간 스위치를 누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새장을 탈출해 잠깐 본 "태양빛"과 "하늘", 그리고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들"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7 년간 살아있게 한 것이 '희망'이었다면, 아이들을 죽게 만든 것도 '희망'이 아니었나 말이다. 요헤이와 함께 도망다니며 아이들은 정말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7 년간 품어왔던 자신들의 '희망'이 정말로 "꿈" 같은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아무리 가상의 이야기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다. 어쩌다 이런 소설까지 씌인 것인지 가슴이 답답하다. 날로 치솟는 자살률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비통하다. 야마다 유스케는 이 끔찍한 이야기를 통해 무슨 뜻을 전달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이 소설은 경고등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스위치를 누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지켜보고만 있을 때는 지났다는 것. 그리고 그 스위치는 우리 손에도 쥐어져 있다는 것을 작가는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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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 후 - 10년간 1,300명의 죽음체험자를 연구한 최초의 死後生 보고서
제프리 롱 지음, 한상석 옮김 / 에이미팩토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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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살 때 나는 처음 죽음을 목격했다. 암에 걸린 엄마는 빠른 속도로 말라갔고 마지막에 가서는 정말로 살아 있는 미라(mirra)처럼 뼈와 약간의 살가죽만 남았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지자 엄마는 가까운 곳에 요강을 두었다. 요강 위에 간신히 걸쳐진 엉덩이는 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요강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던 각진 엉덩이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햇빛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보름달 빵을 조금씩 뜯어먹는 엄마는 병든 새끼고양이 같았다. 어린 동생은 그 옆에서 엄마의 빵을 뺏어먹었다. 그런 동생이 나는 징그러웠다. 빵이 아니라 엄마의 마지막 남은 살점을 뜯어먹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마지막 남은 살점을 뜯어먹힌 엄마는 오래 지나지 않아 죽었다. 엄마는 소리없이 혼자 죽었다. 다음 날 아빠가 엄마를 불렀을 때 대답이 없었다. 아빠는 다시 불렀고 여전히 대답이 없자 엄마를 살짝 흔들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 아빠는 온몸으로 죽음의 감각을 느낀 것처럼 고요했다. 그 순간이 지나고 아빠는 말했다. 죽었네. 나는 죽음을 그토록 예사롭게 취급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더욱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엄마가 죽었을 때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지 엄마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엄마를 땅에 묻은 날 밤 군에서 휴가를 받고 나온 사촌오빠 손을 잡고 걷다 담과 담 사이를 휘돌아 날아오르는 불빛을 보았다. 나는 그 불빛을 가리키면서 저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촌오빠는 도깨비불이라 했다. - 지금 생각하면 그 불빛은 반딧불이였는지도 모른다 - 죽은 영혼이 마지막으로 춤을 추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엄마한테 인사해. 나는 수줍게 웃어보이기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안녕.

 

 

 

   엄마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니 아빠와 작은아빠가 등을 보이고 앉아 계셨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아빠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밤늦게까지 함께 주말의 명화를 보고 나에게 아리랑 춤을 가르쳐주고 가끔 장판 아래 숨겨둔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돌아가셨다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돌아가셨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다. 돌아가다. 돌아간다는 말은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간다는 뜻인데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할머니의 원래 있던 자리가 있다면 나의 원래 있던 자리도 있을까? 있다면 거긴 어딜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시멘트 담벼락을 다섯 손가락 끝으로 훑으면서 걸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어린이 여름 성격학교에 참석했고 거기서 천국에 대해 배웠다. 지옥과 천국 얘기는 무서웠다. 지옥불 얘기도 무서웠지만 사람이 죽지 않고 끝없이 행복을 누리며 산다는 천국이 더 무서웠다. 삶이 있는 곳에 그림자처럼 죽음이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삶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안다. 그 생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두려울 때도 있다. 그런 공포와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직 덜 살았다고. 사실 나는 병적으로 죽음을 생각한다. 너무 힘들면 습관처럼 죽고 싶다고 읊조리기도 하지만 내 진심은 죽음이 무섭다. 삶에 대한 미련도 맞지만, 죽으면 내 자신이 어떻게 되는 건가 알 수 없어 겁이 나는 것이다. 사람들과 웃음고 눈물을 주고받던 '마음'을 가진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죽음은 인정하지만 내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어쨌든 나는 죽음 관련 책이나 영화, TV프로그램 따위를 즐겨 본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공포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보다는 조금 고상하게 죽고 싶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은 죽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서론이 굉,장히 길었다. 이제는 책 얘기를 하겠다.『죽음 그 후』는 실제로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을 연구한 보고서이다. 실제로 죽음을 체험했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하냐고 웃어넘길 수도 있겠다. 미안하지만 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죽음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임사체험자'라고 한다. '임사'란 특정인이 육체적으로 위태로운 상태가 되어 여건이 나아지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곧 의학적으로 죽음을 맞은 상태이다. 사후세계를 체험하고 살아 돌아온 이들을 전세계적으로 연구한 제프리 롱은 과학자이다. 대대로 과학을 신봉하는 집안에서 자라난 그의 죽음체험 연구 역시 과학자, 의사로서의 관심에서 출발했다. 1300명이 넘는 죽음 체험자들을 설문조사하면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들 얘기가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가였다. 그리고 그들 이야기에서 다른 체험자들과의 공통점을 찾는 일도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죽음체험의 12단계를 도출해낸다. 이는 다음과 같다.

 

 


01단계  유체이탈, 즉 의식이 몸에서 분리된다.

02단계  모든 감각이 매우 예민하게 고조된다.

03단계  감정이나 느낌이 격렬하고 대체로 긍정적이다.

04단계  터널로 들어가거나 터널을 통과한다.

05단계  신비롭거나 눈부신 빛과 만난다.

06단계  신비로운 존재, 죽은 친척, 친구와 재회한다.

07단계  시공간의 개념이 달라진 느낌이 든다.

08단계  주마등처럼 삶을 회고한다.

09단계  비현실적인 영역을 접한다.

10단계  특별한 지식을 접하거나 알게 된다.

11단계  경계나 장벽을 만난다.

12단계  자의나 타의로, 몸으로 되돌아온다.

 

 


   제프리 롱은 이 12단계를 하나하나 제시하면서 실제 인터뷰 내용과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한 해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진행한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환상이나 미신으로 여기거나 단순한 재미나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제프리 롱은 자신이 얼마나 과학적인 방식으로 사후세계에 대한 증거를 도출해냈는지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실제 죽음 체험을 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그 순간에 대해 긍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었다. '완전하다'거나 '아름답고 평온하다', '마음 가득히 무한한 사랑을 느꼈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쩐지 나는 그동안 삶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기억은 굉장히 일관적이며 강렬했다. 다시 돌아가라는 목소리에 저항하고 애원하며 거기 머물게 해달라고 했다던 여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살아있을 때에는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을 그 여자의 마음을 붙들 만큼 죽음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이라면 그곳은 우리가 '돌아갈'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이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다.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보고 들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사람의 임사체험도 알고 있다. 나 어릴 때 우리 동네 살던 아흔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출상을 하루 앞둔 날 못 박힌 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놀란 사람들이 관을 뜯어내 보니 할머니께서 벌떡 일어나셨다. 빛을 따라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미지의 목소리를 향해 단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애원했다. 자식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다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하루를 얻었고 다음 날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나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아빠를 통해 들었다. 아빠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였다.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매우 흥미를 가지고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의 엄마나 할머니, 그리고 죽음 이후 단 하루의 시간을 얻어낸 아흔의 노인이 어디로 간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추측해 볼 수는 있지만 직접 죽어보기 전까지 죽음은 끝끝내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으니까 죽음을 아무리 연구해 본들 소용 없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죽음에 대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연구한 제프리 롱이 주목한 것은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삶의 변화였다. 그들은 죽음 체험으로 삶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사랑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느꼈다고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목소리는 감동적이다.『죽음 그 후』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가치와 의미를 돌아보게 만드는 놀라운 책이다. 나는 이 책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흥밋거리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후 세계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죽음이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것은 결국 나와 주변 삶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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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 슈퍼 히어로를 읽는 미국의 시선
마크 웨이드 외 지음, 하윤숙 옮김 / 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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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털도사>는 내가 가장 즐겨보았던 만화영화 중 하나이다. 도사라고 하는 그럴싸한 이름에 비해 그는 너무 초라하다. 키작고 못생긴 외모는 이른바 루저 (loser)라고 할 수 있다. 도술 또한 신통치가 않다. 누덕봉에서 10년의 수행 동안 배운 것이라고는 머리털 도술밖에는 없다. 바보스럽고 뺀질거리기까지 하는 '머털도사'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착한 마음씨' 때문이다. 이에 대립하는 왕질악 도사는 이름처럼 킹왕짱 질이 나쁜 악의 세력이다. 누덕도사를 제거하고 세상을 장악했던 왕질악은 그러나 제자 꺽꿀이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머털도사>는 머털이와 왕질악의 대립구도를 내세워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왕질악과 꺽꿀이의 관계를 통해 '악()은 악()으로써 멸망한다'는 무서운 진리를 일깨워준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전우치> 또한 <머털도사>와 같은 맥락을 따르고 있다.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 끝에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이야기. 악의 세력이 선한 세력을 장악하더라도 우리는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끝내 선이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같이 '권선징악'은 모든 영웅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머털이와 전우치가 있다면 미국에는 슈퍼맨과 배트맨(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등등)이 있다. 만화영화를 평가절하했던 나도 슈퍼맨이나 배트맨은 알고 있다.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배트맨 신발을 신었다. 아이들은 저녁을 먹으면서 <소머즈>를 시청했다. 내 기억으로 '소머즈'는 아주 먼 거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다. 아이들이 <전원일기>나 <아들과 딸> 같은 국내드라마들보다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에 더 열광했던 것은 바로 그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었다. 내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은(어른도 마찬가지) 슈퍼 히어로에 열광한다. 슈퍼 히어로가 뭐길래. 대체 그게 뭐길래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가. 그냥 보고 즐기면 그만이지, 그깟 만화영화가 뭐라고? 우리가 '그깟 만화영화'라고 하는 것에서 나름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철학교수, 만화작가, 프로듀서, 만화광팬 등 다양한 이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과 시선으로 '슈퍼 히어로'를 고찰하고 있다.

 


   갈락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악의 범위를 초월해 있는 존재로, 즉 도덕적 범주의 틀을 벗어나 이 범주에 적용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지는데도 여기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계획한 일에 대해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비록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초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애초 의도한 목적을 구분하면서 둘의 윤리적 차이를 지적하고자 한다. 갈락투스는 자신의 존재와 힘을 지탱하기 위해 행성을 먹어치워야 한다. 이것이 그의 애초 의도다. 영양이 풍부한 좋은 식사를 찾고자 하는 데 애초 의도가 있다.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똑똑하고 지각력 있는 존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지만 이는 불해한 부작용일 뿐이고 애초 자신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왓처에게 항변한다. (책에서)


 

   <판타스틱 4>의 등장인물 갈락투스가 기억에 남는다. 갈락투스는 단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별들을 먹어삼키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악한 것이 되고 만다. 갈락투스가 왓처의 설득에 넘어가 마침내 지구를 포기하는 부분은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갈락투스와 실버서퍼의 관계도 인상적이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힘'이다. 전우치나 머털도사가 온몸을 던져 싸우는 것은 세상을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힘'이 악의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배트맨이나 슈퍼맨이 싸우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인적인 힘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들 슈퍼 히어로는 보여준다.

 

 


     만화책 속에는 언제나 슈퍼 히어로가 펼치는 화려한 액션이 가득하다.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펼쳐지고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하며 매우 생동감 있는 그림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재치 있는 유머가 번뜩인다. 게다가 실질적인 지혜까지도 마주하게 된다. 만화책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다소 놀랍게 들릴 것이다. 문화 전반에서 지혜가 자취를 감춰버린 것 같은 시대에 슈퍼 히어로 만화 속에서 지혜가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이 드러나고 규정되고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책에서)


 

 

    미국의 영웅담에서 이렇게나 많은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만화영화로만 봤다면 놓쳤을 이야기들을 매우 논리적이고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미국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에르케고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름만 알고 있거나 이름조차 몰랐던 슈퍼 히어로들의 탄생비화와 스토리 전개까지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언젠가 영화로 만났던 <판타스틱 4>. 손가락에서 불을 뿜고, 헐크처럼 괴물로 변신하고, 또 뭐더라? 아무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 네 명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그들의 '초인적인 능력'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그들 주변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에 숨겨진 현실의 은유를 나는 간과하고 만 것이다. 내가 놓쳐버린 그것을 이 책은 돌려주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같은 이야기, 같은 인물을 두고 다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해서 어렵거나 낯설 것이라고 지레 겁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음 직한 문제들을 책을 읽는 동안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 내재된 다양한 가치를 묻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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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의 지붕
마보드 세라지 지음, 민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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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르시아 양탄자 한 올 한 올엔 끈기 있게 바늘과 실을 움직인 손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

                                                                                                                                      (책에서)


 

 


   이란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나라다. 국내에서는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로 알려진 감독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알게 된 것은 '체리향기(1998)'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하늘이 더할 수 없이 낮고 무거웠던 오후였다. 나는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 여러 개를 빌렸다. 그 중 한 편이 '체리향기'였다. 포장되지 않은 붉은 흙길이 끝없이 구불거렸고, 결코 끝이 없을 것 같은 그 길에서 남자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선문답처럼 이어지는 단조로운 대화와 붉은 흙먼지 날리는 풍경은 단번에 나를 매혹했다. 나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들은 여백을 강조하는 수묵화를 닮아 있다. 한 번도 이란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란'을 생각하면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보여준 이란의 이미지들이 구름처럼 떠오른다. 굽이진 골목, 똥그랗고 검은 눈동자, 휘휘한 붉은 흙길 같은 것들.

 

 

    이야기의 시작은 1974년 겨울, 루즈베 정신병원이다. 하나의 짤막한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잿빛' 이야기에서 독자는 '나'가 왜 정신병원에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내 밝은 공간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테헤란의 지붕 위. 별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열일곱 소년들에게로 말이다. 1974년 겨울과 1973년 여름에서 가을까지의 시간적 배경이 갈마들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1970년대 이란은 "친미 독재 정권 팔레비 왕조가 비밀경찰 사바크를 앞세워 반정부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던 암흑의 시기"였다. 이 "암흑의 시기"에도 '별'처럼 빛을 내는 것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청춘'이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이 내 인생을 상징하는 듯했다. 골목을 질주하며 울부짖는 바람이 앞으로 닥쳐올 더 혹독한 추위를, 더 비참한 날들을 예고하는 듯했다. 얼굴 살갗이 팽팽하고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 쥐고 있는 손도 곱아서 감각이 없었다. 나는 자리네 집 지붕으로 넘어가 커다란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리에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순 없었지만 나는 자리가 문가에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손톱으로 성에를 긁어냈다. 그리고 그녀가 안에서 읽기 쉽도록 거꾸고 "사랑해"라고 썼다. (271쪽)

 




    지붕 위에 올라앉아 앞날에 대한 꿈, 가슴에 품은 소녀들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파샤와 아메드는 청춘의 아름다운 힘을 보여준다. 혁명의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테헤란에서 그들의 여름은 풋사랑의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들도 시대의 피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독재 정권에 대항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닥터'를 기점으로 이들의 장밋빛 청춘은 막을 내린다. 책으로 세상을 배워왔던 파샤는 이제 자신도 세상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불온도서, 삐라공작, 분신 등으로 친미 독재 정권에 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메리칸드림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나 시대의 암흑기는 존재하고 그 시대를 통과하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다.

 


 기나긴 잔혹한 슬픔은 끝나리라.

 기도는 내가 보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하나쯤은 내가 의도한 과녁을 맞힐 것이다. (108쪽)







   책의 종이색은 시간적 배경을 따라 잿빛과 흰색으로 바뀐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싸우는 힘과 그들을 막아서는 힘. 정신병원과 평온한 여름날들의 대비가 이어지는 이 작품은 그러나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 부분 부분 싱거운 전개와 묘사가 아쉽다. 기억을 잃고 헤매는 '나'의 이야기가 새로운 사실도 추가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구성은 이야기의 진행을 늘어지게 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이 약간의 아쉬움을 제외하면 장점이 많은 소설이다.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문장들, 적당한 유머와 위트로 암흑기를 지나는 소년의 성장통을 아름답게 묘사해내고 있다. 소설 곳곳에서 이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에 이어 또 한 명의 이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이 고맙다. 마보드 세라지는 무한한 밤하늘을 펼쳐보여주면서 잔혹한 시대적 아픔이나 아린 성장통, 그리고 '당신의' 아픔까지도 저 수많은 별들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만에 밤하늘을 보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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