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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여행처럼 - 지금 이곳에서 오늘을 충만하게 사는 법
이지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3월
평점 :
여행기나 여행을 주제로 한 다양한 책들이 쏟아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행'이라는 말에서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울림을 느끼는 것 같다. 그 울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순히 일상이 무료해서라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한 목적 이외의 매력이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그토록 여행에 열광하는 것일까.
방랑과 방황은 존재 자체의 숙명인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페졸리에 의하면 방랑과 방황 욕구는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은 잃어버린 성배, 혹은 하늘에 있는 별을 찾아 떠도는 욕망의 표현이고 무한의 손길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다. '존재(existence)'라는 어원은 'ex-sistence'에서 왔다. 즉 존재란 '자아에서 벗어난 타인에게 열린다'는 것을 것을 의미하며 존재는 불변하는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로, 혹은 더 큰 타자 즉 우주의 섭리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존재는 늘 자신의 울타리를 넘고 싶은 갈망에 시달리는 것이다. - (책에서 옮김)
사회학자 마페졸리는 인간의 방랑, 방황욕구가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로지 마페졸리의 말로써 여행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현실과 욕망의 불화, 사회 규범 부적응 따위의 개인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이 본디 잠재해 있던 방랑 욕구를 깨우는 것.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인간을 떠돌게 하는 것은 '불만(不滿)'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페졸리의 말을 내 식대로 살짝 변형해 보면 '불만(不滿)'은 존재 자체의 숙명인 것이다. 이것이 '끝없는 여행'의 이유이다. 다시 마페졸리의 말을 인용해 보면,
'역동적 뿌리내리기'는 뿌리를 내리면서도 그것을 거부하고, 떠돌면서도 또한 동시에 뿌리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곳에든 저곳에든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내린다 함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고, 돈을 벌며, 보람과 의미를 찾으며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뿌리를 내리는 만큼 여행자들은 뿌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것이 존재의 비극이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역동적으로 뿌리를 내릴 때 삶은 역동적이 된다. 역동적 뿌리내리기는 떠돎과 안주를 동시에 허락하지 않지만 두 가지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 (책에서 옮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 한다. 돌아옴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여행자는 돌아온다.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한 자리에 순응하며 정착하는 삶도 물론 좋다. 그런데 '잡을 수 없는 바람' 같은 존재 방식은 더욱 매혹적이다. 마음속에 바람을 가두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기계적인 삶은 마페졸리가 말한 본능적 방랑 욕구를 부추기는 것 같다. 1990년대 해외여행이나 배낭여행이 순수한 호기심이나 낭만적 감성에서 비롯한 유행 같은 것이었다면 오늘날 여행의 대부분은 '일탈욕구'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에 비해 다방면에서 풍족해지고 편안해진 우리 삶은 동시에 삭막하고 메말라 있다.
이지상 씨는 20여 년 동안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은유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걷고 소비하는 진짜 여행 말이다. 사람들은 부러움과 놀람 섞인 눈을 모로 굴리며 물어올 것이다. 대체 어떻게? 여행을 하려면, 여행 아니라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지상 씨가 고물가 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여행가'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덜 쓰고 덜 갖는 소박한 삶의 자세 덕분이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삶의 원리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를 얻는 대신 욕망을 줄여나갔다. 그러면서 생활 터전을 떠났다 돌아오고 또 떠나는 여행자의 삶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떠도는 행위가 되풀이되고 익숙해지면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방랑 속에서도 권태는 반복되고 있었다는 사실.
얘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행자가 있단다. 하나는 지도를 보는 여행자고, 또 하나는 거울을 보는 여행자지. 지도를 보는 여행자는 떠나려는 여행자고, 거울을 보는 여행자는 돌아오고 싶어하는 여행자야. - (책에서 옮김)
지도를 보며 떠나는 여행자의 시선은 외부로 향한다. 반면 거울을 보는 여행자는 그 시선을 내면으로 돌린다. 지도를 보며 더 넓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던 젊은이 이지상은 이제 잠시 발을 멈추고 거울을 들여다 본다. 늙어가는 그가 펼쳐보이는 거울 속 빛과 그림자들에는 간간이 지도가 일렁이기도 한다. 떠돎과 안주의 성향은 끝없이 공존하는 것이다. 불안한 유목민적 삶에서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불필요한 욕망의 절제와 가치관의 확립이었다. 타인이 정한 가치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을 누리는 것이다. 멋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본 적 있는 그러나 지금은 다독이고 다독여 잠재운,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런 바람을 풀어놓고 살아가는 모습은 나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어준다.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그렇게 깊은 수렁 속에 빠져 있던 중, 불현듯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의지해야 할 것은 '성스러운 장소'도 아니고, '성스러운 순간'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덧없는 것일 뿐. 결국 세상으로부터의 '출구'와 세상의 '중심'은 다 내 몸과 마음 속에 있었다. 내 몸이 신전이고 성소였다. 또한 성스러운 순간은 그 신전에 깃든 내 마음이 그리는 꿈이었다. 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나의 몸과 마음이었다. - (책에서 옮김)
우리는 자주 여행을 꿈꾼다. 그 중 일부는 실제로 여행길에 오르기도 한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혹은 집안의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피난가는 모양으로 길을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닐 것이다. 삶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너무 식상하지만, 그래도 삶은 여행이고 여행은 삶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욕망을 배낭처럼 짊어지고 길을 간다. 다른 사람 가는 길이 더 멋져보여 한눈을 팔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똑같은 구멍에 재차 빠지면서 절망하기도 한다. 이지상 씨가 여행길에서 만났다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후손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생존만큼 숭고한 것은 없다". 어쩐지 눈물이 핑 도는 말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생존보다 더 숭고한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만큼 중요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여행지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지상 씨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에서 상처받고 외로울 때 나는 이 책을 펼쳐볼 것 같다.
난 무능력자가 아니야. '미운 백조'지. 힘내자. 언젠가는 내 세상을 찾아 훨훨 날아올라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