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의 지붕
마보드 세라지 지음, 민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르시아 양탄자 한 올 한 올엔 끈기 있게 바늘과 실을 움직인 손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

                                                                                                                                      (책에서)


 

 


   이란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나라다. 국내에서는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로 알려진 감독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알게 된 것은 '체리향기(1998)'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하늘이 더할 수 없이 낮고 무거웠던 오후였다. 나는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 여러 개를 빌렸다. 그 중 한 편이 '체리향기'였다. 포장되지 않은 붉은 흙길이 끝없이 구불거렸고, 결코 끝이 없을 것 같은 그 길에서 남자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선문답처럼 이어지는 단조로운 대화와 붉은 흙먼지 날리는 풍경은 단번에 나를 매혹했다. 나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들은 여백을 강조하는 수묵화를 닮아 있다. 한 번도 이란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란'을 생각하면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보여준 이란의 이미지들이 구름처럼 떠오른다. 굽이진 골목, 똥그랗고 검은 눈동자, 휘휘한 붉은 흙길 같은 것들.

 

 

    이야기의 시작은 1974년 겨울, 루즈베 정신병원이다. 하나의 짤막한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잿빛' 이야기에서 독자는 '나'가 왜 정신병원에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내 밝은 공간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테헤란의 지붕 위. 별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열일곱 소년들에게로 말이다. 1974년 겨울과 1973년 여름에서 가을까지의 시간적 배경이 갈마들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1970년대 이란은 "친미 독재 정권 팔레비 왕조가 비밀경찰 사바크를 앞세워 반정부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던 암흑의 시기"였다. 이 "암흑의 시기"에도 '별'처럼 빛을 내는 것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청춘'이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이 내 인생을 상징하는 듯했다. 골목을 질주하며 울부짖는 바람이 앞으로 닥쳐올 더 혹독한 추위를, 더 비참한 날들을 예고하는 듯했다. 얼굴 살갗이 팽팽하고 바지 주머니 속에서 주먹 쥐고 있는 손도 곱아서 감각이 없었다. 나는 자리네 집 지붕으로 넘어가 커다란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유리에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순 없었지만 나는 자리가 문가에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손톱으로 성에를 긁어냈다. 그리고 그녀가 안에서 읽기 쉽도록 거꾸고 "사랑해"라고 썼다. (271쪽)

 




    지붕 위에 올라앉아 앞날에 대한 꿈, 가슴에 품은 소녀들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파샤와 아메드는 청춘의 아름다운 힘을 보여준다. 혁명의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테헤란에서 그들의 여름은 풋사랑의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들도 시대의 피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독재 정권에 대항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닥터'를 기점으로 이들의 장밋빛 청춘은 막을 내린다. 책으로 세상을 배워왔던 파샤는 이제 자신도 세상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불온도서, 삐라공작, 분신 등으로 친미 독재 정권에 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메리칸드림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나 시대의 암흑기는 존재하고 그 시대를 통과하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다.

 


 기나긴 잔혹한 슬픔은 끝나리라.

 기도는 내가 보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하나쯤은 내가 의도한 과녁을 맞힐 것이다. (108쪽)







   책의 종이색은 시간적 배경을 따라 잿빛과 흰색으로 바뀐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싸우는 힘과 그들을 막아서는 힘. 정신병원과 평온한 여름날들의 대비가 이어지는 이 작품은 그러나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 부분 부분 싱거운 전개와 묘사가 아쉽다. 기억을 잃고 헤매는 '나'의 이야기가 새로운 사실도 추가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구성은 이야기의 진행을 늘어지게 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이 약간의 아쉬움을 제외하면 장점이 많은 소설이다.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문장들, 적당한 유머와 위트로 암흑기를 지나는 소년의 성장통을 아름답게 묘사해내고 있다. 소설 곳곳에서 이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에 이어 또 한 명의 이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이 고맙다. 마보드 세라지는 무한한 밤하늘을 펼쳐보여주면서 잔혹한 시대적 아픔이나 아린 성장통, 그리고 '당신의' 아픔까지도 저 수많은 별들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만에 밤하늘을 보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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