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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 슈퍼 히어로를 읽는 미국의 시선
마크 웨이드 외 지음, 하윤숙 옮김 / 잠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머털도사>는 내가 가장 즐겨보았던 만화영화 중 하나이다. 도사라고 하는 그럴싸한 이름에 비해 그는 너무 초라하다. 키작고 못생긴 외모는 이른바 루저 (loser)라고 할 수 있다. 도술 또한 신통치가 않다. 누덕봉에서 10년의 수행 동안 배운 것이라고는 머리털 도술밖에는 없다. 바보스럽고 뺀질거리기까지 하는 '머털도사'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착한 마음씨' 때문이다. 이에 대립하는 왕질악 도사는 이름처럼 킹왕짱 질이 나쁜 악의 세력이다. 누덕도사를 제거하고 세상을 장악했던 왕질악은 그러나 제자 꺽꿀이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머털도사>는 머털이와 왕질악의 대립구도를 내세워 '선(善)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왕질악과 꺽꿀이의 관계를 통해 '악(惡)은 악(惡)으로써 멸망한다'는 무서운 진리를 일깨워준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전우치> 또한 <머털도사>와 같은 맥락을 따르고 있다.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 끝에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이야기. 악의 세력이 선한 세력을 장악하더라도 우리는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끝내 선이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같이 '권선징악'은 모든 영웅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머털이와 전우치가 있다면 미국에는 슈퍼맨과 배트맨(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등등)이 있다. 만화영화를 평가절하했던 나도 슈퍼맨이나 배트맨은 알고 있다.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배트맨 신발을 신었다. 아이들은 저녁을 먹으면서 <소머즈>를 시청했다. 내 기억으로 '소머즈'는 아주 먼 거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다. 아이들이 <전원일기>나 <아들과 딸> 같은 국내드라마들보다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에 더 열광했던 것은 바로 그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었다. 내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은(어른도 마찬가지) 슈퍼 히어로에 열광한다. 슈퍼 히어로가 뭐길래. 대체 그게 뭐길래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가. 그냥 보고 즐기면 그만이지, 그깟 만화영화가 뭐라고? 우리가 '그깟 만화영화'라고 하는 것에서 나름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철학교수, 만화작가, 프로듀서, 만화광팬 등 다양한 이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과 시선으로 '슈퍼 히어로'를 고찰하고 있다.
갈락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악의 범위를 초월해 있는 존재로, 즉 도덕적 범주의 틀을 벗어나 이 범주에 적용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지는데도 여기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계획한 일에 대해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비록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초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애초 의도한 목적을 구분하면서 둘의 윤리적 차이를 지적하고자 한다. 갈락투스는 자신의 존재와 힘을 지탱하기 위해 행성을 먹어치워야 한다. 이것이 그의 애초 의도다. 영양이 풍부한 좋은 식사를 찾고자 하는 데 애초 의도가 있다.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똑똑하고 지각력 있는 존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지만 이는 불해한 부작용일 뿐이고 애초 자신의 행동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왓처에게 항변한다. (책에서)
<판타스틱 4>의 등장인물 갈락투스가 기억에 남는다. 갈락투스는 단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별들을 먹어삼키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악한 것이 되고 만다. 갈락투스가 왓처의 설득에 넘어가 마침내 지구를 포기하는 부분은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갈락투스와 실버서퍼의 관계도 인상적이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힘'이다. 전우치나 머털도사가 온몸을 던져 싸우는 것은 세상을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힘'이 악의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배트맨이나 슈퍼맨이 싸우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인적인 힘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들 슈퍼 히어로는 보여준다.
만화책 속에는 언제나 슈퍼 히어로가 펼치는 화려한 액션이 가득하다.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펼쳐지고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하며 매우 생동감 있는 그림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재치 있는 유머가 번뜩인다. 게다가 실질적인 지혜까지도 마주하게 된다. 만화책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다소 놀랍게 들릴 것이다. 문화 전반에서 지혜가 자취를 감춰버린 것 같은 시대에 슈퍼 히어로 만화 속에서 지혜가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이 드러나고 규정되고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책에서)
미국의 영웅담에서 이렇게나 많은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만화영화로만 봤다면 놓쳤을 이야기들을 매우 논리적이고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미국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에르케고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름만 알고 있거나 이름조차 몰랐던 슈퍼 히어로들의 탄생비화와 스토리 전개까지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언젠가 영화로 만났던 <판타스틱 4>. 손가락에서 불을 뿜고, 헐크처럼 괴물로 변신하고, 또 뭐더라? 아무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 네 명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그들의 '초인적인 능력'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그들 주변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에 숨겨진 현실의 은유를 나는 간과하고 만 것이다. 내가 놓쳐버린 그것을 이 책은 돌려주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같은 이야기, 같은 인물을 두고 다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해서 어렵거나 낯설 것이라고 지레 겁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음 직한 문제들을 책을 읽는 동안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 내재된 다양한 가치를 묻고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