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Il Y A Longtemps Que Je T'aime,2008) 라는 프랑스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친자 살해를 저지르고 15년 간을 감옥에서 보낸 여자(줄리엣)가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라는 또 다른 감옥 안에서 서툴게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영화는 시종 줄리엣의 눈, 그 커다랗고 텅 빈 구렁 같은 눈동자를 놓치지 않는다. 눈만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 눈빛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과 마음을 붙들어 놓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끈덕지게 따라붙는 그 눈동자의 여운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담배의 재를 떨어내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그 눈빛에 아주 질려버렸다. 『브로덱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글쓴이와 그 영화의 감독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필립 클로델은『브로덱의 보고서』에서 사람의 "눈(目)은 나이가 없다고, 사람은 어린아이의 눈을 간직한 채 죽는다고, 어느 날 세상을 향해 연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세상을 놓지 않던 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죽는다고" 쓴다. 텅 빈 구렁 같던 여주인공의 눈빛이 나를 사로잡았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여자의 눈빛은 '거울'이었다.
"그자는 거울 같았어. 알겠니, 굳이 말이 필요 없었어. 그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지." (책에서)
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마을에 낯선 사람이 흘러들어오면서 빚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브로덱의 보고서』에서 신부가 이야기하듯 안더러(타인)는 거울 같은 자였다. 광대 같은 행색을 하고 연기처럼 나타난 안더러가 그려낸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에는 놀랍도록 진실한 그들 생의 과정과 비밀이 담겨 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알 수 없는 그 '타인'은 이상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나마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이름이 없다.
"줄리엣! 줄리엣!"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답한다. 네, 여기 있어요.『브로덱의 보고서』에서는 브로덱이 자신의 이름을 네 번이나 얘기하면서 끝난다. 내 이름은 브로덱. 나는 그 일과 무관하다. 브로덱, 이게 내 이름이다. 브로덱. 부디, 기억해 주시기를. 브로덱.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이다. 한 존재를 세상과 연결해 주는 '이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에서 줄리엣이 그러하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를 의식하게 해준다. 이름이 없다고 하여 존재도 무(無)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고유한 이름은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안더러는 이름이 없다. 아니, 이름을 묻는 마을 사람들에게 침묵한다. "세상을 향해 연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세상을 놓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눈(目)처럼 통성명을 하는 것도 일종의 소통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안더러는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눈(目)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을 보여주지는 않는 자가 뚫어지게 나를 관찰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끔찍한 전쟁까지 치른 마을 사람들은 두렵고 불안하다. 안더러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필립 클로델은 두려움이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시켜가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상해. 별 생각 없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을 저지르지. 그런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을 안고서는 계속 살아갈 수가 없는 거야. 내다 버려야 하지. 그럼 나를 만나러 와. 왜냐하면 그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나한테 다 얘기하지. 나는 하수구야, 브로덱. 나는 신부가 아니라 인간 하수구야. 사람들이 편해지려고, 가벼워지려고 자기들의 온갖 피고름과 쓰레기를 내다부을 수 있는 뇌를 가진 인간. 그러고 나서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 버려. 새사람이 되어서. 깨끗해져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서. (책에서)
감옥에서 출소한 줄리엣(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2008)은 자신을 옥죄는 또 하나의 감옥에서 살아간다. '죄의식'이라는 감옥이다.『브로덱의 보고서』에서 마을 사람들이 브로덱에게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맡기는 것도 죄의식 때문이다. "그 보고서를 읽는 사람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필립 클로델은 두 작품에서 '죄의식'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백'의 형식을 빌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줄리엣은 자신이 왜 여섯 살 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는다.『브로덱의 보고서』에서 마을 사람들을 죄의식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마을의 신부이다. 고백성사라는 형식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정화된다.
『브로덱의 보고서』에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은 점차 얼개를 잡아간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브로덱이 마을을 떠날 때 그 상징들은 불꽃처럼 폭발한다. 예수상이 달린 십자가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봤을 때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이 사라진 것이다. "마을과 함께 모든 것, 얼굴, 강, 사람, 고통, 샘물, 내가 막 지나온 오솔길, 숲, 바위"가 한순간에 지워져 버린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지." 늙은 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우리 지방 출신이 아니라서, 아주 먼 곳에서 왔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넌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 항상 사물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있었거든……. 항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지." (책에서)
소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양복장이 빌리시' 이야기는 후반부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브로덱이 어릴 적 페도린이 들려준 이 옛날 이야기에는 놀라운 상징이 숨어있다. 가난한 양복장이 빌리시는 어머니와 아내, 어린 딸과 함께 피토포이라는 '상상의 도시'에 산다. 어느 날 왕이 보낸 기사 셋이 그를 찾아와 왕을 위한 옷을 지어 달라고 주문한다. 빌리시는 멋진 옷을 바쳤고, 기사는 이틀 후에 왕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 뿐이었다. 슬픔에 찬 빌리시는 마지막 기사가 옷을 주문했을 때 왕의 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기사는 말한다. 왕에게는 삶과 죽음을 정하는 힘이 있는데, 네가 오래 전부터 바라던 딸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빌리시는 이미 자신에게는 딸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기사가 빌리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빌리시, 왕이 네 어머니와 아내를 빼앗아 갔을 때 너는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네가 갖지 못한 딸을 주려고 하셨다. 왜냐하면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그 딸이 실은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사리를 구분하지 못하는구나. 너는 정말로 삶보다 꿈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느냐?'
브로덱이 완성된 보고서를 가져갔을 때 오어슈비어는 그것을 한 번 읽고 불 속으로 던져버린다. 보고서라는 일종의 고백성사를 통해 그들의 죄는 재로 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불타 없어진 것이 그들의 죄뿐은 아닌 것 같다. 보고서와 함께 슐로스 여인숙과 안더러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함께 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브로덱의 보고서는 허구였다는 것. '모든 것을 파괴하고 폭로하는' 전쟁의 희생자 브로덱이 파괴된 자신의 인간성과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바로 허구의 보고서가 아니었나 말이다. 지옥과도 같은 삶 속에 내던져진 브로덱에게는 꿈이 간절했던 것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그의 다른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특히 필립 클로델은, 비록 두 작품밖에는 알지 못하지만, 작품 곳곳에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들을 장치적 도구로서 마련해놓고 있다. 주의 깊게 살피면 그 상징과 이미지들은 폐부를 찌른다. 그것은 거울과도 같아서 오랫동안 똑바로 쳐다보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다시 거울 앞에 서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