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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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으로 오른편 사람들의 시야를 차단하고, 신문을 접어 왼손에 바꿔 들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면서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코트 소매 단추에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반사되어 시야 한 귀퉁이로 미끄러지듯이 흘러갔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지갑 끝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뽑아낸다. 손끝에서 어깨로 떨림이 흐르고 따끈한 열기가 조금씩 몸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주위의 다양한 인간들, 그 무수히 교차하는 시선이 이 부분만은 공백이 되어 전혀 날아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긴장하는 손가라고가 지갑의 접점을 견뎌내면서, 접어놓은 신문 틈새에 지갑을 끼우고 오른손으로 바꿔 들어 내 코트 안 주머니에 넣었다. 숨을 조금씩 토해내고 체온이 다시 오르는 것을 의식하며 눈으로 주위를 확인했다. 손가락에는 아직도 이물을 잡았던 긴장감이, 타인의 영역에 비집고 들어섰던 저릿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9쪽)

 

   니시무라는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지갑을 터는 소매치기이다. 그런데 니시무라는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소매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소매치기 행위에 경제적 절박감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는 돈이 궁하지 않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소매치기를 한다.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갑을 끼우고 슬쩍 꺼낼 때의 그 짜릿한 긴장감과 동시에 손 안에 느껴지는 이물감을 즐긴다. - 니시무라가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터는 순간이 어찌나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는지, 책을 읽는 나 자신 마치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타인의 지갑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 니시무라는 소매치기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범을 초월하고 거기서 쾌락과 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그 자신도 타인이 만들어 놓은 규범이나 도덕관념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다. 범죄자로서 '그들(사회적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반인)'이 만든 울타리 바깥 쪽에 서 있는 니시무라는 그 너머를 동경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엄숙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어떻게 걸어가도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멀고 아름다운" 탑은 그런 동경과 무의식적인 도덕관념, 죄의식 같은 것을 상징하는 일종의 장치로서 작용하고 있다.

 


   기다란 공동주택과 키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지저분한 골목에서 올려다보면 그 탑은 언제나 흐릿하게 보였다. 안개에 뒤덮여 윤곽이 애매한, 오래된 백일몽 같은 탑이었다. 어딘가 외국의 것처럼 엄숙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어떻게 걸어가도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그 탑은 멀고 아름다웠다. (201쪽)




   니시무라의 도벽은 '배고픔'에서 시작되었다. 고아였던 그는 편의점에서 훔친 삼각김밥을 입에 밀어넣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 행위에 죄도 악도 느끼지 않았다. 성장을 요구하는 몸뚱이는 수많은 먹을 것을 원하고, 그것을 손에 넣어 먹는다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는 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덕이나 규범도 생존 본능이 충족되고 나서의 일이라는 것.

 



   머리를 길게 기른 한 아이가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있었다. 외국에서 사온 거야. 아이의 목소리는 크고 날카롭게 울렸다. 반짝반짝 빛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자동차는 아이의 손에 들린 작은 컨트롤러에 따라 속도를 올려 내달렸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술렁거렸다.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진 것을 자랑하는 그 아이는 추악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추악함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 자동차가 없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장난감 자동차를 훔쳤다. 외국의 물건은 내게 왜 그런지 그 탑을 연상시켰다. (202/203쪽)

 

   어린 니시무라의 도둑질은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진 것을 자랑하는" "추악한" 아이의 장난감을 훔친다. 그 장난감은 그러나 그의 손에 들어오자 반짝임이 사라진다. 니시무라는 그것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자동차를 진흙탕에 내버린다. 위화감을 주는 외국의 장난감 자동차에서 니시무라는 탑을 연상한다. 이때, 어린 니시무라는 자신이 속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를 실감했을 것이다. 다른 아이가 부모로부터 선물 받은 외제 장난감을 훔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끝내 자기 것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니시무라는 그 세계, 눈을 돌린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탑처럼 "멀고 아름다운" 그 세계를 잊을 수가 없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탑처럼, 니시무라의 마음속에는 끝내 가 닿을 수 없는 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니시무라의 소매치기 행위의 주요 동기는 거기에 있다. 비록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 반짝임이 멈춘다고 하더라도 소매치기 행위를 하는 그 순간에는 손끝으로나마 그 세계를 훔쳐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시무라의 소매치기 행위는 "멀고 아름다운" 세계에 섞일 수 없는 자의 절망적인 몸부림, 그것이다.

 



   제목 <쓰리>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첫 번째 의미가 '소매치기'라는 것은 이미 드러났다. '쓰리'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셋(three)이다. 이제 기자키를 소개해야 할 시점이다. 야쿠자 두목 기자키는 작품에서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니시무라가 자신이 소속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망감과 동경에서, 때로는 무의식적이나마 후회와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소매치기를 하는 -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소매치기 소년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 반면 기자키는 자신의 기분 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조종하는 데에서 악마적 쾌감을 느낀다.



 

   네가 만일 악에 물들고 싶다면 결코 선을 잊어서는 안 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면서 실실 웃는 것 따위로는 시시하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면서 딱하다고 생각하고 가엾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괴로움이나 그녀를 키운 부모에까지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정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그러면서 좀더 큰 고통을 가해야 해. 정말 기막히게 멋있지, 그 순간은! (...) 나는 인간을 끔찍하게 죽인 직후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고, 길 가던 아이들이 웃는 얼굴을 보고 아, 참 귀엽구나, 생각할 수 있어. 그 아이가 고아라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죽일 수도 있어. 아아, 가엾어, 라고 생각하면서! 신이나 운명에 만일 인격과 감정이 있다면, 이건 바로 그 신이나 운명이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착한 인간이나 어린애가 불합리하게 죽어가는 이 세계에서!" (165/166쪽)

 

   기자키는 자신의 검은 권력을 신격화하여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니시무라가 기자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기자키는 니시무라의 익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잠깐 언급했듯이 기자키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 더해 제 손아귀에 다른 사람의 운명을 놓고 아슬아슬한 게임을 즐긴다. 그런데 더 잔인한 것은, 그 표적이 된 자의 운명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니시무라를 표적으로 정한 기자키는 그에게 세 가지 임무를 맡긴다. 제목 '쓰리(three)'가 뜻하는 두 번째는 바로 이 '세 가지 임무'이다. 니시무라는 모든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지만 결국 칼에 맞아 죽어간다. 그것이 기자키가 정해놓은 니시무라의 운명이었다.



 

   <흙 속의 아이>, <모든 게 우울한 밤에>로 국내에 알려진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최근작 <쓰리掏摸>는  절대 악의 화신 기자키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니시무라를 내세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크고 검은 힘과, 그 힘의 그늘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사회적 약자를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낸다. 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 진지하고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섬세한 심리묘사는 가독성을 높인다. 일단 책을 펼치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과연 오에 겐자부로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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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 요리 - 나를 위한 소박한 가정식
이보은 지음 / 사피엔스21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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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을 좋아해서 큰일이라고 남편은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때로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양파, 마늘 냄새 안 풍기면서 식사를 해 보고 싶을 뿐이다. 간단한 찌개나 나물 무침 하나에도 다양한 재료와 과정이 필요하다. 재료를 다듬어 썰거나 데치고, 끓이거나 볶아대고 간을 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내가 만들고도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있지만, 대개 그 맛도 모르고 식사를 할 때가 많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은 즐겁고 고귀한 일. 그런데 사람이라, 가끔은 음식과 씨름하는 것이 귀찮다. 오늘은 뭘 해먹나 생각하는 일도 지칠 때가 있다. 매끼 손수 차려본 사람은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주로 어머님이 해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분가하고 초기에는 카레니, 라면이니 하는 것들을 먹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던 것이 결혼 이 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는 제법 구색을 갖추어 차려놓게 되었다. 이전에도 나는 요리에 젬병이는 아니었고 다만 게을렀을 뿐이다. 그래도 반찬투정 한 번 안 했던 착한 남편은 내가 차려주는 밥상이 제일 맛있다 한다.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예뻐서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음식을 만든다. 그런데 차려놓은 밥상은 그제나 어제나 오늘이나 비슷비슷하다. 재료는 한정되어 있고, 만들 줄 아는 음식도 한정되어 있는 탓이다. 그러면서 무슨 자신감인지, 무심함이나 게으름 때문이겠지만, 요리책 한 권 없었다. 가끔 네이버 키친 같은 데서 새로운 요리법을 눈동냥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근래에는 요리책을 하나 둘 보게 되었다.《한 접시 요리》는 그 요리책들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남편과 나를 위해 적합한 요리책이다. '나를 위한 소박한 가정식'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보은 씨의 요리책에는 수수하고 정갈한 음식들이 실려 있다. 모양은 소박하지만, 맛도 영양도 뒤지지 않는다. 남편이나 나는 빛깔 요란하고 들쩍지근한 이국의 음식들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어려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위에 올라오던 그 익숙한 모양과 냄새와 맛을 좋아한다. 그런데 먹던 걸 먹고 또 먹다 보면 물릴 때가 있잖나. 대부분의 집 냉장고 문을 열면 들어 있을 재료들로 조금, 아주 약간 색다른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레시피들이 이 책에는 들어있다.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입맛과 들어맞을 법한 음식들이 흐뭇하다.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면 어쩌나 걱정할 것도 없다.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간편한 '한 접시 요리'들이기 때문이다. 바쁘거나 게을러 제대로 한 상 차려먹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활용 가치가 높을 것 같다.

 

 

   요리책을 사놓고도 그 재료를 구하기 어렵거나 만드는 과정이 복잡해서 시도조차 못해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한 접시 요리》는 그럴 걱정이 없다. 나는 벌써 몇 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보았다. 냉장고에 어중간하게 남은 반찬들을 해결해주는 '후다닥 볶음밥'이나 '장조림 비빔소면', '두부밥' 같은 것들은 만들기도 간편하고 맛도 깔끔했다. 나는 국수를 좋아해서 자주 만들어 먹는 편이다. 잔치국수를 해 먹을 때에는 멸치 육수를 낸다. 다시마와 함께 넣어서 끓였다. 그런데 멸치 국물을 미리 내놓은 다음에 다시 끓일 때 다시마를 넣으면 깊고 구수한 맛이 난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해보았는데,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국물 맛이 좀 더 시원하고 깊어진 것 같았다.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었다. 일상에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작지만 유용한 정보들을 배울 수 있어 좋다. '청국장 마파 두부'나 '장조림 비빔소면' 같은 요리처럼 평소에 우리가 해먹던 음식을 조금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요리법도 유익하다. 요리를 하려면 무엇보다 재료와 양념이 갖춰져야 한다. 맛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더 중요하다. 'Special Tip'에서는 천연국물, 천연조미료, 천연 스파이스 만드는 법과 드레싱과 맛 양념 만드는 법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나와 같은 초보주부들에게는 정말로 유익한 정보이다.

 

 

   첫 번째 접시부터 일곱 번째 접시까지(각 장을 주제별로 나누고 있다) 간편하게 만들고 먹을 수 있지만, 제대로 차려진 한 상 못지않게 맛과 영양을 챙길 수 있는 소박한 음식들을 만날 수 있는 이보은의 《한 접시 요리》 강추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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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 - 헬로우 Mr. 랭귀지 1881 함께 읽는 교양 5
에리카 오크런트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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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상 아줌마로 알려진 황선자 씨는 자신이 외계인과 소통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외계인과 지구인과의 통역도 해준다. 나무를 부둥켜안고 대화도 한다. 황선자 씨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은 괴상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이상한 여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면에는 외계인과의 소통 욕구가 숨어 있었을 것 같다. 여기서 '외계인'이란 반드시 지구 바깥에 사는 인간 아닌 생물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가 외계인이 아닌가. 서울 사는 사람과 타 지역 사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과 이국의 사람, 어른과 아이, 늙은이와 젊은이, 여성과 남성(등등)은 서로에게 외계의 존재이다. 우리는 매일 외계와 접촉하고 소통을 시도한다. 가장 일반적인 소통 방법이 바로 언어, 말()이다. 그런데 우리를 소통하게 해주는 언어는 불완전해서 종종 오해를 빚어내기도 한다. 세상 어떤 언어도 완벽한 소통을 이뤄주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세상 모든 사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고, 당연히 언어에도 그것이 반영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완벽한 언어를 꿈꿨다.

 

   《이상한 나라의 언어 씨 이야기》는 쉽고 완벽한 언어를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인공어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스타트렉》에 나오는 '클링온'이나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에스페란토', 찰스 블리스가 만든 블리스 기호, 언어를 음악처럼 연주했던 쉬드르 등등 다양한 인공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특히 찰스 블리스가 고안한 블리스 기호는 비록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그 뜻이 참 훌륭하고 감동적이다.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힘든 장애 아동들을 위해 만들어진 쉽고 단순한 의미 기호들은 실제로 장애아동들의 소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의미 기호들이 복잡하고 그 상징성 또한 모호한 점, 소통에 매우 유용한 도구였지만, 언어가 아니라 기호였다는 점이 블리스 기호의 실패 요인이 되었다.

 

   언어는 서로 공유하는 것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의 지표이다. 언어는 우리의 문화를 그 어느 것보다 더 많이 표현하며, 우리가 불평하고 논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간직된 저장소인 것이다. (134쪽)

 

   블리스 기호처럼 대부분의 인공언어들은 그 논리성이나 합리적인 체계 따위를 떠나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다. 인간에게 있어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고유한 언어에는 그들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언어는 인간에게 존재의 본질을 일깨워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부분의 인공언어들이 열정으로 태어나 대중의 비웃음 섞인 외면 속으로 사라졌지만, 어떤 인공어들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에스페란토의 경우가 그렇다. 세계 공용어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전세계 에스페란토 이용자들의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은 다채로운 문화 교류의 장이 된다. 사람들이 인공어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 달리 에스페란토는 사용자 특유의 정체성을 없애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문화가 에스페란토로 표현되어지기를 바란다.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녹색 스타킹이나 녹색 드레스, 녹색 버클을 착용한 사람들이 잔디밭에 모여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사람들은 비웃거나 외면한다. 보편적인 공용어가 반드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국가, 혹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는 수없이 많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을 이어주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소속감이었다.

 

   키모와 장마르크는 내 귀에 익지 않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에스페란토 고유의 노래였다. 턱슈염이 약간 희끗한 작고 여윈 사내인 노르만도가 다가오더니 내 앞쪽의 잔디밭에 무대를 등지고 나를 보며 앉았다. 그는 부드러운 에스페란토어로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나를 소개하고 가사 중 내가 모르는 특별한 어구나 어휘가 있으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악센트가 가미된 에스페란토로 이 노래가 <Sola>라고 했다. 무대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노르만도는 그 노래가 청년 대회에서 자주 연주되는 송가 같은 노래라고 설명해 주었다. 가사 내용은 외로움을 느끼다가 에스페란토 대회에서 우애와 세계의식을 느껴 외로움을 극복하고 고국에 있는 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온다는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였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이 노래는 에스페란토 사용자에게는 의미가 깊어요. 대회에서 이 노래가 연주되면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지요." (156쪽)



 

 

   <Sola>라는 에스페란토 고유의 노래와 그 노래에 얽힌 사연들에 공감이 간다.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고맙다. 얼마 전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금발의 외국인 청년이 우리 '하루'(강아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헬로우, 퍼피! 오우, 퍼피! 퍼피! 퍼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몸짓으로 그 외국인은 하루의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한 번 안아보겠다고 했다. 하루가 몸이 안 좋은 상태였고, 병원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외국인은 금방 이해했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가던 길을 갔다. 나는 영어를 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다. 기본적인 표현 정도를 응용하는 정도이다. 그렇더라도 그 이국의 청년과 나는 '강아지'라는 공통의 관심사, 사랑스러운 매개체를 통해 어려움 없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에게 고유의 언어는 매우 중요하지만, 때때로 언어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눈짓, 몸짓, 공간, 공감만으로 소통이 가능한 때도 있다는 것. 언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글, 한글의 아름다움을 폄하하고 훼손시키는 요즘의 언어 사용 실태가 걱정스럽고 부끄러울 때가 많다. 다양한 언어들의 탄생과 소멸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언어, 우리 언어의 귀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울러 나와 외계를 이어줄 가장 적절한 언어는 무엇일지 열심으로 궁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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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즐거움의 발견 - 우울한 현대인이 되찾아야 할 행복의 조건
스튜어트 브라운 & 크리스토퍼 본 지음, 윤미나 옮김, 황상민 감수 / 흐름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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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는 즐겁다. 작은 곰을 깨물어 울리고, 오리를 물어뜯어 죽인다. 차갑고 딱딱한 코알라의 눈알을 사탕처럼 핥고 깨문다. 입을 쩍 벌린 하마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마에게 돌진하고 나가 떨어지고, 또 돌진하고 나가 떨어진다. 우리 강아지 ‘하루’는 자기 방식대로 놀고, 그 안에서 안전하고 즐겁다. 사랑스러운 하루는 나랑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하마 인형을 팔에 끼고 하루랑 치고박기 놀이를 한다. 으르렁거리는 효과음까지 내주면 하루는 학학거리며 웃는다. 작은 공을 공중으로 던져올리면 온몸을 날려 잡는다.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피가 튀지도 않고 비명도 없다. 싸움도 죽음도 없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다. 아직 하루를 알기 전 나는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흥이 없었다. 도무지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을 보냈다. 유일하게 즐기는 것이 있다면 책읽기 정도였다. 한마디로 하품 나는 인간이었다. 그러면서 즐길 거리를 찾지도 않았다. 일상에 즐거운 긴장이 사라지자 나는 웃음을 잃었다. 유머를 즐기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내 일상에는 생기가 없었다. 놀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놀이는 목적성이 없고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특히 어른들은 ‘쓸데없는 짓’을 기피하고 싫어한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시간낭비라 여긴다. 어떤 목적의식이 있어야만 안심을 한다. 건강을 위해, 살을 빼기 위해 사람들은 달리기를 하거나 헬스장에 간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좋은 부모의 도리라 하여 놀이공원에 가거나 외식을 한다. 헬스장의 기계들 속에서 기계처럼 움직이거나 놀이공원의 번잡함 속에서 가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과연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느낌, 온몸이 정화된 것처럼 상쾌한 느낌을 얻을 수 있을까.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놀이’가 아니라고 이 책은 역설한다. 반드시 어떤 형식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함으로써 즐겁다면 그것이 곧 놀이 혹은 놀이의 원천이 되어준다는 것.






   인간은 본래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 놀이가 주는 즐거움이나 활력은 우리 삶에 생기를 더해준다. 그런데 동물이나 인간이 단순히 즐거움을 추구하자고 놀이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놀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통해 동물이나 인간은 삶을 연습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나머지 삶의 토대를 마련하며, 동물의 새끼들은 치고 박는 놀이를 통해 실제로 위기상황에 부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위기능력을 기른다. 놀이는 또한 공감능력, 사회성을 길러준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나 끔찍한 범죄들을 조사해 보면 어린 시절의 ‘놀이’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만 놀고 공부해라. 아이들과 눈만 마주치면 부모들이 하는 말. 어린 시절의 ‘놀이’가 인격형성과 사회성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안다면 더 이상 아이들이 노는 것을 억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에는 놀이치료라고 해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도움을 주는 ‘놀이’도 있지 않은가. 놀이는 학습의 적이 아니며 놀이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학습능력을 올릴 수 있다. 잘 노는 아이가 공부도 잘 할 수 있다. 놀이를 통해 아이는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심각한 게임중독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심하게 놀다 죽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들은 ‘놀이’를 한 것일까. 그 행위가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라고 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어떤 행위도 ‘놀이’라는 것이 된다. 생계를 위한 일도 놀이하듯 즐긴다면 우리 삶은 보다 건강하고 윤택해질 것이다. 사는 일도 놀이하듯 유쾌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놀이의 고수가 아닐까. 이 커다란 놀이의 장(場)에서 한 판 재미나게 살다 간다면 좋겠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을 따라가면 될 것이다. 무미건조함 속에 침잠하고 있던 내 일상에 즐거운 파문을 일으켜준 이 책이 고맙다. 공기가 선선해지는 저녁이 되면 하루랑 산책을 가야겠다. 즐겁게 뛰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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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Il Y A Longtemps Que Je T'aime,2008) 라는 프랑스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친자 살해를 저지르고 15년 간을 감옥에서 보낸 여자(줄리엣)가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라는 또 다른 감옥 안에서 서툴게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영화는 시종 줄리엣의 눈, 그 커다랗고 텅 빈 구렁 같은 눈동자를 놓치지 않는다. 눈만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 눈빛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과 마음을 붙들어 놓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끈덕지게 따라붙는 그 눈동자의 여운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담배의 재를 떨어내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그 눈빛에 아주 질려버렸다. 『브로덱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글쓴이와 그 영화의 감독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필립 클로델은『브로덱의 보고서』에서 사람의 "눈()은 나이가 없다고, 사람은 어린아이의 눈을 간직한 채 죽는다고, 어느 날 세상을 향해 연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세상을 놓지 않던 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죽는다고" 쓴다. 텅 빈 구렁 같던 여주인공의 눈빛이 나를 사로잡았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여자의 눈빛은 '거울'이었다.

 


   "그자는 거울 같았어. 알겠니, 굳이 말이 필요 없었어. 그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지." (책에서)


  

    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마을에 낯선 사람이 흘러들어오면서 빚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브로덱의 보고서』에서 신부가 이야기하듯 안더러(타인)는 거울 같은 자였다. 광대 같은 행색을 하고 연기처럼 나타난 안더러가 그려낸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에는 놀랍도록 진실한 그들 생의 과정과 비밀이 담겨 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알 수 없는 그 '타인'은 이상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나마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이름이 없다.

 

 

    "줄리엣! 줄리엣!" '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답한다. 네, 여기 있어요.『브로덱의 보고서』에서는 브로덱이 자신의 이름을 네 번이나 얘기하면서 끝난다. 내 이름은 브로덱. 나는 그 일과 무관하다. 브로덱, 이게 내 이름이다. 브로덱. 부디, 기억해 주시기를. 브로덱.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김춘수의 시 '꽃'의 일부이다. 한 존재를 세상과 연결해 주는 '이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에서 줄리엣이 그러하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를 의식하게 해준다. 이름이 없다고 하여 존재도 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고유한 이름은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안더러는 이름이 없다. 아니, 이름을 묻는 마을 사람들에게 침묵한다. "세상을 향해 연 순간부터 단 한순간도 세상을 놓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눈()처럼 통성명을 하는 것도 일종의 소통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안더러는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눈()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을 보여주지는 않는 자가 뚫어지게 나를 관찰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끔찍한 전쟁까지 치른 마을 사람들은 두렵고 불안하다. 안더러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 필립 클로델은 두려움이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시켜가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상해. 별 생각 없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을 저지르지. 그런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을 안고서는 계속 살아갈 수가 없는 거야. 내다 버려야 하지. 그럼 나를 만나러 와. 왜냐하면 그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나한테 다 얘기하지. 나는 하수구야, 브로덱. 나는 신부가 아니라 인간 하수구야. 사람들이 편해지려고, 가벼워지려고 자기들의 온갖 피고름과 쓰레기를 내다부을 수 있는 뇌를 가진 인간. 그러고 나서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 버려. 새사람이 되어서. 깨끗해져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서.  (책에서)

 


    감옥에서 출소한 줄리엣(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2008)은 자신을 옥죄는 또 하나의 감옥에서 살아간다. '죄의식'이라는 감옥이다.『브로덱의 보고서』에서 마을 사람들이 브로덱에게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맡기는 것도 죄의식 때문이다. "그 보고서를 읽는 사람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필립 클로델은 두 작품에서 '죄의식'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백'의 형식을 빌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줄리엣은 자신이 왜 여섯 살 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는다.브로덱의 보고서에서 마을 사람들을 죄의식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마을의 신부이다. 고백성사라는 형식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정화된다.

 

 

   『브로덱의 보고서에는 다양한 은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은 점차 얼개를 잡아간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브로덱이 마을을 떠날 때 그 상징들은 불꽃처럼 폭발한다. 예수상이 달린 십자가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봤을 때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이 사라진 것이다. "마을과 함께 모든 것, 얼굴, 강, 사람, 고통, 샘물, 내가 막 지나온 오솔길, 숲, 바위"가 한순간에 지워져 버린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지." 늙은 은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우리 지방 출신이 아니라서, 아주 먼 곳에서 왔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넌 다른 아이들과 달랐어. 항상 사물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있었거든……. 항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지." (책에서)

 

 

   소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양복장이 빌리시' 이야기는 후반부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브로덱이 어릴 적 페도린이 들려준 이 옛날 이야기에는 놀라운 상징이 숨어있다. 가난한 양복장이 빌리시는 어머니와 아내, 어린 딸과 함께 피토포이라는 '상상의 도시'에 산다. 어느 날 왕이 보낸 기사 셋이 그를 찾아와 왕을 위한 옷을 지어 달라고 주문한다. 빌리시는 멋진 옷을 바쳤고, 기사는 이틀 후에 왕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 뿐이었다. 슬픔에 찬 빌리시는 마지막 기사가 옷을 주문했을 때 왕의 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기사는 말한다. 왕에게는 삶과 죽음을 정하는 힘이 있는데, 네가 오래 전부터 바라던 딸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빌리시는 이미 자신에게는 딸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기사가 빌리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빌리시, 왕이 네 어머니와 아내를 빼앗아 갔을 때 너는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네가 갖지 못한 딸을 주려고 하셨다. 왜냐하면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그 딸이 실은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사리를 구분하지 못하는구나. 너는 정말로 삶보다 꿈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느냐?'


 

   브로덱이 완성된 보고서를 가져갔을 때 오어슈비어는 그것을 한 번 읽고 불 속으로 던져버린다. 보고서라는 일종의 고백성사를 통해 그들의 죄는 재로 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불타 없어진 것이 그들의 죄뿐은 아닌 것 같다. 보고서와 함께 슐로스 여인숙과 안더러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함께 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브로덱의 보고서는 허구였다는 것. '모든 것을 파괴하고 폭로하는' 전쟁의 희생자 브로덱이 파괴된 자신의 인간성과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바로 허구의 보고서가 아니었나 말이다. 지옥과도 같은 삶 속에 내던져진 브로덱에게는 꿈이 간절했던 것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그의 다른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특히 필립 클로델은, 비록 두 작품밖에는 알지 못하지만, 작품 곳곳에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들을 장치적 도구로서 마련해놓고 있다. 주의 깊게 살피면 그 상징과 이미지들은 폐부를 찌른다. 그것은 거울과도 같아서 오랫동안 똑바로 쳐다보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다시 거울 앞에 서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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