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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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으로 오른편 사람들의 시야를 차단하고, 신문을 접어 왼손에 바꿔 들고 천천히 아래로 내리면서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코트 소매 단추에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반사되어 시야 한 귀퉁이로 미끄러지듯이 흘러갔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지갑 끝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뽑아낸다. 손끝에서 어깨로 떨림이 흐르고 따끈한 열기가 조금씩 몸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주위의 다양한 인간들, 그 무수히 교차하는 시선이 이 부분만은 공백이 되어 전혀 날아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긴장하는 손가라고가 지갑의 접점을 견뎌내면서, 접어놓은 신문 틈새에 지갑을 끼우고 오른손으로 바꿔 들어 내 코트 안 주머니에 넣었다. 숨을 조금씩 토해내고 체온이 다시 오르는 것을 의식하며 눈으로 주위를 확인했다. 손가락에는 아직도 이물을 잡았던 긴장감이, 타인의 영역에 비집고 들어섰던 저릿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9쪽)

 

   니시무라는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지갑을 터는 소매치기이다. 그런데 니시무라는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소매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소매치기 행위에 경제적 절박감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는 돈이 궁하지 않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소매치기를 한다.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지갑을 끼우고 슬쩍 꺼낼 때의 그 짜릿한 긴장감과 동시에 손 안에 느껴지는 이물감을 즐긴다. - 니시무라가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터는 순간이 어찌나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는지, 책을 읽는 나 자신 마치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타인의 지갑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 니시무라는 소매치기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범을 초월하고 거기서 쾌락과 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그 자신도 타인이 만들어 놓은 규범이나 도덕관념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다. 범죄자로서 '그들(사회적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반인)'이 만든 울타리 바깥 쪽에 서 있는 니시무라는 그 너머를 동경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엄숙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어떻게 걸어가도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멀고 아름다운" 탑은 그런 동경과 무의식적인 도덕관념, 죄의식 같은 것을 상징하는 일종의 장치로서 작용하고 있다.

 


   기다란 공동주택과 키 낮은 아파트가 늘어선 지저분한 골목에서 올려다보면 그 탑은 언제나 흐릿하게 보였다. 안개에 뒤덮여 윤곽이 애매한, 오래된 백일몽 같은 탑이었다. 어딘가 외국의 것처럼 엄숙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어떻게 걸어가도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그 탑은 멀고 아름다웠다. (201쪽)




   니시무라의 도벽은 '배고픔'에서 시작되었다. 고아였던 그는 편의점에서 훔친 삼각김밥을 입에 밀어넣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 행위에 죄도 악도 느끼지 않았다. 성장을 요구하는 몸뚱이는 수많은 먹을 것을 원하고, 그것을 손에 넣어 먹는다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는 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덕이나 규범도 생존 본능이 충족되고 나서의 일이라는 것.

 



   머리를 길게 기른 한 아이가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있었다. 외국에서 사온 거야. 아이의 목소리는 크고 날카롭게 울렸다. 반짝반짝 빛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자동차는 아이의 손에 들린 작은 컨트롤러에 따라 속도를 올려 내달렸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술렁거렸다.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진 것을 자랑하는 그 아이는 추악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 추악함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 자동차가 없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장난감 자동차를 훔쳤다. 외국의 물건은 내게 왜 그런지 그 탑을 연상시켰다. (202/203쪽)

 

   어린 니시무라의 도둑질은 배고픔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진 것을 자랑하는" "추악한" 아이의 장난감을 훔친다. 그 장난감은 그러나 그의 손에 들어오자 반짝임이 사라진다. 니시무라는 그것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자동차를 진흙탕에 내버린다. 위화감을 주는 외국의 장난감 자동차에서 니시무라는 탑을 연상한다. 이때, 어린 니시무라는 자신이 속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를 실감했을 것이다. 다른 아이가 부모로부터 선물 받은 외제 장난감을 훔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끝내 자기 것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니시무라는 그 세계, 눈을 돌린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탑처럼 "멀고 아름다운" 그 세계를 잊을 수가 없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탑처럼, 니시무라의 마음속에는 끝내 가 닿을 수 없는 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니시무라의 소매치기 행위의 주요 동기는 거기에 있다. 비록 손에 들어오는 순간 그 반짝임이 멈춘다고 하더라도 소매치기 행위를 하는 그 순간에는 손끝으로나마 그 세계를 훔쳐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시무라의 소매치기 행위는 "멀고 아름다운" 세계에 섞일 수 없는 자의 절망적인 몸부림, 그것이다.

 



   제목 <쓰리>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첫 번째 의미가 '소매치기'라는 것은 이미 드러났다. '쓰리'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셋(three)이다. 이제 기자키를 소개해야 할 시점이다. 야쿠자 두목 기자키는 작품에서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니시무라가 자신이 소속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망감과 동경에서, 때로는 무의식적이나마 후회와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소매치기를 하는 - 슈퍼마켓에서 마주친 소매치기 소년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 반면 기자키는 자신의 기분 대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조종하는 데에서 악마적 쾌감을 느낀다.



 

   네가 만일 악에 물들고 싶다면 결코 선을 잊어서는 안 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면서 실실 웃는 것 따위로는 시시하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를 보면서 딱하다고 생각하고 가엾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괴로움이나 그녀를 키운 부모에까지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정의 눈물을 흘려가면서, 그러면서 좀더 큰 고통을 가해야 해. 정말 기막히게 멋있지, 그 순간은! (...) 나는 인간을 끔찍하게 죽인 직후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고, 길 가던 아이들이 웃는 얼굴을 보고 아, 참 귀엽구나, 생각할 수 있어. 그 아이가 고아라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죽일 수도 있어. 아아, 가엾어, 라고 생각하면서! 신이나 운명에 만일 인격과 감정이 있다면, 이건 바로 그 신이나 운명이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착한 인간이나 어린애가 불합리하게 죽어가는 이 세계에서!" (165/166쪽)

 

   기자키는 자신의 검은 권력을 신격화하여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니시무라가 기자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기자키는 니시무라의 익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잠깐 언급했듯이 기자키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 더해 제 손아귀에 다른 사람의 운명을 놓고 아슬아슬한 게임을 즐긴다. 그런데 더 잔인한 것은, 그 표적이 된 자의 운명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니시무라를 표적으로 정한 기자키는 그에게 세 가지 임무를 맡긴다. 제목 '쓰리(three)'가 뜻하는 두 번째는 바로 이 '세 가지 임무'이다. 니시무라는 모든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지만 결국 칼에 맞아 죽어간다. 그것이 기자키가 정해놓은 니시무라의 운명이었다.



 

   <흙 속의 아이>, <모든 게 우울한 밤에>로 국내에 알려진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최근작 <쓰리掏摸>는  절대 악의 화신 기자키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니시무라를 내세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크고 검은 힘과, 그 힘의 그늘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사회적 약자를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낸다. 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 진지하고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섬세한 심리묘사는 가독성을 높인다. 일단 책을 펼치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과연 오에 겐자부로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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