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보자. 미래의 자기 자신과 맞닥뜨린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간혹 머릿속에 그려보는, 눈 한 번 깜빡하면 사라지는 환영이 아닌 질량과 체온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나 자신과 마주... 가만, 무슨 소리 못 들었는가? 쉿.
그 일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쏜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아니다. 내가 쏜 사람은 미래의 나 자신이다. 나는 그를 죽인다. 나는 미래의 나 자신을 죽인다.
ㅡ 본문 중에서
소설의 첫머리 문장이다. 내가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SF적 상상력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 저 문장이 품고 있는 이미지는 꽤나 강렬한 것이었다. 색다른 미끼였던 셈이다. 그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도 안 보았던 내가, 뭣도 모르고 찰스 유의 SF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주인공 찰스 유는 타임머신 안에서 10년째 칩거중이다. TM-31 인격 프로그램 '태미'와 '필'이 유일한 대화상대이다. 개도 한 마리 있다. 우주에 버려진 로봇 개 '에드'이다. 그의 작은 상자 안에 생명체의 온기라고는 없다. 찰스는 그 안에서 타임머신 수리공으로 일한다. 타임머신 수리공에게는 고장난 타임머신을 수리하는 일 말고도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다. 다른 시공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찰스의 어머니가 그 대표적인 예로 묘사되어 있다. 과거 가장 행복했던 1시간을 무한 반복하며 살아가는 어머니 곁에는 실제로 아들도 남편도 없다. 1시간짜리 기억을 재현해내는 홀로그램이 있을 뿐이다. 평행우주론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보면 주인공이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아 현실을 뒤바꾸기도 하던데, 찰스 유의 SF세계에서 과거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과거 시공간에 붙들리거나 길을 잃는 것이고, 그래서 타임머신 수리공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 여행'은 인간의 불만이 만들어낸 가장 기발한 테마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과 '후회'는 역설적이게도 현재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모듈(module)이 아닌가. 찰스 유의 SF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기억'과 '후회'이다. 다소 난삽한 작가의 과학적 이론을 차치하면 소설의 구성은 무척 단순하다. 소설의 시공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타임머신 안에 있는 찰스, 타임머신 안에 있기 전의 찰스의 시간이다. 소설은 두 시공간을 교차하며 오가는 찰스를 따라가고 있다. 타임머신 안에 있기 전, 그러니까 찰스의 과거는 불행한 가족사로 얼룩져 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발명가 아버지, 그의 좌절과 무관심으로 신경증에 걸린 어머니, 그 둘 사이에서 눈치만 보던 어린 찰스. 타임머신 안에 있는 찰스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기억'이다. 기억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다. 찰스의 아버지는 어느 날 다른 시공간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어머니는 1시간짜리 홀로그램 안에, 아들은 작은 시간여행 상자, 그리고 아버지 역시 어딘가 다른 시간여행 상자 안에.
모두가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타임머신이다. 단지 대부분 사람들의 타임머신은 고장나 있을 뿐이다.
ㅡ 본문 중에서
타임머신 수리공이라는 찰스의 직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 '타임머신'은 '기억(또는 상상력)'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는 '기억'이라는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타임머신인 것이다. 때때로 이 타임머신은 우리를 옭아매고 함정에 빠뜨린다. 1시간짜리 타임 루프 안에 스스로를 가둔 찰스의 어머니처럼 같은 시간을 무한 반복하며 살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듬어가며 과거의 경험과 화해하고 소통하는 찰스처럼 우리 모두는 타임머신 수리공이기도 하다. 삶이란 적극적으로 '극복' 하는 것도 소극적으로 '인내'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수용'하는 것이어야 한다던 황지우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는 언제나 우리에게 열려 있다. 과거와 교감할 기회는 무한하다는 말이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과거를 수용하고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아! 총소리 들었는가? 그 얘길 하고 있었지. 미래의 자신과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생각해 봤는데, 나는 그냥 모른 체할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주인공 찰스는 미래의 자신을 빵 쏘아버렸다.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황해서. 이유는 대단하지 않지만 사태는 커진다. 시공간상의 오류 때문에 그 상황을 무한 반복하게 되어버린 것.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미래의 찰스가 건네준 문제 해결책이다. 찰스는 이 책을 통해 시공간상의 오류를 풀어나간다. 이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서야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글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한테는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아서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를 뺀다고 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SF 문외한의 감상이니 크게 신뢰할 것은 없다. 어쨌든 이 SF 문외한은 이 소설이 탐탁지 않다. 시공간을 교차하며 과거와 화해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쓰면서도 꿈보다 해몽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이렇게 진땀 흘리며 읽은 소설은 또 처음이다. 구성이나 내용의 난삽함이 장난 아니다. 쉽고 가볍게 읽을 소설을 기대한다면 말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