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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 27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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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바주앵에게 1826년 8월 중순, 노앙
p.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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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넌 참 좋은 친구야. 아주 터무니없고 무분별한 한 인간을 그 불행한 운명에 내맡기지 않고, 오히려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 배 위로 함께 올라탔으니 말이야. 네가 날 너처럼 늘 침착하고 강인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솔직하게 해명하고,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내 모든 생각을 네게 편지로 전할 것을 약속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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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진 조르주 상드의 서간집이다. 평생 4만 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다고 하니 놀랍다. 방대한 양의 편지를 정리해 세상에 내놓은 이들의 열정은 더 놀랍다. 그녀의 편지는 '조르주 뤼뱅(Georges Lubin)'이라는 상드 연구가에 의해 1964년 프랑스에서 첫 출간을 시작으로 1995년 26권이 완성되었다. 준비 작업까지 포함하면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 소개하는 번역본《편지》역시 2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 60여년의 열정과 노고가 황송하기만 하다. 읽는 내내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긴긴 열정의 세월을 이렇게 쉽게 넘겨도 될까 싶었다. 그 열정의 세월만으로도 나는 이미 감동한 것이다. 열정은 책에도 고스란히 배어있다. 책에 대한 해설과 옮긴이 인터뷰, 사진자료들을 통해 조르주 상드와 《편지》이해를 돕고 있다.
《편지》는 프랑스 원본에 포함된 1만 8000 통의 편지 가운데 508편을 선별해 엮은 것이다.《편지 1》은 그 첫 번째 서간집이다. 조르주 상드가 열네살이던 1818년부터 1830년 스물여섯살 때까지 쓴 편지 72편이 실렸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포함하여 열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편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20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새 발의 피인 셈이다. 어머니나 오빠 등 친지에게 쓴 편지는 많지 않다. 서너 통 정도. 소녀시절이어서인지 친구 잔 바주앵에게 쓴 편지가 대부분이다. 잔 바주앵은 수녀원 기숙사 시절 동기이다. 편지 내용으로 짐작해 보면, 예의바르고 침착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상드는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고 무분별한 성격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상반된 두 친구는 자주 감정적 충돌을 일으켰던 것 같다. 잔에게 보내는 상드의 편지에는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인정하고 이해를 구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나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알아. 다만 내 마음이 선하고 정겹고 진실하다는 것을 네게 보여줄 시간을 달라는 거야. 내 행동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내 성격을 연구하면서 내 행동을 잘 살펴봐. 그러면 수많은 결점 밑으로 착한 본성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바로 거기에 우정이 자리잡고 있어, 잔. 그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과오와 결점을 참아주는 거야. (...) 만약 사람들이 내 행동으로만 나를 판단하고 나를 관대하게 봐주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면, 내겐 단 한명의 친구도 남지 않을 거야." (237쪽)
상드의 변덕에 슬슬 짜증이 났다가도 이런 식의 진실한 호소를 읽게 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약해진다. 나도 모르게, 괜찮아 괜찮아, 한다. 결혼 이후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쓴 편지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43번 편지, 일명 '고백 편지'라 불린다는 장문의 편지(무려 40쪽에 달한다)를 읽고는 또 마음이 말랑해지고 만다. 나도 모르게, 괜찮아 괜찮아, 그녀를 토닥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대담한 솔직성(나쁘게 말하면 뻔뻔함)이 그녀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변덕, 충동성, 불평, 침울함 등 치명적인 결함을 상쇄할 정도이니 마력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실컷 일 저질러놓고 이실직고하는 착한 아이 같은 상드를 끝내 미워할 수가 없다.
《편지 1》에는 노앙에서의 생활이 자주 언급된다. 소녀시절과 결혼생활 대부분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상드의 이미지와 달리 조용한 전원생활에 대한 예찬이 대단하다. 상드의 편지에서 이러한 의외성은 자주 발견된다. 아마도 그녀의 복잡한 성격 때문인 것 같다. 편지들에서 상드는 밝고 열정적인 모습과 침울하고 고독한 이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지? 하는 심정이 되어 한 호흡 쉬어갈 때가 많았다. 여기 실린 편지들이 시기적으로 감성이 예민한 소녀시절과 변화가 많은 결혼생활 때 쓰여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4만여 통의 편지와 그 편지를 쓰지 않은 나머지 시간까지 생각하면 내가 읽은 몇 통의 편지로 상드를 이해하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나는 지극히 작은 일부를 엿본 것 뿐이다. 그러나 파장은 크다. 한 사람의 순수한 진심이 참 고맙다. 순수한 진심을 받아줄 20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던 조르주 상드가 부럽고.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책을 엮은 열정의 세월과 옮긴이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