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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ㅣ 에디션 D(desire) 1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그책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적인 명성, 아름다운 아내와 두 아이. 스스로 '운 좋은' 인생이었다고 인정하는 '나'는 아들의 연인을 본 순간 영혼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동질감'이었다. "잠깐 동안 나는 같은 부류를, 나 같은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았다."(35쪽) 아들의 연인, 안나를 통해 '나'는 허울 뿐이었던 자기 삶의 실체를 들여다 본다. 세계의 규칙에 순종하며 기계적으로 움직였던 눈가림 인생. 그 안에는 열정이 빠져 있었다. 운명처럼 나타난 안나는 그 결핍된 욕망을 충족해준다. 한편 안나는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상처 입은 사람"이다. 그녀의 세계는 '애스턴'이라는 상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애스턴은 안나의 친오빠. 안나를 향한 사랑의 고통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끔찍한 기억을 안고 있는 여자는 사랑-소유욕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난 당신이 냉혈한처럼 말하듯 '준비해둔' 적 없어요. 일이 그냥 벌어졌어요. 마틴을 만났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어요. 둘 중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관계가 더 깊어졌어요. 그런데 그때 당신은 인생의 은밀한 코너를 돌았고 내가 거기 있었어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내게는 통제권이 없었어요. 나는 마틴을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당신을 만나게 될 줄도 몰랐고요. 하지만 내 인생의 모양을 만드는 힘들은 늘 인지해요. 그런 힘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내버려두죠. 때로 그것들은 허리케인처럼 내 인생을 헤집으며 찢죠. 때로는 내 발 밑의 땅을 밀어올려서 내가 다른 땅에 서 있게 하고, 그 힘들이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삼켜버려요. 나는 지진 속에서 중심을 잡아요. 누워서 허리케인이 나를 지나가게 내버려두죠. 난 싸우지 않아요. 나중에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하죠. '아, 적어도 나한테 이게 남았구나. 그리고 그 좋은 사람 역시 살아남았구나.' 난 조용히 가슴의 돌판에 영원히 가버린 이름을 새겨요. 그런 다음 내 길을 다시 가기 시작하죠. 이제 당신과 마틴, 그리고 사실 잉그리드와 샐리까지 폭풍의 눈 속에 있어요. 그 폭풍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내게 무슨 힘이 있고, 무슨 책임이 있겠어요?"(96쪽)
고통의 경험에서 살아남은 안나는 불행한 생존자이다. 이 생존자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감하다. 애스턴의 죽음이 자기 통제권 밖에 있었듯 다른 사람의 고통 역시 그러하다고 믿는다. 모든 일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일어난다는 위험한 합리화 속에 산다. 안나의 사랑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세상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던 남자가 이 한 여자만은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겪는 황홀한 고통은 남자를 파멸로 몰아간다.
이 작품은 92년 루이 말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한때 큰 논란을 몰고 왔던 영화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안 봤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먼저 봤다면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소 충격적인 이미지들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스스로 쌓아올린 편견의 벽에 막혀 작품과 제대로 소통하기 벅찼을지 모른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큰 거부감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탁월한 심리묘사 덕분이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 처리도 치밀하다. 스치듯 지나는 짤막한 대사에도 그들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상처를 꿰뚫는 작가의 통찰력이 놀랍다. 여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우습다. 누구나 고유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흡수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이질적인 존재들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상처는 일상적이다. 다른 사람 존재 자체가 상처일 때도 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삶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본능과 욕망을 구체화하려면 일상적인 세계, '나'의 말대로 하자면 '눈가림 인생'에서 벗어나 은밀한 세계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까. 조심스럽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눈가림'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잣대와 가치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똥을 누기 위해서 우리는 문을 잠그고 홀로 차가운 변기 위에 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약혼자의 아버지, 아들의 연인과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폭풍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커다란 액자를 걸어놓고 매순간 다른 각도에서 관찰했던 작품 속 '나'처럼, 독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과 소통할 수 있다.《데미지》는 감춰져 있던 우리 안의 욕망과 맞닥뜨리게 해주는 '고통스러운 선물'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