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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 - 현대 성생활의 기원과 위험한 진실
크리스토퍼 라이언 & 카실다 제타 지음, 김해식 옮김 / 행복포럼 / 2011년 4월
평점 :
사랑은 숨을 헐떡임이 아니고, 흥분도 아니고, 영원한 열정의 약속들의 선포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중 누구라도 우리들이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 그 자체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타 없어질 때 남는 그것이다.
루이 드 베르니에르 Louis de Bemieres, <코렐리의 만돌린>
전세계적으로 이혼률이 무섭게 급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떠오르는 이혼 사유 중 대표적인 것이 '성격차'이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낮고 은밀한 목소리도 들린다. 성적(sexual) 취향의 차이에서 오는 성생활의 불만이 부부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역시 수긍할 만하다. 결혼이라는 것이 좋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녀가 만나 공식적으로 한 가정을 이루는 순간 '성생활의 자유'도 함께 보장되는 것이다. 물론 자기 배우자에 한해야 한다는 제약도 붙는다. 합법적으로 성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조건에는 '자유'라는 단어를 붙여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단 한 사람과만 허용한다는 제약이다. 결혼을 약속하거나 갓 결혼한 부부에게 이 조건은 제약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동안 마음껏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일은 행복하고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이 행복하고 유의미한 관계가 무너질까? 별로 유쾌하지 않은 물음을 던지면서 이 책은 시작된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평생동안 성행위를 하는 것. 결혼의 가장 기본적인 이 조건이 불행의 싹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럴리가!' 고개를 젓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특히 자기 배우자가. 성에 대한 인식이 개방적이 되었다고는 해도 그건 남의 얘기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조금 용기를 내서 자기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하기도 한다. 성매매업소는 여전히 성행중이고 은밀한 장소에서 뜨거운 배신은 계속된다. 남편은 비정상적인 성애 장면을 보면서 자위를 하고 아내는 남편의 무관심에 싸늘하게 등을 돌리고 있다. 대체 무엇이 개방적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성은 은밀하고 가식적이다. '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라는 질문 역시 어쩌면 가만히 덮어두고 싶었던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느냐고, 어느 영화에서 순진한 청년은 조용히 항거했지만, 영화가 계속되고 그 청년이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했던 그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배우자에게서 메아리처럼 듣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절망과 불신은 다양한 결혼 문화와 가족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아니, 고쳐 말해야겠다. 다양한 결혼 문화나 가족 형태가 반드시 사랑과 결혼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누차 문명인의 편견을 경고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문명인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인가 보다. 책에 소개된 다양한 문화권의 결혼 문화나 가족 제도는 무척 낯설고 때때로 혐오스러우며 불편하다.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는 일부다처제나 한 아이에게 여러 명의 아버지가 인정되는 가족 형태까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하는, 소위 미개인이라고 하는 그들의 삶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저리 살아도 될까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짐승같다. 그런데 이 책은 아니라고 한다. 일생동안 한 사람의 배우자에 성행위를 제한하는 우리의 결혼 문화야말로 인간 본능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냉정한 과학자들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해 왔다고 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점이라고 믿었던 인간의 오만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 오만은 위험하다.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저 원시적인 사람들의 문화는 야만적이고 더러우며 우리의 문화는 고귀하고 이상적이라는 확신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토록 완강하게 확신하는 이상적인 틀에서 우리는 진정 고귀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굶주린 짐승처럼 불만에 차서 혼란스러운 발길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우리가 누군가와 '짝짓기'를 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짝'이 될까? (134쪽)
쾌락을 위해 '여러' 파트너들과 성행위를 하는 동물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보노보와 인간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문란하고 왕성한 성욕은 동물적이기보다 인간적인 것이다. 그런데 참 어렵다. 아, 그렇습니까, 하고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그러면 어째야 하나. 배우자의 본능적인 성욕을 인정하고 다른 암컷(또는 수컷)들과의 짝짓기를 허용해 주어야 하나. 골치가 아프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루이 베르니에르의 문장은 우리 결혼생활의 핵심을 집어내고 있는 것 같다. 흔히 말하는 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뜨거운 성욕은 사라지고 마음만 남은 상태. (물론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결코 자연스럽지도 행복한 상태도 아닌 것 같다. 마음이라도 남은 것을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억지스러운 노력이라도 해야 되는 걸까. 어떤 사람은 참고 어떤 사람은 집을 뛰쳐나가 다른 짝을 찾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문명인의 성생활이야말로 가장 미개하고 저급한 것 아닌가. 알면서도, 문명인의 '고귀한!' 오만은 쉽게 가면을 벗지 않을 것 같다. 현대 결혼 관습(일부일처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의 뿌리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위험하고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