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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내면적인 것은 항상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이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사회학적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노르망디의 소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는 이 작품 역시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중성적인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객관적인 문체를 통해 되살아나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나의 아버지, 당신의 아버지, 우리 모두의 아버지(들)로 확장됩니다.
그는 술에 취해 더욱 침울해진 낯으로 집에 들어왔다. 걸핏하면 헌팅캡을 벗어서 아이들을 후려치곤 했다. 거친 사내여서 아무도 감히 그에게 시비를 걸지 못했다. (...) 못된 성질은 그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 가난을 견뎌 내게 하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는 특히 집안의 누군가가 책이나 잡지에 빠져 있는 꼴을 보면 난폭해졌다. 그는 읽거나 쓰는 법을 배울 시간을 갖지 못했다. (본문 중에서)
소젖 짜는 농부, 공장 노동자를 거쳐 소상인에 이르기까지 '나'의 아버지는 "어쨌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행복"하다고 믿으면서요.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삶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가난을 견"디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기 위해,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손수건으로 덮어 놓"으면서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아버지는 지식인 세계에 대한 열등감과 경외감을 품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그에게 있어 '선생님'의 존재는 "모든 행실과 동작을 지휘하는 무서운 우주"였지요. 감정의 은폐는 그 열등감과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고향의 말을 버리고 의식적인 표준어를 사용하거나 혹은 침묵하면서 자꾸 희미해져가는 동안, 그의 딸은 표준어는 물론 외국어까지 구사하면서 아버지의 세계, 즉 "단순하거나 하찮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멀어집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이나 음악은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난 살아가는 데 그런 거 필요 없다.」 (본문 중에서)
"그를 멸시한 세계", "부유하고 교양있는" 세계에 자식이 속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아버지의 큰 자부심이며, 삶의 이유 자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등졌거나 등지려고 애쓰는 "저 아래 세계"에서, 자식들이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던 모든 아버지들의 구원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욕망에 굴복해 왔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저 아래 세계의 추억을 마치 뭔가 천박한 것인 양 잊게 만들려고 애쓰는 이 세계의 욕망에 말이다. (본문 중에서)
이 작품이 단순히 아버지의 희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말을 빌려 보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문화를 위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몸담았던 문화를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야 했던, 자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린 사람들의 운명이 거기 있"습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와 감동이 있습니다. "엉뚱한 짓을 해 창피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실수로 터뜨린 방귀만큼이나 고약한 인상을 주게 될 잘못된 표현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시골뜨기"로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 .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고통". 자신을 둘러싼 "천박한" 세계를 부정하고 벗어나려는 이 고통스러운 욕망은 우리 모두의 욕망이기도 하지요. 부정할 수 있습니까? 매우 담담하게 그려지는 이 신분상승의 욕구에서 우리가 담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생각할 때 썼던 그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아니 에르노)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을 자존심으로 여기"는 아버지의 감정을 호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입니다. "성별도 모호하고, 종종 나의 말이기보다는 타인의 말일 수도 있는, 전체적으로 다인격적 형태"를 띠는 '나'에 대해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부연합니다. "그것은 나를 픽션화하는 수단이 아닌, 내 체험 속에서 현실의 지표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좋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