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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90년대 중반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선 주인공이 각각의 결정을 내렸을 때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엮은 것이었는데요, 굉장한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결심했어! 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고요. 순간 순간 크고 작은 선택으로 점철되는 인생에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불만'은 이 '미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생극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가지 않은 길'을 걸어볼 수 있다면 우리는 변화할 수 있을까요. 과거를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면요? 비프케 로렌츠는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백만, 수천만 개의 다양한 가능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무한히 많은 숫자 조합이 가능한 숫자 자물쇠처럼 말이죠. 우리가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갔을 때와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 거죠. (본문 중에서)
주인공 찰리는 스물아홉 살의 여성입니다. 순간 순간의 욕망에 충실하게, 속되게 말하면 꼴리는 대로 살아요. 쿨하다고요? 그렇지도 않아요. 소심한 쾌락주의자라고 할까요. 일단 저지르고 나서, 곧잘 후회와 자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성욕과 음주를 조절하지 못해 벌이는 일들은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충동조절장애를 의심해 볼 정도이지요. 찰리의 인생은 정신없이 꼬이고 있고요. 스스로 헤어날 수 있는 의지나 가능성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아, 우리의 찰리! 위험한 찰리! 가엾은 찰리! 절망적인 찰리! 누가 우리 찰리를 도와줘요. 찰리와 함께 염원해 볼까요. 찰리의 새로운 인생을.
Doctor, doctor won't you please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Prescribe me somethin' 제발 나 좀 치료해 주세요
A day in the life of someone else?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있게
Cuz I'm a hazard to myself 난 나한테 위험하니까요
ㅡ Pink, Don't let me get me 중에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헤드헌팅 회사에서 찰리는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됩니다. 뉴라이프, 새로운 인생을 위해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것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우고 싶은 특정한 순간들은 CD에 옮겨지고요. 우리의 찰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한순간에 찰리의 삶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요. 그야말로, 뉴라이프,냐고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아요. 찰리는, 여전히 찰리. 기억과 기질은 그대로였으니까요. 대신 찰리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있었지요. 지난 모든 순간들은 그 자체로 뜻이 있다는 것.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진실을 깨우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찰리는 진짜, 레알 뉴라이프를 시작하게 되었고요.
공감을 자아내는 소재와 발랄한 서사가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형식 면에서 다소 가볍다 느끼실 분도 있겠지만, 자잘한 감동 정도는 얻을 수 있습니다. 후반부에 깨알 같은 반전도 있고요. 부담 없이 읽기에 좋은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