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트릭 - ‘나’라는 환상, 혹은 속임수를 꿰뚫는 12가지 철학적 질문
줄리언 바지니 지음, 강혜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인중 왼편에 희미한 흉터가 있다. 막 걷기 시작했던 서너 살 무렵, 어린 나를 태우고 달리던 삼촌의 자전거에서 떨어져 생긴 것이라고 아빠가 말해주었다. 너는 바둑알처럼 예뻤어. 사랑받았지. 이따금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손이 갈 때가 있다. 가만히 쓸어보면서 꿈결처럼 멀고 낯선 시간과 그때 그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귀염 받는 아이였다고 힘주어 새겨본다. 내 기억에는 없는 사람들의 표정과 아이였던 나의 감정이 결여된 그 순간을 추억하는 일은 그러나 항상 실패로 돌아간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실재하는 그 아이는 나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나,라고 믿고 있다. 그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그 시절의 사진 속에서 지금의 나와 닮은 구석을 찾는 일에 골몰하면서.

 

    열두 살 때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어색하고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 연보라색 바탕에 검은 물방울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었다. 내가 싫어했던 옷이다. 나랑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반 친구를 보았을 때 느꼈던 이상한 수치심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옷을 벗어버렸다.

    나는 순종적이고 수줍음 많은 아이였다. 죽어가는 엄마의 병 수발을 했고, 아이들 놀이에 잘 끼지 않았다. 겁도 많았는데, 특히 개를 무서워했다. 내 뒤를 쫓아오는 개를 피해 달아나느라 동네를 몇 바퀴나 돌던 기억도 난다. 개만큼이나 무서웠던 것이 하나 더 있다. 약 먹는 일이다. 알약을 삼키지 못해서 매번 가루를 내서 먹었는데, 그 쓴맛을 못 참고 게워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아빠가 혼냈다. 약 먹다 죽고 말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 시간은 공포로 남아 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나(아이)를 지금의 나는 "순종적이고 수줍음 많은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굉장히 구체적인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그 아이는 그러나 역시 지금의 나와는 매우 동떨어진 것 같다. 낯설다는 말이다. 나는 변했다. 이제 물방울무늬 원피스는 내 몸에 맞지 않는다. 죽어가던 엄마는 죽고 없다. 순종적이지도 않고, 커다란 알약도 꿀꺽 잘 삼킨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는 개가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다정한 친구다. 내 몸과 얼굴과 표정과 생각과 성격은 그 아이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를 나라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은 아주 당연하고 확고한 것이라서 믿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자아의식이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동일인이 되는 것이지요." (본문 중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나와 같을 것이다. 너를 가졌을 때 사진이야. 유난히 배가 불룩했지. 어머니가 가리키는 오래된 사진 속의 불룩하게 솟은 배를 본다면 당신은 그 둥그런 배를 '나'라고 믿을 것이다. 기억에 있든 없든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나'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어서,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어리둥절하고 다소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그 믿음이 뭐 어쨌다고?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 속으로 아주 깊이 파고들 때면, 늘 이런저런 지각, 이를테면 열기나 냉기, 빛과 그림자, 사랑과 증오, 고통과 쾌락, 색깔 혹은 소리 등과 마주친다. 나는 이런 특정 지각과 구분되는, 오롯한 나 자신을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 (본문 중에서)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이 책에서 줄리언 바지니는 내가 '나'라는 의식, 자의식(自意識)의 본질을 탐색한다. 자아를 보는 두 가지 관점 -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과,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을 중심축으로 하여 논의가 전개된다. '나'를 '나'로 만드는, 영원히 '나'일 수밖에 없는 자아의 핵심, 이를테면 영원불변한 영혼이나 뇌의 핵심적인 부분 따위가 있다는 '진주 관점'은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에 반해 자아의 핵심에 불변의 진주 따위는 없으며, 우리의 정체성이 뇌와 육체의 기능적 산물일 뿐이라는 '묶음이론'은 다양한 사례와 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묶음이론'과 나란히 따라오는 결정론(determinism, 세상 모든 일이 우연이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일정한 인과법칙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이론)만 해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존재에 대한 고귀성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기 전에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인들 어찌 알겠는가?" (본문 중에서)

 

     3부로 구성된 '자아 탐구'는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종교, 사회학을 아우르고 있다. 자칫 이론적이고 관념적으로 치우칠 수 있는 주제를 구체적인 실제 사례와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입체적이고 흥미롭게 펼쳐낸다. 성전환자와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 불교의 '환생'과 기독교의 '부활' 등 가깝고도 멀리 있던, 생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던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human)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humane) 되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내가 '나'라는 의식은 뇌와 정신과 육체가 만들어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묶음이론'과,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이 물리적 환경 안에서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필연적인 것이고, 우리는 그저 생각하는 유기체에 불과하다는 '결정론'을 수긍하더라도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자아의 속임수든 아니든 '나'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여전히 여기 있으니까. 그러나 한편 '에고 트릭(the ego trick)은 '나'의 파멸, 즉 죽음을 보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라는 충언으로 새겨도 좋을 것 같다. (오오, 영원불변에 대한 가엾은 환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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