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깨닫는다 - 인간은 모르거나 착각했던 동물의 마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들
버지니아 모렐 지음, 곽성혜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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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동물이 모두 땅에서 살던 태초에는 사람이 원하면 동물이 될 수 있었고 동물이 원하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모두 때로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동물이었고,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모두 같은 언어를 썼다. 말이 요술 같던 시대였다.

 

                                           -    나룽그라크, 네트실리크 에스키모인 Nalunglaq, Netsilik Eskimo

 

    

 

     어린 조카가 내가 기르는 개의 눈을 찌른 적이 있다. 신기한 듯 개의 눈을 응시하더니, 스위치를 누르는 듯한 무심함으로 검지 손가락을 쑥 찔러넣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개도 아픔을 느낀다고 말해주었다. 피도 나요? 아이가 물었다. 너랑 똑같아. 다치면 피가 나지. 진짜 빨간 피.

 

     어린 아이의 호기심은 대부분 잔인한 놀이로 충족된다. 개구리를 좁은 유리병에 가두고 개미들의 긴 행렬을 단숨에 뭉개버리고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 날리면서 놀던 유년 시절을 떠올려 보라. 그건 그냥 놀이였다. 뛰고 기고 나는 작은 동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우리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의 가벼운 장난이 가여운 저 생명체들에게는 크나큰 재앙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거의 모든 동물들이 그렇듯이 물고기도 인간과 직접 소통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불이익을 겪는다. 물고기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뿐더러 어떻게 대해주는 게, 어떻게 사육하는 게, 야생에서 어떻게 관리해주는 게 최선인지 자기 입장을 밝히지 못한다. 동물들에게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없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주지 않는 한. 그런데 동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우리가 들을까? (본문 중에서)

 

     가까운 과거에는 동물을 살아 있는 기계 또는 농작물 정도로 취급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 동물들에게도 감정이 있고 통점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안했다. 마음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오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동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이 오만의 장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어서 정신적인 경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들도 비웃음을 사고 묵살당했다. 동물을 의인화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지금도 상황이 썩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숲을 갈아엎고 강을 오염시키면서 인간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침범하고 약탈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가혹한 훈련에 시달리거나 좁은 우리 안을 뱅뱅 맴돌면서 인간의 구경거리가 된다. 간혹 탈출을 감행하다 총살당하기도 한다. 버려진 개들은 거리를 헤매다 붙들려 대부분 안락사당한다. 소 돼지 닭 같은 가축들의 사육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이들보다 작은 쥐나 새, 물고기는 동물의 정의에서 제외되기도 한다니 말 다 했지.

 

     어떤 쥐들은 온순하고 쾌활한 데 반해 어떤 쥐들은 침울하고 비관적이다. 고통을 받으면 얼굴을 찡그리고, 발바닥에 더 이상 전기 충격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 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본문 중에서)

 

      그럼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동물의 마음을 연구해 온 과학자들도 있다. 과학 전문 기자로 일하는 버지니아 모렐은 세계 각국을 돌며 그들의 연구실을 방문한다. 이 책에서 버지니아 모렐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실 정황을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생태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동물들의 인지 능력을 연구하는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과 제약이 따른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인내, 특히 동물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았다. 수만 마리의 개미 등에 일일이 색칠을 하거나 앵무새 앞에서 똑같은 단어를 수백 번씩 되뇌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짹...짹...짹...짹...짹." "저 '짹' 소리 말이에요?" 쌍안경으로 그 앵무새를 관찰하면서 내가 물었다. 내색은 안 하려고 했지만 사실 황당하고 조금 실망스러웠다. 유리앵무의 서명 접촉 신호, 즉 이름이라는 것은 막 알에서 깬 병아의 짹 소리만큼이나 짧고 가냘팠다. "네, 그 '짹'요. 그게 제가 연구하는 소리예요." (본문 중에서)

 

     책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놀랍게도 우리 인간과 매우 유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개나 고양이라면 익숙하지만 개미와 쥐, 물고기에게서 발견되는 인간적인 감정은 낯설고 경이롭다. 쥐들의 감정과 웃음, 개미의 학습 능력, 물고기의 기억력, 애도하는 코끼리, 간통과 사기, 이혼, 영아 살해, 절도 등으로 파란만장한 앵무새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의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동물의 인지 능력, 즉 마음의 발견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 어미를 잃고 실험실에 갇히고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고 인위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 실험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아닐까 싶다. 우리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둬. 물론 이마저도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실험 동물과 연구자 간의 특별한 교감이 자주 언급된다. 

 

    죽기 전날 저녁, 알렉스는 늘 하던 대로 페퍼버그와 작별인사를 했다. 불을 끄는 그녀에게 해준 말, "착하게 있어. 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녀가 대답했다. "내일 올 거지?" "응. 내일 올 거야." 그녀가 대답했다. 그날 밤 알렉스의 심장은 남은 힘을 모두 소진했다. 다음 날 아침, 새장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알렉스를 시설 관리인이 발견했다. (본문 중에서)

 

     동물에게도 정신 능력이 있다는 발견이 동물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 같지는 않다. 만물의 우두머리라는 인간의 오만을 버리지 않는 한 동물이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 날이 오더라도 인간과 동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책에 소개된 동물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와는 전혀 별개의 생명체라 여겼던 저 동물들에게서 내 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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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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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생양아치 같이 생긴 사람이 툭툭 말을 던지고 있었다. 자세는 삐딱한데 말은 바로 하네. 허지웅의 첫인상은 그랬다. 달변은 아닌데 말에 힘이 실렸다. 자기 소신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빡빡하게 굴지는 않더라. 방송인인 듯 방송인 아닌 방송인 같은 그의 본업은 글쟁이다. 신문과 잡지에 시사와 영화 관련 칼럼을 연재해왔고 소설도 썼다. 에세이도 이번이 두 권째라는데, 나에게는 지금 이 책이 첫 책이다. 


    아주머니의 눈은 병아리 같았다. 전염이 될까봐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머니가 땅으로 꺼지듯 박스 앞에 앉았다. 두 눈 촘촘히 절망을 새겨넣은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앞의 얼어붙은 응달에 주저앉아 병아리를 팔고 있었고 나는 도망갔다.  (본문 중에서)

  

    치과 오가는 길에 버스에서 읽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입 속을 보여줘야 하는 불편과 약간의 통증도 잊었다. 별 일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지웅 특유의 놀랍도록 담담한 태도는 여전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방송인 허지웅의 또 다른 면모를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따위의 평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방송에서 보고 느낀 허지웅이 허깨비는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 


    사람이 괴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선 스스로 괴물이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삶에서 심오한 의미나 가치를 찾는 책들은 많다. 별로 와닿지 않는다. 삶은 그저 버티는 것이라는 허지웅식 가치관이 더 설득력 있다. 인생 뭐 있어? 풍선껌 불듯 떠벌리는 동네 양아치의 허세나 가혹한 형벌의 굴레에 갇힌 시지프스의 절망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허지웅은 버티어내는 '삶의 자세'에 방점을 찍고 있다. "참 별 거 아닌" 삶과 사람을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 '버티는 자세'에 있다는 것이다. 허지웅식 버티기'는 곰처럼 웅크리고 침묵하는 소극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반대다. 자기를 둘러싼 현실을 바로 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글쟁이' 허지웅이 밀고 나가는 처세다. 이 책에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허지웅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겼다. 크고 작은 사회 문제와 영화 이야기, 개인사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허지웅의 목소리가 잘 살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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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곽효환 지음, 이인 그림 / 교보문고(교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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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콧물이 샘솟는 걸 보니 가을인 것을 알겠다. 비염을 달고 사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몸의 수분이 죄 코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질질 흐르는 콧물을 훔쳐내면서 잠을 설칠 때가 많다. 코 묻은 휴지뭉치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방 안에서 물고기처럼 주둥이를 빠끔거리면서 숨막히는 밤을 지나본 적 없으면 고독을 논하지 마라. 물기 없는 피부는 가렵고, 빡빡한 눈알은 눈꺼풀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지걱거린다. 눈물이라면 함께 울어줄 이라도 찾을 테지만, 아, 콧물은 혼자만의 슬픔이고 재앙이다. 울고 싶어도 콧물밖에 떨굴 수 없는 비염 환자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맞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 황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고독한 비염 환자였던 것이다. ​참으로 찌질한 내용들을 공감하면서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황은 거대한 몸집과 안 어울리는 작은 방에서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책임질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 완전한 자유의 몸. 이따금씩 자잘한 임시 노동을 해서 생계를 이어간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황은 대개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산림감시는 그런 황에게 매우 적합한 일이었다. 일이라고 하기 뭣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는 그런 일이었다. 구체적인 임무는 산불 감시였는데 산불이 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고요한 산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산불을 기다리는 지경이 된다나. ​그런 때에 황은 책을 읽었다. 소설, 시, 산문, 자기계발, 성경. 문자로 된 것들은 다 읽으면서 시간의 공백을 메우곤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황의 일상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황에게 내가 쓴 시 몇 편을 읽어주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가을비가 툭툭 떨어지는 저녁이었다. 부끄러움도 없이 몇 편의 시를 떠듬떠듬 읽어내려갔다. 코끝이 빨개진 황은 좋다, 좋다를 연발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어떤 시는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던데. 황이 말했고, 뭔 말인지 모르는 가려움도 시 읽는 맛, 이라고 내가 응수했다.

    단숨에 읽히는 글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시는 결핍과 공허 위에 지어진다. 새 울음과 바람 지나는 기척이 전부인 적막한 산중에서 황은 소리내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울음처럼 바람처럼 안개처럼 산골짜기를 떠도는 황의 목소리를 상상하면 가슴 한 켠 물이 괸다. 어디로 갈지 몰라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가 된다고 황에게 말해줘야지. 모름지기 시는 떠듬떠듬 읽어야 제맛이라고.

    매일 아침 시를 읽어주는 이메일이 도착한다. 열지 않고 쌓여가는 것들이 더 많다. 시를 소개하는 이의 감성이 너무 개입해서 시 읽는 맛을 떨어뜨린다. (동영상의) 배경음과 육성까지 더해져서 더 그런 것 같다. 누가 반쯤 녹여 먹다 뱉은 사탕을 입에 문 것 같달까. 지금 소개하는 책을 택하면서도 별 기대 안 했다. 곽효환 시인이《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연재한 시와 감상을 묶은 책이다. 그냥 시나 읽을 생각으로 펼쳤다. 한데, 생각 외로 담백하다. ​곽효환 시인이 내놓는 시와 짤막한 감상은 정갈하게 차린 시골밥상 같다. "현란한 말놀이와 별스럽고 당혹스러운 이미지로 가득한 젊은 시들"의 느끼한 맛에 물린 이라면 맛나게 읽힐 것이다.

    보육원에서 처음 보는 아이에게서 시인은 허기진 그늘을 본다. 아이가 처음 보는 타인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자마자 나타나는 어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빈자리를 시인은 허공이라 부른다. (...) 어디 보육원뿐일까. 사람의 유전자엔 누구에게나 허기진 그늘이 있고 우리 사회 곳곳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산재해 있다. 작은 손길만 내밀어도 철컥하고 달라붙어 이내 채워질 혹은 떨어지지 않을 빈자리. 그늘. 허기진 허공이 당신 보이는가. (본문 중에서)

     김기택의 시 「보육원에서」에 달린 시인의 감상이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서늘하고 담담한 응시. 시의 맛을 크게 떨어드리지 않는다. 시만 읽을 생각이었는데 감상평까지 꼬박꼬박 다 챙겨읽었다. 내가 읽는 시에 온 마음 기울여 좋다, 좋다 하고 공감해주던 황과의 술자리가 떠올랐다. 시보다도 더 시 같은 정취를 만들어내는 담담한 응시. 공감이 있던 저녁. 뭔 말인지 모르겠는 시를 함께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사람 없다고 풀 죽을 것도 없다. 이 책부터 펼쳐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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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전환점이 된 일란성쌍둥이에 관한 기록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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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8월. 캐나다 매니토바 주(州) 위니펙의 한 병원에서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난다. 건강한 남자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부모인 론과 재닛은 쌍둥이에게 브루스와 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브루스와 브라이언이 생후 7개월 무렵, 작은 문제가 생긴다. 두 아이가 소변 볼 때마다 불편해 하는 걸 엄마 재닛이 발견한 것이다. 성기 포피가 요도구를 막고 있었다. 소아과의사는 '포경으로 인한 병증'이라고 진단했다. "흔한 증상이고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1966년 4월. 쌍둥이 형제 중 첫째인 브루스가 수술대에 오른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챔 박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스테이크 써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아이의 다리 사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살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본문 중에서)
   ​ 끔찍한 일이 발생한다. 의사의 부주의로 브루스의 성기가 타버린 것이다. "석탄 조각"처럼 새까만 브루스의 성기는 "조그만 노끈" 같은 흔적만 남기고 부서져 내렸다. 복구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수술을 받지 않은 브라이언의 포경은 저절로 사라졌다. 론과 재닛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수술 때문에 브루스가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고가 있고 십개월 정도 지났을 때, 론과 재닛 부부는 희망적인 해법을 찾게 된다. 바로 성전환수술이었다. 당시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성문제전문연구원 겸 임상심리학자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던 존 머니 박사가 티븨 토크쇼에서 '성전환 수술의 기적'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논리는 매우 명확하고 단순해서 "가방끈이 짧은" 론과 재닛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반음양(중성) 또는 불의의 사고로 성기를 잃은 아이에게 성전환 수술을 하고 꾸준한 양육을 통해 성 정체성을 심어주면 자연히 후천적인 성을 따르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론과 재닛은 브루스를 여자아이로 '만들' 결심을 한다.
 
    부모님이 예전에 그런 결정을 내렸던 이유는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죠. 자식이 불행해지길 바라는 부모가 어딨겠어요? 하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행복한 척할 수는 없잖아요? 나를 위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잖아요. 내가 되어야지. (본문 중에서)
    존 머니는 당시 성전문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 정체성 gender identity'이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자신의 저서와 다양한 매스컴을 통해 머니는 가학피학증, 호분증, 절단도착증, 자기교살증 등 성도착에 대해 "독특한 기호"라고 소개하면서 소아성애가 반드시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전환 수술'은 "성의 금기를 깨뜨리는 머니의 실험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정체였다. 성 정체성 연구는 윤리적 제약이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머니는 중성으로 태어난 영아와 불가피하게 성전환 수술을 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해 왔다. 발달상으로 정상인 유아를 상대로 실험을 진행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온다. "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포경수술을 받다 성기를 잃은 남자애"가 부모와 함께 머니 박사를 방문한 것이다.
    머니 박사는 남녀 생식기의 차이와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었다. 머니 박사와 일대일로 만나야 했던 브렌다는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남자아이들이랑 싸울 때가 있는지, 여자아이들이랑 노는 걸 좋아하는지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시콜콜한 질문에 시달렸다.  (본문 중에서)
​   브루스는 전례가 없는 특이한 사례였다. 정상적으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인간의 한도 내에서 생물학적으로 최대한 동일한 한 쌍"이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궁극의 대응 짝"이었다. 머니는 자신에게 찾아온 놀라운 기회를 거머쥔다. 일명 '쌍둥이 케이스'라 불리는 사상 초유의 성 심리 실험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나도 수염을 깎으면 안 되느냐고 말한 기억이 나요." 데이비드는 브렌다로 살았던 시절의 가장 초반부에 속하는 그때 일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빠가 '안 돼, 안 돼. 넌 엄마랑 놀아라' 하고 말씀하셨죠. 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나는 왜 수염 깎으면 안 돼?' 하고 물었어요." (본문 중에서)
   머니 박사의 요청은 간단해 보였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자신을 방문할 것. 브루스에게 여성의 정체성 심어주기. 론과 재닛은 브루스의 이름을 브렌다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머니 박사에 의하면 꾸준한 양육을 통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만 하면 브루스는 온전한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부부는 브렌다의 머리를 여자아이처럼 꾸미고 한겨울에도 치마만 입혔다. 소변도 앉아서 보게 했다. 엄마인 재닛은 브렌다에게 여성적인 몸짓과 말투를 선보이기도 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렌다는 여아보다는 남아에 가까운 행동 양상을 보였다. 남자아이들과 주먹다짐을 하는가 하면 언제나 무리의 대장이 되고 싶어했다. 소변을 서서 누었고 여자아이들과 노는 걸 시시하다고 여겼다. 브렌다가 성장하면서 문제는 더 크게 불거진다. 브렌다는 자신이 여느 여자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주변의 강압 때문에 여자아이를 흉내내는 일을 그만두기도 어렵다. 심신의 부조화가 깊어져서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간다. 당시 브렌다를 가까이서 지켜본 교사나 아동심리상담가의 의견은 하나로 모아진다. 브렌다는 여자아이다운 면모가 하나도 없다는 것. 머니 박사는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말괄량이 기질'에 불과하다고 부모를 안심시킨다.
   ​다들 저더러 여자라고 하는데, 저는 여자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게다가 남자아이들처럼 노는 게 좋고,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죠. 뭔가 이상하구나. 나는 저기 저 여자아이를 닮아야 하는데 저 남자아이처럼 굴고 있잖아. 그래서 별종 취급당하는구나. (본문 중에서)
 
   사춘기에 이른 브렌다는 부모로부터 그간의 모든 사정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여성 흉내를 그만두고 자신의 본래 성으로 되돌아간다. 브렌다를 버리고 데이비드 라이머로 개명한다. 수술을 통해 인공 페니스를 갖추고 여성과 결혼도 한다. 본성보다는 양육이 성 정체성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에 힘을 실어줄 '쌍둥이 케이스'에 희망을 걸었던 머니 박사의 계획은 대패하고 만 것이다.
​   "나는 남자로 태어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역겨운 남자의 상징을 달고 있었다." '역겨운 남자의 상징'이란 페니스와 고환을 말한다. 머니가 훗날 성인과 유아의 성전환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은 불길한 여운을 남긴다. "가축은 물론이고 인간도 수컷이 태어나자마자 거세하면 여자들이 살기에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본문 중에서) 
​   자아의 성 감각을 형성하는 것이 본성인가 양육인가 하는 논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쌍둥이 케이스'의 전말을 밝히는 이 책은 객관적인 자료(브렌다의 상담녹취 원고, 정신과 상담 기록, 사건을 둘러싼 증인과 사건 당사자의 진술)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브렌다(데비이드)의 부모 론과 재닛의 연애와 결혼부터 브렌다가 데이비드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한편 본성 대 양육 논란으로 뜨거웠던 당시 과학계의 생생한 현장감을 전한다.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존 머니 박사의 이중적 태도와 사악한 면모, 개인적 트라우마​는 그 어떤 스릴러보다도 섬뜩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런 괴물!이 세계적인 명망을 떠안고 당시 과학계를 이끌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보다 놀라운 건 이를 대하는 주변의 태도이다. 미키 다이아몬드의 끝없는 반박에도 불구하고 머니 박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권위에 굴종하는 비겁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억지와 모순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 애석하다. 브렌다(또는 데이비드)의 비극적 - 데이비드 라이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생애와 과학계의 복잡한 음모를 담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죽은 개구리들의 원통함을 생각했다.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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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말하다 - 세계의 문학가들이 말하는 남자란 무엇인가?
칼럼 매캔 엮음, 윤민경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신기하다. 사람 몸에서 이리 많은 눈물이 흐를 수도 있구나.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내 눈물을 골똘히 들여다 보면서 그 사람이 던진 말이었다. 혐오나 조롱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경이였다. 우는 사람을 처음 보는 듯이 나를 관찰하는 태도가 눈물을 멎게 했다. 충격이었다. 살면서 그런 상황은 또 처음이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눈물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그는 나와는 별개의 생물처럼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 이상한 생명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남자'였다.
​    "그럼, 어릴 때 아빠는 눈물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대신 노래를 불렀다는 거예요?" "아니, 아빠는 노래를 잘 못해. 그래서 울고 싶을 때마다 주로 누군가를 때리곤 했단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레브는 골똘히 생각하면서 말했다. "난 행복할 때 누군가를 때리는데." (163쪽)
​   남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양한 형식으로 대답하는 이 책에서도 남자의 형편 없는 공감 능력은 주된 이야깃거리가 된다.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나약함을 애써 감추면서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 놀이에 심취하는 남자들. 자기 감정을 돌보지 않는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불화로 지치고 외롭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으니까 누구에게 위로받기도 불가능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거나 행복해지면 누군가를 때리면서 그게 남자다운 거라고 자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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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소년은 자신의 방 거울 앞에 벌거벗은 채 서 본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혐오한다.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섬세하고 가녀린 몸, 그리고 그 안의 나약함이 보인다. 그는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잘려나간 머리털을 가슴과 겨드랑이에 풀로 붙인다. 자신의 높고 가는 목소리를 없애보려 휘발유를 들이마시고 성냥에 불을 붙여 삼킨다. 양팔 근육을 칼로 베어내 벌리고 그 사이로 돌멩이들을 집어넣어 근육이 부풀어 보이게 한다. 허벅지와 종아리뼈를 반으로 쪼개고 쪼개진 뼈 사이에 각목을 대어 키를 늘린다. 작은 성기를 긴 칼로 베어내 중간에 칼을 꽂는다. (226쪽)
    '남자다움'이란 관념에 희생된 남자들의 진짜 속내​도 이야기 곳곳에 묻어난다. '거짓말쟁이'와 '사기꾼' 노릇에 지친 남자들은 이제 모르는 것은 그저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울고 싶을 때 울고 무서우면 달아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단순한 삶은 그들에게 너무 먼 이야기일까. 영웅 놀이에 질린 남자들은 그저 사람 노릇을 하고 싶은 것인데.
   때로는 제가 남자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저 나무이기를 바라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겨울에도 나무에 꽃이 피길 원하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사람들도 더이상 나무에게 겨울에도 꽃을 피우길 바라지 않지요.(134쪽)
   세계적인 작가 여든 명이 말하는 남자 이야기는 짧지만 굵직한 여운을 남긴다. 단편, 에세이, 직설적인 충고에 이르는 다양한 형식이 읽는 맛을 더한다. 이야기 형식은 갈리지만 요지는 하나로 모아진다. 남자는 지상에서 가장 고독한 생명체라는 것. 그래도 긍휼히 여겨서는 안 된다. 자존심을 다친 남자가 생존을 위협 받은 짐승처럼 뾰족한 이빨을 세우고 당신에게 달려들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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