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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방송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생양아치 같이 생긴 사람이 툭툭 말을 던지고 있었다. 자세는 삐딱한데 말은 바로 하네. 허지웅의 첫인상은 그랬다. 달변은 아닌데 말에 힘이 실렸다. 자기 소신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빡빡하게 굴지는 않더라. 방송인인 듯 방송인 아닌 방송인 같은 그의 본업은 글쟁이다. 신문과 잡지에 시사와 영화 관련 칼럼을 연재해왔고 소설도 썼다. 에세이도 이번이 두 권째라는데, 나에게는 지금 이 책이 첫 책이다.
아주머니의 눈은 병아리 같았다. 전염이 될까봐 눈을 내리깔았다. 아주머니가 땅으로 꺼지듯 박스 앞에 앉았다. 두 눈 촘촘히 절망을 새겨넣은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앞의 얼어붙은 응달에 주저앉아 병아리를 팔고 있었고 나는 도망갔다. (본문 중에서)
치과 오가는 길에 버스에서 읽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입 속을 보여줘야 하는 불편과 약간의 통증도 잊었다. 별 일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지웅 특유의 놀랍도록 담담한 태도는 여전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방송인 허지웅의 또 다른 면모를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따위의 평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점이 좋았다. 방송에서 보고 느낀 허지웅이 허깨비는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
사람이 괴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자기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선 스스로 괴물이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삶에서 심오한 의미나 가치를 찾는 책들은 많다. 별로 와닿지 않는다. 삶은 그저 버티는 것이라는 허지웅식 가치관이 더 설득력 있다. 인생 뭐 있어? 풍선껌 불듯 떠벌리는 동네 양아치의 허세나 가혹한 형벌의 굴레에 갇힌 시지프스의 절망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허지웅은 버티어내는 '삶의 자세'에 방점을 찍고 있다. "참 별 거 아닌" 삶과 사람을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 '버티는 자세'에 있다는 것이다. 허지웅식 버티기'는 곰처럼 웅크리고 침묵하는 소극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반대다. 자기를 둘러싼 현실을 바로 보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글쟁이' 허지웅이 밀고 나가는 처세다. 이 책에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허지웅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겼다. 크고 작은 사회 문제와 영화 이야기, 개인사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허지웅의 목소리가 잘 살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웅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