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곽효환 지음, 이인 그림 / 교보문고(교재)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맑은 콧물이 샘솟는 걸 보니 가을인 것을 알겠다. 비염을 달고 사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몸의 수분이 죄 코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질질 흐르는 콧물을 훔쳐내면서 잠을 설칠 때가 많다. 코 묻은 휴지뭉치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방 안에서 물고기처럼 주둥이를 빠끔거리면서 숨막히는 밤을 지나본 적 없으면 고독을 논하지 마라. 물기 없는 피부는 가렵고, 빡빡한 눈알은 눈꺼풀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지걱거린다. 눈물이라면 함께 울어줄 이라도 찾을 테지만, 아, 콧물은 혼자만의 슬픔이고 재앙이다. 울고 싶어도 콧물밖에 떨굴 수 없는 비염 환자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맞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 황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고독한 비염 환자였던 것이다. ​참으로 찌질한 내용들을 공감하면서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황은 거대한 몸집과 안 어울리는 작은 방에서 간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책임질 가족도 없이 혈혈단신, 완전한 자유의 몸. 이따금씩 자잘한 임시 노동을 해서 생계를 이어간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황은 대개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산림감시는 그런 황에게 매우 적합한 일이었다. 일이라고 하기 뭣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는 그런 일이었다. 구체적인 임무는 산불 감시였는데 산불이 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고요한 산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산불을 기다리는 지경이 된다나. ​그런 때에 황은 책을 읽었다. 소설, 시, 산문, 자기계발, 성경. 문자로 된 것들은 다 읽으면서 시간의 공백을 메우곤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황의 일상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황에게 내가 쓴 시 몇 편을 읽어주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가을비가 툭툭 떨어지는 저녁이었다. 부끄러움도 없이 몇 편의 시를 떠듬떠듬 읽어내려갔다. 코끝이 빨개진 황은 좋다, 좋다를 연발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어떤 시는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던데. 황이 말했고, 뭔 말인지 모르는 가려움도 시 읽는 맛, 이라고 내가 응수했다.

    단숨에 읽히는 글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시는 결핍과 공허 위에 지어진다. 새 울음과 바람 지나는 기척이 전부인 적막한 산중에서 황은 소리내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울음처럼 바람처럼 안개처럼 산골짜기를 떠도는 황의 목소리를 상상하면 가슴 한 켠 물이 괸다. 어디로 갈지 몰라 떠도는 목소리들이 시가 된다고 황에게 말해줘야지. 모름지기 시는 떠듬떠듬 읽어야 제맛이라고.

    매일 아침 시를 읽어주는 이메일이 도착한다. 열지 않고 쌓여가는 것들이 더 많다. 시를 소개하는 이의 감성이 너무 개입해서 시 읽는 맛을 떨어뜨린다. (동영상의) 배경음과 육성까지 더해져서 더 그런 것 같다. 누가 반쯤 녹여 먹다 뱉은 사탕을 입에 문 것 같달까. 지금 소개하는 책을 택하면서도 별 기대 안 했다. 곽효환 시인이《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연재한 시와 감상을 묶은 책이다. 그냥 시나 읽을 생각으로 펼쳤다. 한데, 생각 외로 담백하다. ​곽효환 시인이 내놓는 시와 짤막한 감상은 정갈하게 차린 시골밥상 같다. "현란한 말놀이와 별스럽고 당혹스러운 이미지로 가득한 젊은 시들"의 느끼한 맛에 물린 이라면 맛나게 읽힐 것이다.

    보육원에서 처음 보는 아이에게서 시인은 허기진 그늘을 본다. 아이가 처음 보는 타인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자마자 나타나는 어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빈자리를 시인은 허공이라 부른다. (...) 어디 보육원뿐일까. 사람의 유전자엔 누구에게나 허기진 그늘이 있고 우리 사회 곳곳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산재해 있다. 작은 손길만 내밀어도 철컥하고 달라붙어 이내 채워질 혹은 떨어지지 않을 빈자리. 그늘. 허기진 허공이 당신 보이는가. (본문 중에서)

     김기택의 시 「보육원에서」에 달린 시인의 감상이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서늘하고 담담한 응시. 시의 맛을 크게 떨어드리지 않는다. 시만 읽을 생각이었는데 감상평까지 꼬박꼬박 다 챙겨읽었다. 내가 읽는 시에 온 마음 기울여 좋다, 좋다 하고 공감해주던 황과의 술자리가 떠올랐다. 시보다도 더 시 같은 정취를 만들어내는 담담한 응시. 공감이 있던 저녁. 뭔 말인지 모르겠는 시를 함께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사람 없다고 풀 죽을 것도 없다. 이 책부터 펼쳐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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