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내가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때, 나는 평행 우주로 여행을 가서 나보다 더 잘나가는 나 자신을 만났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함께 어울렸다. 나는 그 우주의 내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아내려 애썼다. 그도 나처럼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루 동안 무슨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가? 무슨 실수를 했는가? 나는 그에게 내가 오래전에 저질렀던 '엄청나게 커다란 실수'에 대해 말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알고 보니 그와 나의 차이는 바로 그 실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살지 못하는 삶을 그가 사는 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나는 내 삶이 엉망진창이라고 말했고, 그는 내말에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3등급 슈퍼영웅』 p.21
3등급 슈퍼영웅 '습기맨'이 평행 우주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대목이다. 옮겨 적은 부분이 뭐 그렇게 독창적이어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아니다. 오직 나의 관심은 '실수'라는 단어였다. 빌어먹을 실수. 하도 많이 해서, 돌이킬 수도 없어서, 이제는 허탈하지도 않은 그놈의 실수들. 심지어 다채롭기까지 했던 실수들과 그 실수들이 만든 지금의 나와 내 상황을, 유체이탈 비슷한 상태로 지켜보니 쓴물이 넘어온다. 그리고 정말로 내게 하고 싶은 말. '누구니, 넌'
'습기맨(Moisture Man)'은 다른 슈퍼영웅들에 비하면 뭐 참 거시기한, 그러니까 주변의 습기를 끌어들여 물풍선을 만들거나, 분무기처럼 안개를 뿌리는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딱한 수준일 수 밖에 없는 3등급 슈퍼영웅이다. 더 난처한 것은 그의 친구들은 진짜 슈퍼영웅이라는 것! 오호~ 그나저나 어찌나 그 처지가 나와 같은지. 뭐 나는 주변의 습기는 커녕 본인 몸에 있는 수분도 지키지 못하지만, 여튼 내게는 주변의 우울함을 끌어들여 웃음으로 분출하는 아주 초큼(조금보다 더 작은)의 뜬금없고 엽기적인 능력이 있으니, 등급 판정 기준에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뭐 4등급 '아무개 정신줄'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정말 궁금하네. '누구니, 넌'
습기맨은 하늘을 날고 싶어한다. 유후~ 하늘을 나는 습기맨이라. 어째 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어찌되었건 습기맨은 하늘을 날고 싶고. 억지스럽게 날아야 하니 뭔가 대가를 치뤄야하고, 그러니까 착한놈 그만하고 나쁜놈으로 전향해야 하고, 생각보다 대가는 크고! 뭐 그런 비장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눅눅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눅눅한 이야기.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양심을 팔고 습기맨은 부드럽고 빠르게 난다. 세상은 자신이 없어도 멀쩡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행우주에서 만난 또다른 자신의 예언처럼 상황이 더 나빠졌는데도, 지금 그는 매끄럽게 난다. 이렇게 눅눅하고 슬픈 SF소설을 보았나. 그래서 말인데 일전에도 궁금했었는데, 찰스 유, '누구니,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