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내가 일을 손에서(정말 손에서) 놓았다는 풍문은 멀리멀리 흩어져 J의 귀에 닿았다. 일을 그만둔 지 보름인데 소문은 참으로 빠르다. 여튼 J는 다급한 목소리로 얼굴을 보자고 했지만 다급함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지만 대충 감을 잡은 나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은행잔고는 없는데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면 어쩌나, FTA를 우리 둘이 온몸으로 막아보세,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감은 틀렸다. 감나무에서 단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감도 떨어졌다. J는 사랑에 빠져있었다. 얼씨구.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사랑에 빠진 본인들의 입장에서 어디 쉬운 사랑이 있겠는가, 작은 돌뿌리도 태산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깊이 복식호흡을 하고 다 늙은 J와 마주앉아 J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랑에 빠진 J는 도리언의 초상화처럼 불멸의 삶을 살고 있는 듯 했다. 내심 부럽기도 했고 아득하기도 했다. 아- 이토록 언짢은 관음증은 정녕 질투인가. 오로지 쿠폰을 모으기 위해 주문한 스타벅스의 커피는 마침 무지하게 달았다. 뭔들.  

J는 어찌하면 좋겠냐고 했다. 뭘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물음은 먼저의 질문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어찌하면 좋겠냐고. 나는 열심히. 간절히. 즐겁게. 후회없이. 사랑하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 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랑만큼은 열심히. 간절히. 즐겁게. 후회없이가 답이라고 믿는 그러니까 내게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원칙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틀어질 것은 틀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낮과 밤은 찾아오겠지만, 또 그것이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아니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지 모르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젠장.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지만 권위라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냈다. 내 말은 우스워도 저도 나도 좋아하는 강신주선생의 말은 좀 들리지 않을까 싶었다. 강신주의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186쪽을 나는 힘주어 읽었다. 들어라 J여. 

사랑은 타자를 신과 같은 절대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가 나를 나만큼 사랑해주기를 강제할 수 없고, 단지 바라는 것 이외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빠진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기도의 이면에 사실 내 기도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숨은 욕망이 있는 것처럼, 내 사랑도 그에 걸맞는 대가를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욕망 아닌가요? 그래서 바르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내면을 다음과 같이 서럽고 아프게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 쓴 말이다. 들어라 J여.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 나의 천직은 반대로 칩거하는 자, 움직이지 않는 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 않는, 마치 역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같이 '유보된' 자이다.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떠나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책을 내려놓고 J를 바라보았다. J는 울었다. 나는 J를 때리지도 않았고 겁박하지도 않았는데 J는 울었다. 따라서 울 수도 없고 난처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난처한 시간 동안 나는 J를 바라보았다. 예뻤다. 울고 있는 J도 예쁘고, J의 울음을 타고 흐르는 불사의 시간도 예뻤다. 물론 J가 울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돌로 쳐 죽일 놈은 뺀다. 그 놈이 내게 따져도 할 수 없는 일. 나는 무조건 J편이기 때문이다. 암뇨.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J는 내게 말했다.
두 번 다시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가는 숨통을 끊어놓겠노라고.
아- 강신주도 바르트도 구제할 수 없는 저 무지한 인간이라니. 나는 탄식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J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웃었다. 더 정확히 J는 웃었다. 음- 숨통이 끊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J를 웃겼다. 내심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찻집을 나와 얼마를 같이 걷는 동안 J는 내게 말했다. 두렵다고. 
나는 또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어줄까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내게 두려웠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건 또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걸 어찌 말로 하나. 분명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것들. 그저 몸과 마음에 꽂혀있기는 한데 실을 매달아두지 않아 찾을 수 없는 바늘처럼. 어느 날 똑같은 고통으로 느낫없이 이렇게 나를 찌르는데도 나는 말로 옮길 수가 없고 꺼내어 보여줄 수가 없었다. 다행인 것은 J도 내 황망한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J에게 위안이 되었을 수도 있고. 다음에 만날 때는 뭐든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또 사랑이야기,라고 해도 나는 괜찮다. 겨울 밤은 길고, 겨울은 이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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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아- 좋아요. 마냥 좋다고 하는 저는 J처럼 사랑에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좋구나 좋구나, 나도 사랑을 열심히 간절히 즐겁게 후회없이 해야지. 이러고 있네요. 한국의 제비들은 겨울이 오는데도 여전히 활동 중이군요.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굿바이님 서재, 새로운 글이네요. 이제 시작인 겨울, 따뜻하게 보내시길 :)

ps.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어주는 거, 저도 해보고 싶어요. 해볼 거에요. 겨울 가기 전에!

굿바이 2011-12-01 18: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말없는수다쟁이님 :)
바람이 차가워졌던데 오늘 하루 잘 지내시고 있나요?

뭐든 열심히 간절히 즐겁게 후회없이 하면 참-좋은데 말이 쉽지 그게 쉽지 않죠. 그래서 늘 사람들은 어딘가 기웃거리고 떠돌고 하는가 봅니다. 저 역시 그렇구요.
언제 짜잔-하고 모여서 가방에 있는 책 꺼내 아무 페이지나 낭독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신의 계시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근사한 놀이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겨울 가기 전에 꼭 한 번 해보세요.
아참, 그리고, 감기 조심하세요!!!!


2011-12-01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1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