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의 겨울, 제주를 걷고 또 걷는다.
반질거리는 검은 돌들을, 푹푹 빠지는 모래해안을, 내 날숨이 미안하기만 했던 숲길을, 내 탄성이 부족하기만 했던 오름을, 자분자분하게 자리잡은 동네를, 걷고 또 걷는다.
삐죽삐죽 고개를 내민 주황색 감귤나무를 지나, 검은 흙에 자리잡은 당근밭을 지나, 겨울도 비껴가는 파밭을 지나, 넉넉하게 자리잡은 무밭을 지나, 자고있는 말들을 지나, 깨어있는 덩치 큰 개들을 지나, 북극의 겨울을 피해 날아든 까마귀들을 하늘에 두고, 걷고 또 걷는다.
이내 달이 뜬다. 푸른 하늘이 물러나며 별이 쏟아진다. 어둑어둑한 바다 어디선가 철새가 운다. 울음소리는 멀고도 가깝다.
바람이 분다.
보리수나무를 흔들고, 소나무를 흔들고, 낮게 깔린 초록의 덩굴마저 흔든다. 바람이 겉도는 숲에 구멍이 뚫렸다. 쏟아지는 바람에 끌려 고개를 드니, 희고 푸른 물이 덩어리져 하늘과 닿아있다.
그런 건 없었겠지만, 나는 그것을 바다라 불렀고, 그것들을 흔들어 솟구치거나, 가라앉거나, 배회하는 모든 것들을 바람이라 불렀다. 눈이 사물을 의심한다. 마음은 이미 물위를 떠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다음에도 이곳에서 너를 만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마음 한 조각을 떼내어 약속하고 돌아선다. 물위를 떠돌던 햇살이 망막에 맺힌다. 시야가 흐릿하다. 내 눈을 의심한다.
제주의 해안, 한때는 지글거렸을 뜨거운 용암이 바다에 젖는다.
식어버린 꿈이 넘지 못할 문지방에 어디로부터 떨어져 나온 귀한 돌, 닳아서 닳아서 사라질 것 만 같은데, 빛나고 때론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이제는 넓다. 넓고 고요한 해안, 닳아서도 사라질 수 없는 용암의 뼈들은 더는 견고할 수 없는 고독으로 박혀있다. 하늘과 바다와 검은 암석과 모래가 꼼짝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오히려 권태를 잊고 가망없는 욕심을 갈아낸다.
같이 걸었던 내 좋은 사람들의 땀냄새와, 순한 처녀의 웃음소리와, 사뿐사뿐 걷던 총각의 뒷모습이 오늘도 이어질 것 같은 오늘, 주책없는 눈물샘에 돛단배 한 척 띄운다. 돛에 시 한 편 적어 보낸다. 서러운 것들이 펄럭이는 날에는.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에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